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리산 둘레길 한 구간을 혼자 걸은 적이 있다. 확인할 게 있어서 사전답사로 급히 떠난 길이었다. 한적한 길인 데다 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봄이라 길에서 사람의 기색을 찾기 어려웠다. 남원 주천에서 출발해 구례 산동을 향해 걷기 시작하는데 슬슬 겁이 났다. 가는 길에 누군가를 만나도 섬뜩할 거 같고, 아무도 못 만나도 무서울 거 같았다. 운 좋게도 걷기 시작한 지 채 10분도 되지 않아 옆 동네 인월에서 온 동네 아주머니 일행을 만나 길동무가 되었다.

지리산 자락에 사는 분들이라 지리산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시고, 변변한 먹을 것도 안 싸 온 내게 점심 도시락까지 나눠주셨다. 그때 먹은 점심과 정겨운 분위기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 보온도시락에 싸 온 김 솔솔 나는 밥에 반찬이라곤 집에서 먹던 김치나 나물 한두 가지뿐이지만, 컵라면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인 훌륭한 지리산 둘레길의 만찬이었다. 그들도 오랜만에 나온 외출이었는지 걷는 내내 하하 호호 사는 이야기가 그칠 줄 몰랐다. 함께 먹는 밥이 꿀맛이라며 즐거워하던 그들과 걸었던 길은 참 따뜻했다.

따뜻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길

한 번은 일행과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가 반대 방향에서 마주 걸어오는 분들과 같이 앉아 쉰 적이 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들도 우리처럼 자가용으로 왔는데, 다 걷고 차를 회수해야 하는 처지였다. 우린 자동차 열쇠를 교환해 먼저 도착하는 사람이 상대방의 차를 몰아주기로 했다. 먼저 도착한 우리가 그 팀의 차를 몰았고, 덕분에 우리도 차가 세워진 곳까지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믿고 차를 맡겼던 좋은 경험이었다.

따뜻한 길동무를 만났던 인월에서 금계 구간의 길.
 따뜻한 길동무를 만났던 인월에서 금계 구간의 길.
ⓒ 정지인

관련사진보기


반가운 지인을 만났던 위태에서 하동호 구간의 길 풍경
 반가운 지인을 만났던 위태에서 하동호 구간의 길 풍경
ⓒ 정지인

관련사진보기


위태에서 하동호까지 이어지는 지리산 둘레길 구간을 걸을 때였다. 고즈넉한 마을과 하동호로 이어지는 숲길이 편안한 곳이었다. 밤나무가 많아서 길가에 떨어진 밤톨들이 수북하던 소박한 위태마을에 대한 기억이 또렷한데, 잘 아는 지인이 바로 그곳으로 귀촌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오랜 기간 참여연대 안내데스크와 참여사회에서 자원활동을 하던 회원이다. 예전에 위태마을에 친척이 산다고 하더니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제 지리산 둘레길에 가면 반가운 얼굴을 볼 수 있으니 내게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길이 되었다.

자연과 역사를 느낄 수 있는 길

지리산 둘레길은 볼거리가 많은 화려한 길이 아니다. 거창한 것을 기대하고 가면 실망한다. 하지만 큰 지리산의 기운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훼손되지 않은 자연의 길이고, 어머니 품처럼 넉넉한 지리산에 기대어 살아온 소박한 이들의 삶이 묻어있는 길이다. 또한, 빨치산, 민간인학살 등 근현대사 격동의 흔적이 남아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리산 둘레길은 나와 자연, 나와 이웃, 나와 역사를 잔잔히 느끼며 걷는 순례의 길에 가깝다.

지리산 자락 여섯 마을을 지나는 주천에서 운봉 구간
 지리산 자락 여섯 마을을 지나는 주천에서 운봉 구간
ⓒ 정지인

관련사진보기


산동에서 주천 구간.밤재를 넘으며 지리산을 조망할 수 있다
 산동에서 주천 구간.밤재를 넘으며 지리산을 조망할 수 있다
ⓒ 정지인

관련사진보기


지리산 둘레길은 제주올레와 함께 우리 사회의 걷기 열풍을 이끌었다. 2004년 도법스님이 이끄는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이 지리산 순례길을 제안한 이후 시민단체들과 산림청이 힘을 모아 지리산을 지나는 옛길을 찾아냈고, 2007년 사단법인 숲길이 결성되면서 본격적으로 길을 이어갔다. 지리산을 에두르는 옛길, 숲길, 고갯길, 마을 길, 계곡 길을 이어 나간 끝에 2012년에 지리산을 가운데 두고 남원, 산청, 하동, 구례를 잇는 274km 전체 구간이 완성되었다.

지리산 둘레길은 구간마다 특색이 있고 난이도가 다르므로, 각자의 여건에 맞게 고르면 된다. 자세한 정보는 사단법인 숲길에서 운영하는 지리산 둘레길 홈페이지(www.trail.or.kr)에서 도움받을 수 있다. 혼자 걷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숲길'에서 운영하는 토요걷기나 길동무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것도 좋다.

지리산 둘레길 몇 구간을 추천하자면, 인월~금계 구간은 걷다 보면 지리산의 주 능선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숲길과 마을 길, 제방과 농로를 모두 경험할 수 있는 아기자기한 길이다. 걷기도 어렵지 않아 인기 코스 중 하나이다. 전체를 걷기가 부담스럽다면, 하이라이트 구간인 매동마을부터 금계마을까지 8km만 걸어도 충분하다. 9월에는 추수 전 황금빛 다락논을 만날 수 있어 더욱 아름답다.

주천~운봉 구간은 지리산 자락의 여섯 마을을 지나고 멋진 솔숲이 이어지는 코스이며, 산동-주천 구간은 밤재를 넘으며 지리산을 조망하고, 봄이면 흐드러지게 피는 아름다운 산수유꽃을 만날 수 있는 화사한 코스이다. 동강~수철 구간은 시원한 계곡과 폭포를 만나는 길이자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의 슬픈 현장을 지나는 길이다. 지리산의 남쪽 권역인 위태~하동호 구간도 마을과 대숲길, 호수를 아우르는 편안한 코스이다.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분들에게 지리산 둘레길을 권한다. 바쁜 일상과 과한 책임, 스트레스에 지친 분들은 이번 가을, 다 내려놓고 천천히 지리산 둘레길을 걸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언제 가도 편안하고 좋은 길이지만 곡식이 익어가는 가을의 지리산 마을은 조금 더 포근하고 평화로울 것이다.

*월간 <참여사회> 9월호는 인터넷서점 알라딘(https://goo.gl/1mrR7w) 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정지인님은 참여연대 간사로 일했고, 지금은 여행카페 운영자입니다. 매이지 않을 만큼 조금 일하고 적게 버는 대신 자유가 많은 삶을 지향합니다. 지친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여행을 꿈꾸고 있습니다.이 글은 월간<참여사회> 9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지리산 , #걷기, #지리산둘레길 , #인월, #주천
댓글

참여연대가 1995년부터 발행한 시민사회 정론지입니다. 올바른 시민사회 여론 형성에 기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