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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가 유괴를 당했다. 잠시 후 돈을 요구하는 납치범의 전화가 걸려왔다. 부모는 증거확보 차원에서 재빨리 스마트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지금 전화를 거신 상대방이 녹음 버튼을 눌렀습니다"라는 설명이 흘러나온다. 화가 난 유괴범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미궁에 빠졌다.

물론 가상의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휴대전화 통화 중에 통화내용을 녹음하는 경우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수 있는 시스템, 즉 통화 중 '녹음' 버튼을 누르면 미리 녹음 사실을 알린다는 '통화녹음 (사전) 알림법'이 국회에서 발의됐다.

지난달 20일 김광림 자유한국당 의원이 대표 발의하고 같은 당 의원 등 10인이 공동발의한 '전기통신사업법 일부 법률개정안(의안 번호 2008124, 제안 회기 제20대 제352회)'이 바로 그것이다(☞ 발의 법안 바로가기).

전기통신사업법 일부 법률개정안 발의 의원명단.
 전기통신사업법 일부 법률개정안 발의 의원명단.
ⓒ 국회의안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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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의의원은 자유한국당 소속인 김광림, 강석호, 김석기, 박명재, 원유철, 이완영, 조경태, 최교일, 추경호 의원이며 순천을 지역구로 둔 유일한 무소속인 이정현 의원도 얼마 전까지 같은 당 소속이었다. 이들은 통화 녹음 사전 알림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개인의 사생활 보호를 가장 큰 이유로 들었다.

국회의안정보시스템에 등록된 이들의 법률개정안 발의의견에 따르면 '현행법상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동의 없이 녹음하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되고 있지만, 세계 각국에서는 대화 내용 녹음에 대해 다양한 규제를 통해 개인의 사생활을 엄격히 보호하는 추세'라는 것. 특히 미국 프랑스 등 선진국에서는 어떠한 형태의 대화 녹음도 불법이며 독일, 아일랜드 등 일부 국가에서도 동의하에 녹음은 가능하나 녹음 전에 의도를 명확히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 법안은 또, 앞으로 사생활을 더 엄격히 보호하기 위해 (카메라 작동 시 '찰칵' 하는 소리가 나는 것처럼) 통화 중 상대방이 녹음 버튼을 누르면 자동으로 안내멘트("상대방이 녹음 버튼을 클릭하였습니다")를 송출하자는 것이 골자다.

이들이 제출한 개정법률안은 전기통신사업법 일부(제32조의 9)를 신설, 미래창조과학부령으로 전기통신사업자가 시스템 안내멘트 등의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모든 휴대전화 통화의 참여자가 매번 통화할 때마다 자율적으로 녹음 여부를 선택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광림 자유한국당 의원 등 10인이 공동발의한 ‘전기통신사업법 일부 법률개정안 요지.
 김광림 자유한국당 의원 등 10인이 공동발의한 ‘전기통신사업법 일부 법률개정안 요지.
ⓒ 국회의안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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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법안의 요지처럼 사생활과 관련된 내용이 몰래 녹음된 후 유포되어 피해를 보는 사례도 더러 있다. 하지만 꼭 이것을 법으로 규제하기보다는 통화 녹음 결과물의 활용이나 법적 증거채택의 방법 등을 정비하여 사생활 침해를 보완하는 것이 더 현명한 해결책은 아닐까. 현행 법령에서도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가 타인들의 대화를 녹음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의안정보시스템에 오른 이 발의법안에 일반인들이 올린 반대 의견에는 '이 법안이 불순한 의도를 가진 시도는 아닌가?' 하는 의혹의 목소리가 높다. '사생활 보호' 측면에서 환영한다는 의견도 일부 있지만, 사회적 약자들이 그들의 횡포를 고발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를 빼앗는 것이라는 의견이 더 우세하다. 법안이 개정된다면 앞으로 협박이나 갑질의 횡포 등은 증거를 내세우기가 더욱 어려워지며, 그 피해자는 고스란히 서민이라는 것이다.

전기통신사업법 일부 법률개정안 아래에 등록된 시민들의 의견에는 발의에 대한 의혹과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전기통신사업법 일부 법률개정안 아래에 등록된 시민들의 의견에는 발의에 대한 의혹과 반대의 목소리가 높다.
ⓒ 국회의안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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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 법안을 발의한 정당이 자유한국당이라는 사실은, 이 법안이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자유한국당은 구 새누리당 시절 통화녹음 증거가 알려져 몇 번이나 위기상황을 맞이한 바 있다. 그래서 더 불순한 의도가 엿보인다.

국정농단 사태의 실체를 밝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최순실-박근혜-정호성의 통화 녹음이었고, 특히 정호성(전 청와대 부속비서관)과 노승일(전 K스포츠재단 부장)의 통화 녹음내용은 결정타였다. 또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알려진 자유한국당 윤상현(인천 남을) 의원의 '막말 발언'도, 국민을 레밍에 빗댄 발언을 한 충북도의회의 김학철 의원도 모두 통화녹음이 유출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부당한 협박이나 언어폭력과 같은 피해를 알리는 데 있어 통화 녹음은 이제 약자에게 있어 마지막 보루가 된 것이다.

현행 통신비밀 보호법상 통화 당사자라면 상대방 동의 없이 대화 내용을 녹음할 수 있다. 그리고 휴대전화에서 간단한 설정만으로도 모든 통화를 자동으로 녹음이 가능한 세상이다. 해당 기능이 있는 앱도 자유롭게 제작되고 또 배포되고 있다. 이처럼 통화녹음은 이미 일상화된 것이다. 그런데도, 혹시라도 이 법안이 통과된다면 우리는 통화때마다 이런 메시지를 들어야 할 것이다.

"상대방이 지금 당신의 통화 녹음을 시작했습니다!"


태그:#통화녹음, #발의,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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