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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오산공군기지 인근 주택가 상공을 날고 있는 미군의 고고도정찰기(U-2)
 평택오산공군기지 인근 주택가 상공을 날고 있는 미군의 고고도정찰기(U-2)
ⓒ 문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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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이면 차라리 낫지 에어컨 틀기도 뭐해서 창문을 열어야 하는 늦봄과 초가을이 더 곤욕이지. 벌써 적응될 만도 한데 전투기 굉음 소리에 가슴 쓸어내린 세월만 수십 년이야..."

8월 28일 만난, 경기도 평택시 신장동에서 나고 자란 한 주민은 수십 년 동안 듣고 살아왔어도 여전히 전투기 굉음 소리가 괴롭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평택 오산공군기지 활주로와 가까운 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그는 유난히 큰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 "비행기가 지나가면 전화 소리도 들리지 않아 큰 소리로 얘기해야 한다"며 "이곳에서 오랫동안 산 사람들은 모두 귀가 어둡다보니 자연스레 목소리도 커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8월21일~31일)이 한창인 요즘처럼 훈련이라도 있을 때면 주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단다. 민간 공항의 경우 법이 정한 비행 가능 시간이라도 있지만 군 공항은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훈련이나 비상 상황에서는 밤낮없이 비행기가 뜨고 내려 밤잠을 설치기 일쑤다.

미국은 2003년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미군기지 재배치' 전략(Global Defense Posture Review)을 발표했다. 최근 이 계획을 본격화하면서 평택 오산공군기지에는 미 공군 소속의 항공기 외에도 연합훈련을 위한 영국공군 타이픈 전투기와 주일 미군기지 소속 전투기·오스프리(V-22) 등의 방문이 잦아 비행기 소음피해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민간 항공기 소음법을 적용받는 민간공항의 경우 환경영향 평가를 통해 24시간 비행이 가능한 공항을 제외하고는 아침 6시 15분에 비행기가 뜨고 저녁 9시 45분이면 비행이 마무리된다. 하지만 군 공항의 항공기 비행을 제한할 수 있는 법적기준은 없다.

청력 손상, 지각능력 둔화 부르는 항공기 소음

2016년 평택시에서 방음사업을 위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평택 오산공군기지의 경우 2.75km 활주로 2개를 보유하고 있다. 활주로와 가장 가까운 민가까지의 거리는 350여m에 불과해 민간항공기 소음기준 75웨클(WECPNL, weighted equivalent continuous perceived noise level) 이상의 3종 '다'구역에서 거주하는 세대수가 2만6413세대에 달한다.

웨클은 항공기가 내리고 뜰 때 발생하는 소음에 운항 횟수, 시간대, 소음의 최대치 등에 가산점을 주어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소음 단위로 75웨클 이상의 소음에 지속적으로 노출될 경우 신체적·경제적·사회적 피해가 크다.

항공기 소음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크고 지속적일 경우 주변지역의 토지와 건물의 가치가 하락해 발생하는 경제적 피해는 물론 노동생산성과 학습능력을 저하시키는 사회적 피해가 발생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은 주민들의 건강에 미치는 피해다. 지속적으로 항공기 소음에 노출되면 청력 감퇴와 손상, 지각능력이 둔화되고 수면방해로 생체리듬이 깨진다.

이로 인해 군 공항 주변 주민들은 다른 지역에 비해 스트레스로 인한 불안과 초조, 불쾌감 등의 심리적 증상 뿐 아니라 혈압 상승과 위산분비 과다로 고혈압과 심장병, 위궤양 등의 병증을 많이 앓고 있음이 평택과 군산·춘천기지 인근 주민에 대한 역학조사 과정에서 상당부분 확인됐다. 특히 세계보건기구(WHO) 보고서(군용 항공기 소음기준 설정에 관한 연구, 환경정책평가연구원, 2002)에 따르면 항공기 소음은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호르몬 수치를 높여 인간의 심성과 성격을 거칠게 하는 부작용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민간 공항에서 운항 중인 항공기에 의한 소음피해는 법률의 보호아래 보상을 받거나 소음 발생 시간을 원천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 하지만 군 항공기의 경우 법적 기준이 없어 사실상 주민들의 건강권과 행복추구권은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하루에 적게는 1000원, 많게는 1500원

미군의 고고도정찰기가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평택 오산공군기지 활주로에 내려서고 있다.
 미군의 고고도정찰기가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평택 오산공군기지 활주로에 내려서고 있다.
ⓒ 문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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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365일 전투기 굉음에 몸서리치며 살았는데 고작 하루 1000원에서 1500원이라니 국가 안보를 위해 희생한 대가가 이런 건가 했지..."

전투기 소음에 참다못한 주민들은 국가를 상대로 직접 소송을 제기해 2009년 1월 서울고등법원에서 승소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소음 피해에 대해 보상하라는 주민들의 소송은  2003년부터 산발적으로 진행돼 왔다). 하지만 법원이 내린 피해 배상액은 실제 거주기간과 항공기 소음 정도에 따라 월 3만원에서 4만5000원이 전부였다.

이 소송은 2010년 연말 대법원에서 국가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확정됐다. 이후 주민들은 다음해부터 배상금을 지급 받았다. 배상액은 677명의 주민에게 거리에 따라 13만원에서 321만원까지 차등 지급됐다. 산정된 금액은 하루에 적게는 1000원에서 많게는 1500원, 이마저도 주민들이 나서서 얻어낸 결과라는 게 서글픈 지경이다.

소음 피해 고통을 호소했던 주민은 "하루에도 수십 차례 오가는 비행기 소음이 거리에 따라 긋는 선에 의해 피해 정도를 달리 본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된다"면서 "근본적으로는 비상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미군 측이 평시 훈련만이라도 주민들의 일상생활을 고려해 비행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말을 끝내고 쏟아내는 그의 시름 섞인 긴 한숨과 깊게 패인 주름 속에서 국가안보를 위해 수십 년 동안 희생해온 주민들을 위한 국가적 배려나 동맹국 국민을 위한 미군의 배려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수년째 제자리걸음 중인 군 소음법

평택을 비롯해 군 비행장과 사격장이 위치해 있는 12개 시·군·구 지자체들은 2015년 9월 21일 협의체를 출범시켜 군 소음법 제정을 촉구하고 나섰지만 소음피해 재원을 항공이용료에서 조달하는 민간 항공기 소음법과 달리 모든 비용을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군 소음법은 수년째 제자리걸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8, 19대 국회부터 군사시설 소음피해 관련 법률안 및 청원이 발의·제안됐지만 임기만료나 계류 등의 이유로 통과된 법령은 하나도 없다.

올 6월 경기도의회에서 '경기도 군사시설로 인한 소음피해 등 지원 조례' 제정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정부 차원의 입법에 제동이 걸리자 광역단체가 조례 제정을 통해 지원을 위한 법적 근거 마련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조례안이 경기도의회를 통과하면 경기도지사는 소음피해로 인한 도민피해 현황파악 및 분석, 소음피해에 따른 소송지원 사업, 소음피해 예방에 필요한 지원, 군·정부·기초자치단체와의 협조체계 구축 등의 조치를 책임져야 한다. 조례가 통과된다고 해서 주민들의 모든 고통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가운 소식이기는 하다.

이 자리에 참석한 국방부 관계자도 "8월 중에 군사시설로 인해 주민들이 겪는 재산권과 환경피해 규모를 진단하는 용역이 마무되면 미군 측과 협의해 구체적인 지원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국가안보를 이유로 희생을 강요 받아온 주민들의 입장에서 이런 움직임들이 너무 늦은 게 사실이지만 '늦을수록 천천히 돌아가라'는 옛말처럼 졸속으로 대책이 세워져서는 안된다.

그동안 손을 놓고 있던 정부는 이제라도 일본과 독일의 미군기지 사례 등을 비교해 미군의 성의 있는 조치를 이끌어내야 한다. 일본·독일과 미국이 맺은 주둔군지위협정은 우리나라와 달리 미군기지를 만들 때 해당 지자체나 주민들의 의견을 들어야 하는 것으로 돼 있다. 주한미군은 동맹국 국민을 '좋은 이웃'으로 표현한 그들의 말에 대한 최소한의 진정성이라도 보여줘야 할 때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작은책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주한미군, #군소음, #오산공군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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