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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검정교과서 『한국사』 교과서에는 석정 윤세주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없다. 본문으로 주요하게 다루기보다 스치듯이 지나가는 인물이다. 그러나 석정 윤세주의 삶과 죽음을 제대로 알고 나면 온몸에 전율이 일어남을 피할 수 없다. 역사 속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적지 않은 인물들이 굴절된 삶을 산다. 아니면 신념을 끝까지 지켜나가지 못한 채 희미해져 간 인물들이 많다. 80년대 중반 님 웨일스의 『아리랑』을 통해 '김산'이라는 무명의 조선혁명가가 처음 널리 소개되었다. 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사회 변혁을 꿈꾼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김산의 삶에 전율했고 감동했다. 삶의 치열함과 자기성찰의 진지함, 그리고 고결한 영혼 앞에 절로 머리가 숙여졌기 때문이다.

그런 김산 못지않은 역사적 인물이 석정 윤세주이다. 초등학교 시절 천장절(일본왕 생일)을 기념하여 일본인 교장이 나눠준 일장기를 학교 변소 똥 구더기에다 내다꽂은 인물이다. 그 일로 퇴학을 당하지만 이후의 삶은 거침이 없다. 3・1운동 당시 고향인 경남 밀양 장날을 기해 수천 명이 운집한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을 때 나이가 18살이었다. 윤세주는 단상에 올라 선언문을 낭독한 뒤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장날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물론 이 거사를 위해 윤세주는 밀양청년들과 야밤에 면사무소에 침입해 등사기를 몰래 훔쳐온다. 그리고 곧바로 산에 올라가 불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병풍을 친 뒤 밤새 수백 장의 선언서와 태극기를 인쇄하였다.

1919년 3・12 밀양 장날 시위는 경상도 만세운동의 물꼬를 튼 경상지역 최초의 만세시위였다. 너무 어린 나이라 일경의 감시와 체포를 피해 북만주 길림성으로 피신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하여 궐석재판에서 1년 6개월이라는 가장 높은 징역형을 언도받지만 약산 김원봉이 만든 의열단 창단에 18살의 가장 어린  나이로 가담한다. 윤세주는 의열단 제1차 암살 파괴 계획(1920) 당시 국내 침투 공작을 맡았다. 다른 의열단원들과 함께 식민통치의 심장부인 조선총독부와 수탈기구인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질 생각이었다. 다른 의열단원들이 나이가 가장 어리다고 걱정 반 만류하자 윤세주는 단호하게 자신의 결의를 밝힌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묘한 방법으로 적탐(敵探)의 주의를 능히 피면(避免)할 수 있고 만일 불행히 피포(被捕)된다 하더라도 나는 의지가 견결하므로 우리의 비밀을 누설하지 아니하겠다."

불행히도 거사를 앞두고 경기도 경찰부 경부 김태석에게 피검돼 윤세주는 잔혹한 고문을 받는다. 그렇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고문 내내 입을 굳게 다문 채 단 한 마디도 발설하지 않았다. 따라서 같이 체포된 의열단원들과 달리 윤세주가 받은 악형은 상상을 초월했다.

『아리랑』의 김산이 26살의 나이에 할아버지처럼 되어버린 그 잔혹한 고문을 이겨낸 것이다. 물고문, 전기고문으로 폐가 망가지고 정강이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로 당시 조선인 특고 경찰들이 자행한 고문은 잔인했다. 1심 재판에서 일본인 판사가 무거운 징역형을 언도하자 석정은 법정이 떠나갈듯한 웅변조로 일인 판사를 향해 준열하게 경고하였다.

"우리의 제1차 계획은 불행히도 파괴되고 무수한 동지들이 피포, 판죄判罪 되었지만 피포되지 않은 우리의 동지들은 도처에 있으니 반드시 강도 왜적을 섬멸하고 우리의 최후 목적을 달도達到 할 날이 있을 것이다"

석정 윤세주는 아침마다 일본인 간수에게 했던 경례를 완강히 거부할 정도로 수형생활 내내 당당했다. 그러나 절도, 강도, 살인 등 조선인 죄수들에겐 한없이 너그러웠고 그들을 교화시켰다. 7년의 형기를 다 채우고 1927년 2월 만기 출소했을 때 조선인 죄수들 가운데 항일독립운동가로 거듭나겠다고 찾아올 정도였으니 윤세주의 인품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출소 후 친지들에게 밝힌 형무소 소회는 석정이 감옥생활을 어떻게 하였는지 조선인 죄수들을 대하는 시선이 어떠했는지 다음은 그 일면을 보여준다.

"옥중 실상을 보고 민족의 비애를 느꼈다. 옆에는 변기를 두고 곰팡내 나는 묵은 조밥에 냄새 나는 콩을 섞어주는 밥이 역겨워 못 먹으면 뒤에 들어온 죄수는 그것도 모자라서 서로 더 먹겠다고 아우성이어서 순식간에 없어지더라."

윤세주는 감옥생활 동안 철저한 자기수련과 독서를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하고 식견을 넓혀나갔다. 출옥 후 26살이 되었을 때 곧바로 밀양청년회 활동과 신간회 밀양지회 건설에 열정적으로 참여했다. 거기에는 의열단장 김약산의 고모부인 백민 황상규의 정신적 영향력이 컸다. 황상규는 밀양 동화중학교 시절 자신의 스승이기도 했고 안동 못지않은 경상도 독립운동의 메카인 밀양 항일지사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멘토였다.

윤세주가 가슴에 평생 새기고 간직했던 말씀은 일제에 의해 강제 폐쇄될 때 밀양 중학 전홍표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들은 훈화였다.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전까지 우리는 언제나 부끄럽고 슬프고 또 언제나 참담하다."

석정 윤세주가 밀양에서 청년활동, 신간회 활동, 중외일보 기자 등 언론활동을 할 때 대구에선 절친 이육사가 똑같은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육사의 수필집 『연인기』에 '목숨만큼 소중한 친구'로 묘사된 인물이 석정 윤세주이다. 국내 침투 공작을 앞두고 최후의 만찬, 작별의 순간에 육사가 가장 아끼던 비취인장을 건네준 친구가 바로 석정이기 때문이다.

1932년 김약산이 남경 교외에 세운 의열단 군관학교 '조선혁명 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생으로 석정과 육사는 나란히 입교한다. 물론 석정의 강력한 권유에 따른 것이었다. 간부학교 생도시절 육사와 석정은 정치학, 유물론 철학, 사회발전사, 세계정세 등 이론을 공부했다. 그리고 통신법, 선전법, 연락법, 탄약, 뇌관, 도화선 등 폭발물 취급 및 투척법, 요인 암살, 사격술, 위장 및 변장술, 무기운반법, 철로폭파법, 서류은닉법 등 군사실기를 함께 공부했다. 졸업 후 육사는 국내 침투 임무를 부여받았고 석정은 '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교관이 되어 조선혁명운동사를 가르쳤다.

항일혁명시인 육사의 시 작품 가운데에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중 하나가 「청포도」이다. 「청포도」에서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는데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오는 손님'은 과연 누구일까? 최근 도진순 교수(창원대 사학과)는 '청포를 입고 고달픈 몸으로 찾아오는 손님'을 윤세주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적으로 규명하였다.

육사의 시 「광야」에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1930년대 항일무장투쟁의 백미인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참모장 허형식 장군을 가리킨다. 육사가 만주 전투지구에서 만난 허형식(본명 허극, 일명 이희산)은 어머니 허길 여사의 종형제로 육사와는 외당숙이다. 마찬가지로 '청포를 입고 고달픈 몸으로 찾아오는 손님'은 육사 자신이 목숨만큼 소중히 생각했던 윤세주였다. 육사의 시 작품과 평론들은 대부분 30세-39세 그 10년 사이에 완성된 작품들이다. 하나같이 항일지하 공작활동과 혁명 활동 속에서 빚어낸 보석 같은 문학작품이자 항일혁명운동으로 점철된 삶의 결정체들이다.

1937년도 작품 「노정기 路程記」」 역시 항일 비밀결사 지하활동으로 점철된 육사의 신산한 삶을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한 대표작이다.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자 절체절명의 시대인식 속에서 '서해를 밀항하는 정크와 같다'고 고백한 대목이 그러하다. 또한 '목숨이란 마-치 깨어진 뱃조각',  '남들은 기뻤다는 젊은 날이었건만', '쫓기는 마음! 지친 몸'으로 쫓기는 삶을 형상화한 대목이 그러하다. 그런 육사에게 석정 윤세주는 정신적 나침반이자 혁명의지를 함께 나눈 강력한 동지였다. 일제가 한글로 작품을 발표하지 못하게 하자 1942년 여름날 밤 육사는 별을 바라보고 석정을 생각하며 한시 한 수를 읊조린다. 28자의 짧은 7언 절구 「주난흥여 酒暖興餘」가 바로 그 작품이다. 

"酒氣詩情兩樣闌,  斗牛初轉月盛欄,  天涯萬里知音在,  老石晴霞使我寒" (초여름 밤하늘 빛나는 별을 보니 이역만리 멀리 떨어진 중국 화북지방에서 목숨 걸고 일본군과 치열하게 무장 투쟁을 벌이는 오랜 친구(石正) 윤세주가 생각나고 그의 평소 '맑고 곧은 기상(晴霞)'을 생각하니 '술이 확 깨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使我寒)')

여기서  마지막 절구 '老石'의 '石'은 석정(石正) 윤세주를 가리킨다. 오래된 벗 석정 윤세주의 평소 '맑고 곧은 기상(晴霞)'을 생각하니 '술이 확 깨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使我寒)'는 내용이다. 이 역시 육사의 모친 허길 여사의 별고와 1942년~1943년 별자리 분석을 통해 밝혀낸 도진순 교수의 최근 연구 결과이다.

육사의 작품 가운데 석정 윤세주를 생각하게 하는 시가 또 있다. 식민지 가혹한 현실 속에서 항일지사의 꺾일 줄 모르는 정신을 노래한 시! 육사의 「교목(喬木)」이 바로 그렇다. 이 시 역시 석정 윤세주에게 바친 작품이다.

"마른 하늘에 닿을 듯이/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서서/차라리 봄도 꽃피진 말아라/낡은 거미집 휘두르고/끝없는 꿈길에 혼자 설레이는/마음은 아예 뉘우침 아니리/검은 그림자 쓸쓸하면/마침내 호수 속 깊이 거꾸러져/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해라" - SS에게

'마른 하늘에 닿을 듯이/세월에 불타고 우뚝 남아 선' 혁명지사의 정신은 '차마 바람도 흔들진 못할'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SS에게'에서 'SS'는 석정 윤세주를 가리키는 데 이론이 없다.

윤세주는 밀양 출신으로 의열단을 창단한 약산 김원봉과 두세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길 건너편에서 살았던 오랜 죽마고우였다. 약산과 석정은 친형제처럼 입과 입술의 관계가 되어 석정은 약산의 오른팔이자 의열단 2인자로서 역할을 수행했다. 약산이 실천적이고 투쟁적인 혁명가였다면 석정은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항일 전사였다. 의열단과 1930년대 중반 통일전선체인 조선민족혁명당, 그리고 1938년 10월 10일 조선 최초의 자주적인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의 창설 주역이자 살아 있는 정신이 석정 윤세주였다. 조선의용대는 중경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보다 무려 2년이나 앞서 창설된 군사조직이었기에 한국근현대사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석정은 훈련을 받을 때나 학습을 할 때나 항상 솔선하여 수범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론에 밝았고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온화한 성품과 대화술이 탁월했다. 조선의용대 대원 누구나 석정 윤세주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했고 그를 따랐다. 석정의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이론, 예리한 정세분석, 그리고 동료들에 대한 따뜻한 인간애는 당원과 대원들의 귀감이 돼 정신적 지주로 자리매김하기에 충분했다. 1941년 산시성 타이항산 북상 길에 올랐을 때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 정치위원으로 조선청년들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1942년 일제 관동군 40만 대군의 소탕전에 맞서 윤세주는 반(反)소탕전에서 장렬히 전사한다. 허벅지 다리에 총상을 입고 6일간 사투 끝에 쓸쓸히 운명한다. 그가 총상을 입자 분대장 하진동, 최 채 등 부하대원들이 적정을 살피며 매일 밤 석정의 주위에 와서 시중을 들었다. 그러자 윤세주는 엄격한 눈빛으로 명령한다.

"셋이 함께 있다가는 다 죽을 수 있소. 혁명에 바친 몸 죽음 따윈 두렵지 않소. 승리의 그날을 위해 자신을 돌보는 일이 중요하니 셋이 갈라지도록 하오"

윤세주가 1942년 반(反)소탕전에서 전사하고 한 달 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으로 조직이 개편된다. 약산의 황포군관학교 동기생이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장으로 군사지휘관이었던 박효삼은 부사령관으로 밀려난다. 조선의용군 사령관은 중국공산당원이자 팔로군 포병연대장인 무정이 차지한다. 석정 윤세주의 죽음이 조선의용대를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예속시키는 분기점이 돼버린 것이다. 조선의용군은 1945년 일제 패망 후 중국 국공내전에 참전하고 이후 6・25 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의 주력부대를 형성한다.

조선인민군 보병 부대의 47%를 구성할 정도였으니 연안파 공산주의 계열 조선의용군이 없었다면 김일성은 베트남의 호치민이나 중국의 마오처럼 무력통일을 꿈꾸었을까? 석정 윤세주가 반(反)소탕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조선의용군이 그렇게 호락호락 중국공산당 팔로군에 예속되었을까? 중국공산당원이 아니었고 약산처럼 민족주의 좌파였던 석정 윤세주와 민족주의 좌파로서 약산의 최측근 군사지휘관이었던 박효삼이 일제 패망 후 조선의용군을 실질적으로 계속 지휘했더라면 한반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긴 6・25 전쟁이 정말 가능했을까?

조선의용대 총대본부는 1942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돼 해방 후 국군의 상징이 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인민군 주력부대가 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6・25전쟁의 참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조선의용대의 영혼! 석정 윤세주가 죽지 않고 조선의용대를 실질적으로 지도하는 정신적 영도자로서 해방을 맞았다면 민족의 참화인 6・25전쟁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지만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의 영혼! 석정 윤세주의 삶과 죽음! 그분의 망각된 존재를 복기할 때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역사적 의미는 너무나 크다.    



태그:#이육사, #의열단, #조선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6,25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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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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