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성탈출: 종의 전쟁 포스터

▲ 혹성탈출: 종의 전쟁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유인원은 어떻게 지구를 지배하게 되었나. 1968년 프랭클린 J. 샤프너가 <혹성탈출>을 통해 던진 질문은 반세기를 돌아 나름의 답을 얻었다. 제작사인 20세기 폭스가 2011년부터 3년 터울로 내놓은 3부작을 통해서다. 첫 편에서 인간 못지않은 지능을 얻은 유인원은 두 번째 편에서 그들만의 사회를 이루더니 세 번째 편에선 인간의 위협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발전시킬 터전을 찾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유인원을 탄압하고 공격한 인간은 끝내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걷는다.

문제는 모두 인간으로부터 비롯된다. 유인원에게 인간 못지않은 지능을 허락한 건 동물을 대상으로 무리한 약품 실험을 진행한 인간의 이기심이었다. 인간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유행한 것 역시 그와 관련이 없다고 단정 짓기 어렵다. 인류가 마지막 남은 전력을 허망하게 소비한 것이나 고등한 지성을 가진 종을 적으로 돌려 스스로를 어려움에 처하게 한 것도 모두 인간의 탓이다. 이제 막 끝을 본 3부작은 지난 수천 년 간 인류가 쌓아 올린 문명이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묵시록과 같은 작품이다.

이 시리즈가 인간에게 묵시록이 되었다면 유인원에겐 창세기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전편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유인원의 대립을 집중해 다루며 그로부터 유인원 문명의 시작과 인류문명의 마지막을 교차시킨다. 특히 지난 15일 개봉한 3편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노골적으로 기독교 성경에서 창세기 다음에 등장하는 출애굽기의 서사를 차용하고 있는데 이 같은 선택이 영화의 의도와 지향을 명확히 드러낸다.

인간에겐 묵시록, 유인원에겐 창세기

혹성탈출: 종의 전쟁 말을 타고 달리는 유인원들 모습은 유인원들이 인간과 같이 다른 동물을 지배하는 고등한 지성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같은 설정은 1968년 프랭클린 샤프너의 원작은 물론 맷 리브스가 감독한 지난 2편에서 이미 활용된 바 있다.

▲ 혹성탈출: 종의 전쟁 말을 타고 달리는 유인원들 모습은 유인원들이 인간과 같이 다른 동물을 지배하는 고등한 지성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같은 설정은 1968년 프랭클린 샤프너의 원작은 물론 맷 리브스가 감독한 지난 2편에서 이미 활용된 바 있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시리즈 첫 편에서 지성을 획득한 침팬지 시저(앤디 서키스 분)는 주인이자 아버지이며 스승이었던 과학자 윌 로드만(제임스 프랭코 분)의 품을 떠나 숲으로 향한다. 윌로부터 사랑받으며 가치 있는 덕목들을 몸소 체득했던 시저가 한순간에 찬바람이 부는 진짜 세상으로 내던져진 것이다. 마치 에덴동산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진 아담과 같이 시저는 동료들과 함께 자신들이 살아갈 터전을 마련한다.

이 과정에서 시저의 동료가 된 코바(토비 켑벨 분)는 시저를 암살하고 새로운 무리의 리더로 군림한다. 유인원의 이익보다 인간을 챙기는 듯했던 시저에 대한 반감이 반란으로 이어진 것.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류 최초의 살인,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변주된 것으로 지성을 가진 유인원이 처음으로 동료 유인원을 살해하려 한 일대 사건이다. 2편의 말미에서 시저는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스스로 깨뜨리게 되는데 시저와 코바의 갈등은 카인의 살인 이후 이어진 성경 속 인류의 죄악이 유인원에게 그대로 반복될 것임을 알리는 듯하다.

3편에선 성경에 대한 변주가 보다 노골적으로 이뤄진다. 주된 이야기가 인간에게 잡힌 유인원 무리의 탈출기로 이집트에서 탈출하는 유대민족의 대탈출(Exodus)을 떠올리게 한다. <덩케르크> <군함도> 등 유달리 많은 탈출서사가 개봉한 올여름 극장가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탈출극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탈출서사인 출애굽기를 그대로 본떴다고 봐도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이를 단적으로 상징하는 장면은 영화의 마지막 사막 건너 약속의 땅에 들어선 시저가 언덕 위에서 최후를 맞는 신으로 이는 기독교 삽화를 좀 봤다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나안 땅에 도착한 모세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으로 표현된다. 이에 앞서 유인원들은 대령(우디 해럴슨 분)이 이끄는 부대에 사로잡혀 수용소에 갇히게 되는데 이 역시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간 유대민족의 모습과 흡사하다. 시저는 성경 속 모세가 그랬듯 고통받는 동족의 리더로써 부족의 탈출을 이끌어 끝내 부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다. 이 과정에서 나무에 몸이 묶여 고통받는 장면이나 인간적 복수와 리더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고뇌하는 모습 등에선 일면 예수의 모습까지도 읽힌다.

심지어 유인원들이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산사태는 엑소더스를 주제로 한 많은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삼고 있는 바로 그 장면을 연상시킨다. 갈라진 홍해로 유대인들이 탈출하고 뒤쫓아온 이집트 병사들을 바다가 집어삼키는 그 무지막지한 장면 말이다. 지난 시리즈 내내 인간을 상태로 분투해온 유인원들을 결정적으로 구해내는 것이 결국은 당해낼 수 없는 자연의 힘이라는 건 그래서 상징적이다.

영화 초반부 시저의 아들 푸른눈과 시저의 오랜 친구 로켓이 부족이 정착할 땅을 찾았다며 돌아와 보고하는 장면도 성경과 관계가 있다. 모세가 가나안에 파견한 열두 명의 정탐꾼 가운데 가나안을 약속의 땅이라 주장한 이가 단 두 명(갈렙과 여호수아)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노골적으로 인간의 끝(묵시록)을 유인원의 시작(창세기·출애굽기)에 빗대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나치즘과 우생학의 노골적 반영

혹성탈출: 종의 전쟁 시저가 이끄는 유인원 무리가 군부대 수용소에 갇혀 노역에 시달리는 모습은 흡사 아우슈비츠를 위시한 나치의 수용소를 떠올리게 한다. 2차대전 당시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영화치고 이런 장면 하나 안 나오는 영화가 과연 얼마나 있는가.

▲ 혹성탈출: 종의 전쟁 시저가 이끄는 유인원 무리가 군부대 수용소에 갇혀 노역에 시달리는 모습은 흡사 아우슈비츠를 위시한 나치의 수용소를 떠올리게 한다. 2차대전 당시 수용소를 배경으로 한 영화치고 이런 장면 하나 안 나오는 영화가 과연 얼마나 있는가.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나치즘이나 우생학에 대한 반영도 찾아볼 수 있다. 시저가 이끄는 유인원들과 대립하는 대령의 군대는 스킨헤드 스타일을 하고 독재자를 향해 손 인사를 하며 한목소리로 고함을 내지른다. 전체주의적 분위기를 팍팍 풍겨내는 이들은 누가 보아도 나치의 재림과 다름없다. 유인원을 멸종시키지 않으면 유인원이 인간을 밀어내고 지구를 지배할 것이란 대령의 주장이나 그에 대한 확신 어린 눈빛은 아돌프 히틀러에게 깃들었던 광기를 연상시킨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우생학은 대령과 그 부하들의 정신을 갉아먹은 지 오래다. 우생학은 범죄와 장애 등 온갖 부정적이고 열등한 것들이 유전되는 생물학적 특성에 의해 나타난다고 믿은 이들에 의해 주창된 유사학문이다. 유사학문이라 함은 이들이 우생학을 뒷받침하기 위해 수행한 실험 대다수가 그릇된 조건에서 시행돼 과학의 가치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생학은 불과 50년 전까지도 세계 곳곳에서 과학으로 여겼으며 이에 근거해 수없이 많은 불임수술이 자행됐다. 특히 아돌프 히틀러는 우생학의 열성 신봉자였다. 나치가 불임수술을 한 사람의 수만 30만 명에 달한다고 평가되며 나치가 유대인과 장애인, 동성애자 등 수백만의 사람을 살해한 데도 우생학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우생학의 무서움은 한 인종이 다른 인종에 대해 열등하고 부적합하다는 딱지를 붙이고 그에 따라 상대를 제거하는 것이 세상을 옳게 만든다는 도덕적 확신의 근거가 된다는 데 있다. 심지어는 우생학에 따라 열등한 동족까지도 제거되는 사례가 있는데 역사적으로 장애인과 동성애자가 큰 피해를 당했다. 19세기 말엽 우생학이 득세한 배경에는 인간의 지능이 떨어지면서 사회가 약화하고 있다는 잘못된 우려, 기존에 주류사회를 형성한 이들과 다른 특성의 인종집단이 많아지며 상대적으로 제가 속한 인종이 축소되고 있다는 불안감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영화에선 대령이 미지의 바이러스에 걸려 말하지 못하게 된 이들을 거리낌 없이 살해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 같은 설정 역시 우생학에 대한 반영이라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영화는 이처럼 성경에 대한 변주, 나치즘과 우생학에 대한 상징 등을 적극 활용해 인류의 멸망과 유인원 문명의 시작을 그려낸다. 인간은 스스로가 낳은 오류를 치유하지 못하고 유인원은 과거 인간이 이룩한 미덕을 이어받았으므로 인간이 물러나고 유인원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혹성탈출>만의 것은 어디에도 없다

혹성탈출: 종의 전쟁 우디 해럴슨이 연기한 대령은 노골적으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1979년작 <지옥의 묵시록> 속 월터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 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 혹성탈출: 종의 전쟁 우디 해럴슨이 연기한 대령은 노골적으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1979년작 <지옥의 묵시록> 속 월터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 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하지만 이 같은 구도는 도리어 <혹성탈출> 시리즈가 가질 수 있었고 가져야만 했을 많은 가능성을 훼손하는 선택과 다르지 않다. 지능을 가진 유인원이 어떻게 사고하고 행동하며 무리를 지을지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인간이 만들어낸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유인원 사회를 구현하는 데 그쳐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데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다른 고등한 지능을 가진 종이 만들어낼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그저 '뭉치면 강하다'는 흔한 격언만을 되풀이하는 이번 시리즈에 실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출애굽의 서사를 그대로 변주하는 대신, 나치즘과 우생학의 상징을 꾸역꾸역 욱여넣는 대신 유인원 사회가 문화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이룬 발전상을 보다 세밀하게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인간의 도구를 탈취해 쓰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만의 기술을 발전시키는 모습이라거나 인간과 다른 유인원 사회만의 특징들을 보여줬다면 어땠을까? 유인원이 껍질만 다른 인간처럼 보였다는 건 그만큼 이 영화의 상상력이 빈곤하다는 뜻이 아닌가 말이다.

기승전바이러스, 기승전산사태의 무책임한 전개 가운데서도 <혹성탈출: 종의 전쟁>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승부의 지점을 영화는 완전히 외면하고 말았다. 3000년도 더 전에 일어난 출애굽의 서사와 100년 전 흥했던 우생학의 상징을 그대로 되풀이하는 것으로 2017년의 관객이 만족하리라 믿었다면 그건 오늘의 대중을 너무도 우습게 본 결과라고 나는 확신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혹성탈출: 종의 전쟁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맷 리브스 앤디 서키스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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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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