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1994년 봄, 밤이었습니다. 당시 고3 담임 두 분이 여성민우회를 찾아오셨어요. 한 선생님이 가방을 뒤적이더니 서류를 꺼냈습니다. 잘 나가는 사업장 70곳의 모집 공고였습니다. 모집 기준이 '160cm, 50kg, 안경 불가'였습니다.

(중략) 어떤 학교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인원 2배수를 뽑아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처럼 왼쪽 허리에 숫자를 달고 교장실에 모여 돌았다고."

정강자 전 한국여성민우회 대표의 증언입니다. 30일 저녁 7시 30분, 서울 중구 KT스퀘어에서 열린 '불나방 페미 연대기 : 여성운동 역사가 된 6개 순간' 행사 자리에서였습니다.

여성운동 30년 역사를 톺아보는 6개의 강연 중 첫 번째 연사로 나선 정 전 대표는 1994년 한국여성민우회가 진행한 '용모 제한 채용 기준을 둔 44개 업체 고발 운동'을 소개했습니다.

1994년 5월 25일, 정강자 한국여성민우회 공동대표를 비롯한 여성·교육단체 관계자 33명은 몸무게, 키, 외모 등 신체 조건을 채용 요강에 명시한 44개 기업체 대표를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발했습니다. 용모 제한 채용 기준을 이유로 기업체 대표를 고발한 건 처음있는 일이었습니다.

"160cm 이하의 여자는 보험업무를 보기 힘듭니까? 몸무게가 60kg을 넘으면 은행일을 하는 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키나 몸무게 등 용모와 몸매로 여성들의 취업을 제한하는 것은 여성을 하나의 직업인으로 보기보다 '직장의 꽃' 정도로 인식해온 구습을 확대재생산하는 것입니다." (<한겨레>, 1994년 5월 26일, 정강자 전 대표 인터뷰)

한국여성민우회 사무실을 찾은 두 선생님은 기업의 채용 관련 서류를 내밀었습니다. 당시 백화점, 은행, 보험사 등의 기업체는 여상 졸업생을 채용하기 위해 각 학교에 학생 추천을 요구하면서 '키 160cm 이상, 몸무게 50kg 이하, 용모 단정'과 같은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어요. '눈망울을 반짝이며 수업에 집중하는 제자들을 더 이상 마주치기 어렵다. 가슴이 미어진다.'"

두 선생님의 용감한 고발 이후, 한국여성민우회 등 여성·교육단체가 움직였고 여성의 외모를 제한하는 성차별적인 채용 기준에 대한 공론화가 이루어졌습니다. 학계가 움직였습니다. 서울지역 여성 교수 20여 명이 주축이 되어 '모집, 채용차별 고발사건 대책 교수모임'을 만들었고 '용모제한,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의견 발표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언론 보도도 이어졌습니다.

"여성을 채용할 때는 '꽃'을 뽑고 그'꽃'의 상품성이 떨어지면 승진·인사상의 불이익을 주거나, 여성은 업무능력이 남성만 못하다며 직장에서 정년차별로 내몰고 있는 행위는 남녀고용평등법의 명백한 위반이 아닐 수 없다. 이른바 '용모단정'을 빙자하여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가혹한 주문은 마땅히 사라져야 한다." (<한겨레>, 1994년 5월 27일, 사설)

하지만 그해 12월 말, 고발된 44개 기업 중 8개 기업은 벌금 100만 원에 약식기소 됐고, 이외의 36개 업체는 무혐의 처리됐습니다. 기소된 기업은 코오롱상사, 현대전자, 기아자동차, 현대자동차, 삼성물산 등이었습니다.

여성만 채용하는 분야에서 신체 조건을 제시한 기업은 무혐의 처분을 받았습니다. 남성 채용과 비교했을 때 불평등한지에 따라 약식기소와 무혐의가 갈렸습니다. 비록 여성·교육 단체가 지적한 것에 비하면 아쉬운 결과를 얻었지만, 이 운동은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제약하는 외모 차별 문제를 각인시키는 중요한 분기점이 됐습니다.

"화장을 좀 대충하고 간 적이 있다. 매니저가 직접 파우치를 주면서 이렇게 얘기했다. '화장 제대로 해. 그런 얼굴은 아무도 안 보고 싶을 거다'라고 얘기했다. 거기다가 항상 웃으라고 하기까지. 그런 상태로 7시간 서 있는데 웃을 수 있겠나. 나중에는 얼굴이 그대로 굳어서 마비될 지경이었다. 내가 웃는 건지, 우는 건지 구분이 안 되었다." (<오마이뉴스>, 2016년 3월 6일, 기사 링크)

최근 영화관에서 일했던 여성 알바노동자의 증언입니다. 실제 지난해 한 유명 영화관 업체에서 일명 '꼬질이 벌점'이라는 제도를 운영하며 직원 용모에 따라 인센티브를 차등 지급해 논란이 된 적이 있습니다. 채용 때부터 '대놓고 외모로 거르는' 문화는 많이 사라졌지만, 여성에게 불필요한 관리와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분위기는 여전합니다. 직장에서 여성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자'이기 이전에 '여성'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23년 전의 지적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입니다.

"실력이 있다 해도 막상 면접을 보면 키가 작다고 떨어뜨리고, 뚱뚱하다고 떨어뜨리고, 인상이 좋지 않다고 떨어뜨리고... 그럴 바에야 아예 똑똑하고 예쁘고 키 크고 날씬한 로봇을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한국여성민우회 <사무직 여성>, 1994, 최선미)

좋은기사 후원하고 응원글 남겨주세요!

좋은기사 원고료주기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낙관의 단서. 오마이뉴스 편집부 :-)더보기

시민기자 가입하기

© 2017 OhmyNews오탈자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