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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20대는 어땠나요? 반짝반짝 찬란했나요.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암울했나요. 어떤 하루를 보냈건, 누구나 공평하게 10년 동안 20대를 살아내죠. 그렇다면, 금수저 물고 태어났을 것만 같은 정치인들의 20대는 어땠을까요. 어떤 삶을 살았기에 지금 그 자리에 있을까요. <오마이뉴스>가 정치인들의 20대, 청춘 한 자락을 들춰봤습니다. [편집자말]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993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 당시 냈던 홍보책자를 들어보이고 있다.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993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 당시 냈던 홍보책자를 들어보이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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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니가 해야 하는 거시여? 워째 다른 사람도 있는디 니가 꼭 앞장을 서야 허느냐 말이여? 아가, 아가...그거, 니가 안 허면 안 되는 거시여?"

어머니는 아들이 데모 대열의 선봉장이 되는 것이 못내 걱정스러웠다. 간곡하게 말려보았지만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어머니의 부탁을 끝내 들어드리지 못했다.

"저 4살 되는 해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가 갖은 고생해서 키우셨는데 아들이 대학에 갔으니 얼마나 좋으셨겠어요. 주변 사람들이 '남들 다 해도 네가 데모해서는 안 된다, 그럼 넌 나쁜 놈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얘기했는데...뒤에서 구경하다가, 최루탄 터지면 도망가다가, 돌 깨주다가, 어느새 그 돌을 내가 들고 앞에 서게 되더라고요. 1989년 5월 18일, 투쟁 후에 뒤풀이를 하는데 그 때 정말 많이 울었어요. 어머니 생각이 나서. 어머니를 배신한다는 느낌도 있었어요. 그런데도 이 길을 안 갈수가 없겠더라고요."

단칸방에서 이 악물고 공부해 서울대에 입학하고, 총학생회장이 되고, 총학생회장으로는 처음으로 자진 입대해 군 복무를 하고, 대우에 입사해 상사맨이 되고, 벤처붐에 뛰어들어 창립멤버가 되고...수많은 일들이 그를 스쳐갔지만 이제와 되짚어 본 강 의원의 20대에는 오롯이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었다. 지난 달 30일, '20대를 대표할 수 있는 장면'을 묻자 강 의원은 3일 내내 울기만 했다는 어머니 장례식장 한 구석을 떠올렸다.

서울대 총학생회장 시절 강병원 더불어 민주당 의원 (왼쪽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군대시절 모습. (오른쪽)
 서울대 총학생회장 시절 강병원 더불어 민주당 의원 (왼쪽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 군대시절 모습. (오른쪽)
ⓒ 강병원 의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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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어머니가 돌아가셨어요. 천추의 한이죠. 총학생회장으로 만날 데모한다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던 때인데, 어머니가 약을 쌓아놓고 매끼마다 드셨는데도 왜 그러신가 들여다볼 생각을 못했어요. 나쁜 놈이었죠..."

암이셨다. 입원 보름 만에 세상을 뜨셨다. 강 의원만 몰랐을 뿐 어머니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고 계셨던 거 같다고 한다.

"어머니가 식당을 하셨는데 식당 냉장고에 장례에 쓸 음식을 다 해두셨더라고요. 3일 동안 찾아오신 손님을 다 대접하고도 남을 정도였어요. 본인 장례 음식을 하고 계셨을 생각을 하면...어머니께 무심했던 세월이 원망스럽고. 손녀도 보여드리고 국회의원 됐다고 보여드리고 싶은데 할 수가 없어요."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20대 중반 세상에 맨 몸으로 뛰어들어야 했지만 그는 씩씩하려 노력했다. 애써 허망함은 털어버렸다.

"밝게 살려고 하는 건 철학이에요. 남에게 힘든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요. 제가 행복하게 사는 게 돌아가신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일 거라는 생각도 들고요."

연애도 안 되고 돈도 없었던 20대...5년 동안 친구 집 전전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강병원 더불어민주당 의원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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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낼 곳이 없어 친구 집을 전전했다. 가진 게 없어 집세도 못줬다. 대신 설거지, 집안 청소로 때웠다. 그런 강 의원을 친구들은 5년 가까이 보듬어 줬다. 그의 삶에 큰 축을 차지하는 것, 인복이다.

두 학기 등록금을 기꺼이 내어주는 이가 있었고, 엄혹한 시절 군대에서도 그의 뜻을 뒷받침해주는 정훈과장이 있었으며, <미생>의 장그래처럼 대우의 '상사맨'이 됐을 때 회사를 나가려는 그를 붙잡으며 무한한 신뢰를 보내준 상사가 있었다. 그런 '어른'이자 '선배'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

"얼마나 운이 좋나요. 위기의 순간 순간에 도와주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못 왔을 거예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은혜 갚는 건 기본이고, 제 눈에 보이지 않는 도움들을 모두 갚는다는 심정입니다."

강 의원 인생에도 흑역사가 있었다. 주식투자가 '폭망'한 것이다. 20대 후반, 대우 다닐 시절 판매를 할당 받은 차를 지인에게 싸게 판 후 생긴 목돈을 주식투자에 쏟았다. 1000만 원이 넘는 돈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덕분에 3년 동안 월급의 1/3을 고스란히 차 값으로 부었다. 연애도 안 됐다. 관계가 발전해 결혼 얘기가 나오면 상대방 부모님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부모가 없다는 공백은 결혼의 장벽이 됐다.

악착 같이 돈을 모았다. 벤처 기업을 오가며 영업을 뛰었다. 그러다 정치인 노무현의 등장을 지켜봤다. 그 길로 2002년 노무현 후보 캠프로 찾아갔고 대통령 선거 날까지 노 후보의 수행비서로 전국을 함께 했다. 2007년까지 청와대 행정관으로 일하다 다시 사회인이 되었다. 미장·방수 사업을 하던 중 전북 고창에 출마 권유를 받았다. 도전했으나 패했다. 2016년 그는 은평구에 출사표를 던졌고 이번엔 당선됐다.

돌고 돌아 결국 어머니다. 30여년 전 어머니가 은평구 연신내에 행운식당을 열고 터를 잡았기에, 제2의 고향인 은평구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

"선거운동을 하면서 한 고물상에 들어갔는데, 저희 어머니를 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당시 1000원짜리 백반을 맛있게 드셨다고. 다른 데는 2000원, 3000원 하는데 행운식당은 맛있는 밥을 싸게 팔아서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가셨다고. 소박한 행복을 주는 곳이었던 거죠. 어머니의 삶에서 배운 악착스러움, 나는 그걸 무엇을 위해 쓸거냐 했을 때 지금 이 자리에서 국민에게 행복을 주는 정치를 악착같이 해야지 않나, 그런 다짐을 하게 돼요."


태그:#강병원, #찌질한 20대, #더불어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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