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주년 콘서트 < TIME TRAVELER >에서 공연하고 있는 서태지

25주년 콘서트 < TIME TRAVELER >에서 공연하고 있는 서태지 ⓒ 서태지 컴퍼니


서태지 25주년 콘서트 < TIME:TRAVELER >에 다녀왔다. '난 알아요' '하여가'부터 '소격동' '크리스 말로윈'에 이르기까지. 그의 찬란한 25년을 톺아보는 시간이었다. 록부터 힙합, 클래식을 오간 그의 음악 인생을 꾹꾹 눌러 담은, '태지 연대기'였다. 보컬 사운드가 좀처럼 중심을 잡지 못했던 것은 큰 흠이었다. 'Live Wire', 'Take Five'처럼 모두가 기대했던 레퍼토리가 빠진 점 역시 아쉬웠다. 

그러나 연출과 구성을 놓고 보자면 올해 최고였다. 같은 장소에서 보았던 콜드플레이의 내한 공연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특유의 극적인 등장부터 LED 화면, 아낌없이 투입된 조명과 폭죽, 돌출 무대를 적극 활용하는 모습, 그리고 각 앨범의 테마에 맞는 영상 선정 등. 빈틈없는 구성이 돋보였다. 최현진(서태지 밴드)의 전자 드럼에 맞춰 깜빡이던 조명도 기억에 남는다. '짬에서 나오는 바이브'란 이런 것이다.

빈틈없는 '태지 연대기'

 서태지와 방탄소년단은 20여 년 전의 '교실 이데아'를 재현했다.

서태지와 방탄소년단은 20여 년 전의 '교실 이데아'를 재현했다. ⓒ 서태지 컴퍼니


오프닝곡인 '내 모든 것', '줄리엣'이 끝나고, 전광판에 '1992.03.23.'이라는 숫자가 나타났다. 3만 5천명의 환호성이 커졌다. 25년 전 '난 알아요'의 돌풍을 알리는 뉴스 음성들이 공연장에 울려 퍼졌다. 음악만으로 이루어지는 시간 여행의 시작이었다.

조명 아래 등장한 주인공은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중년의 서태지는 스무살 청년으로 돌아가 춤을 추고 있었다. 비록 양현석과 이주노는 없었지만, 방탄소년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힙합을 기반으로 한 그룹인만큼, 태지 보이스 시절의 음악들과 더욱 잘 어우러졌다. 아이돌 그룹의 합류 소식을 듣고 반신반의했던 팬들 역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보냈다.(서태지는 방탄소년단을 소개하면서 '서태지와 아들들'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번 공연에서 서태지는 오랜 팬들의 향수를 여러 차례 자극했다. 1995년 '다른 하늘이 열리고'에서 보여주었던 교실 이데아 연설을 그대로 재현하고, '필승'에서는 원키 그대로의 샤우팅을 보여 주었다. 심지어 서태지와 아이들의 은퇴를 암시했던 'Good Bye'를 부르면서 팬들의 눈가를 시큰하게 했다. 바로 이어진 구성이 압권이었는데, 서태지가 장막 뒤에서 5집(첫 솔로 앨범)의 인트로 'Maya'를 연주하는 것이었다. 1분 남짓의 짧은 연주가 끝나고, 거대한 조명과 함께 서태지 밴드는 'Take One'을 연주했다. 은퇴에서 컴백으로, 혹은 하강에서 상승으로. 그는 단 몇 분 동안 수년의 서사를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서태지 25주년 콘서트 < TIME TRAVELER >

서태지 25주년 콘서트 < TIME TRAVELER > ⓒ 서태지 컴퍼니


나에게 서태지는 무엇이었나

나는 1993년에 태어났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1992년에 데뷔했으니, '서태지 세대'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러나 음악을 듣는 일에 있어 나이는 의미 없었다. 서태지는 질풍노도의 학창 시절부터 2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나의 9년을 함께 했던 뮤지션이었다. 서태지는 나에게 록 음악이 얼마나 쿨한 것인지 가르쳐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학생 시절 나에게는 존경심을 보낼만한 '우상'이 필요했던 것 같다. 부유하는 마음을 고정시킬 롤모델을 원했다.

그 와중에 힙스터 기질이 있었던 것인지, 또래 아이들에게 생소한 인물을 존경하고 싶었다. 내 레이더망에 포착된 사람은 지난 세대의 전설 서태지였다. 록음악을 특별히 좋아하지 않았지만 '로보트'라는 노래에 반해 버렸다. '고등학교를 중퇴한 사람이 가요계의 전설이 됐다'는 성공담 역시 내 마음을 흔들었다. 기존의 관습을 비웃는 그의 반골 성향도 좋았다. 글짓기 대회 상금을 모아, 12만 원을 주고 콘서트에 갔다. 생전 처음 가 본 록 콘서트는 신세계였다. 둥둥 거리는 베이스 사운드가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한 아티스트의 앨범을 모두 모은 경험 역시 처음이었다. 'Knock The Wall, Break The World'을 외치는 그가 내게는 누구보다 멋져 보였다.

 서태지 밴드(서태지,TOP,강준형,닥스킴,강준형,최현진)

서태지 밴드(서태지,TOP,강준형,닥스킴,강준형,최현진) ⓒ 서태지 컴퍼니


자라나면서 나는 더 이상 그 시절처럼 서태지를 신격화하지 않게 되었다. 서태지가 새로운 장르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어떤 뮤지션들을 레퍼런스로 삼았는지 역시 알게 되었다. '서태지가 없었으면 우리나라에는 발라드와 트로트만 있었을 것이다'라는 댓글들을 보면 가끔씩 반박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그의 음악마저 부정할 수 있는가. 그가 만들어낸 멜로디, 노랫말은 여전히 내 마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 25주년 콘서트는 오랜 팬들에게 꿈같은 시간을 선물했다. 7집을 듣고 팬이 된 나로서는, '로보트', 그리고 심포니 버전으로 편곡된 '0(Zero)'를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귀한 경험이었다. 관객들을 향해 걸어오는 그를 바라보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자니, 눈물이 났다. 지금도 이 울음이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혼탁한 바람에 더 이상 나는 볼 수 없네
내가 누군지 여긴 어딘지'
- '로보트' 중

어쩌면 다 모두 다 같은 꿈 모두가 가식 뿐
더 이상 이 길엔 희망은 없는가
혹시 내 어머니처럼 나의 옆에서
내가 고개를 돌려주기만 기다리는 건 아닐까
- '0(Zero)' 중

놀러 간 공연이었다. 어떤 해답을 듣기 위해 간 공연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대에 선 서태지는 명료하게 잡히지 않는 고뇌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 때 깨달았다. 쉰을 바라보는 저 중년의 사내는 여전히 나의 영웅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아무튼 행복한 공연이었다. 그의 음악을 접했던 시절, 그리고 그 시절 만난 사람과 추억들이 뇌리를 스쳐갔다. 25년을 함께 했던 이들은 25년 치의 추억을, 5년을 함께 한 사람은 그만큼의 추억을 더듬었을 것이다.

 서태지는 여전히 누군가로 하여금 꿈을 꾸게 만들 수 있는 존재였으며, 열정적인 퍼포머였다.

서태지는 여전히 누군가로 하여금 꿈을 꾸게 만들 수 있는 존재였으며, 열정적인 퍼포머였다. ⓒ 서태지 컴퍼니


신화의 장막을 걷어내고

지난 25년 동안, 서태지의 이름 앞에는 수많은 수식어들이 붙었다 떼어지기를 반복했다. 20년 동안 질리도록 '문화 대통령'이라고 불렸다. 또,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젊음을 투영할 '혁명가', '영웅'으로 여겨졌다. 본의와 달리 '신비주의의 화신'이 되었고, 장사꾼, 카피캣이라며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모든 명예와 오해는 결국, 그가 전무후무한 신화의 주인공이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를 규정하는 이 단어들이 뮤지션 서태지를 온전히 바라볼 수 없도록 막았던 것 아닐까.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촌스러워진 21세기 속에서, 서태지의 영향력과 존재감은 움츠러들어갔다. 등장만으로 젊은이들을 움직이던 시절의 존재감은 세월과 함께 흐려졌다. 신보를 발표할 때마다 1위에 올랐지만, 화제성 역시 전성기에 미치지 못 했다. 그는 2014년 발표한 9집 수록곡 '90's Icon'에서 스스로를 '한물간 90's Icon, 물러갈 마지막 기회가 언제일까 망설이네'라며 자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그가 과거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느꼈을 것이다. 모든 공연이 끝나고 잠실 경기장을 나서면서 뒤를 돌아보니, 150분의 꿈을 꾼 듯했다. 서태지는 여전히 누군가로 하여금 꿈을 꾸게 만들 수 있는 존재였으며, 열정적인 퍼포머였다. 이제, 그가 원하지 않았던 거창한 수식어들을 덜어내고 서태지를 바라볼 때가 되었다. 공연 말미에 그가 했던 멘트처럼, 30주년 콘서트에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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