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우리나라의 박상영선수가 극적으로 금메달을 따면서 '펜싱'이라는 스포츠 종목이 주목을 받았다. 우리에겐 생소한 이 펜싱을 다룬 영화를 한 편 보았다. 그 영화는 '에스토니아'라는 나라의 전설적인 펜싱 영웅인 엔델 넬리스'(1925-1993)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펜싱도 낯설었지만 그보다 '에스토니아'라는 나라가 더 생소했다. 지도에서 찾아보니 북유럽의 발틱해에 위치해 있으며 핀란드와 러시아를 이웃하고 있는 나라였다.
 
에스토니아는 오랜 세월 동안 외세의 압제 아래 놓여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잠시 독일에 점령되기도 했다. 그후 다시 소련의 지배 아래에 놓였지만 1991년 8월에 독립을 하였다. 면적은 45,228㎢로 한반도의 약 1/5이며 인구는 약 150만 명인 작은 나라이다.

동병상련
 
주변 강국들에 둘러 싸여 오랜 세월동안 외세의 침략을 겪었던 아픈 역사가 있으면서도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봤을 때 에스토니아가 우리나라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합병되고, 우리의 젊은이들이 일본을 대신해서 전장에 나갔던 것처럼 에스토니아 역시 비슷했다. 2차세계대전 때 독일군으로 참전할 수밖에 없었던 에스토니아의 젊은이들은 종전 후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 감시 당하거나 체포되었다.

 아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해준 엔델 선생님.

아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해준 엔델 선생님. ⓒ 싸이더스


주인공인 엔델 역시 도망자 신세다. 그의 죄명은 독일군에 복무한 반역자, 소련은 그런 전쟁 부역자들을 찾아 죄를 묻는다. 엔델은 18살에 독일군에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갔다. 그는 전쟁터에서 탈출에 성공했고, 어머니의 성을 따서 이름을 바꾸고 시골로 숨어들었다. 장래가 기대되는 펜싱선수였던 그는 이제 도망자 신세다. 추적의 손길이 언제 미칠지 모르는 불안한 삶이다.
 
뿌연 김을 내뿜으며 기차가 도착한다. 주변은 온통 연무에 휩싸인다. 큰 가방을 어깨에 멘 청년이 기차에서 내린다. 그는 불안한 듯 사방을 둘러본다. 기차 역사 안은 뿌연 김이 가득 차있다. 엔델이 처한 현실을 말해주는 듯 온통 회색빛이다.

도망자가 된 펜싱 선수
 
그는 시골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 그가 원해서 온 곳이 아니었기에 아이들에 대한 기대 같은 것이 있을 리가 만무하다. 더구나 그는 신분을 숨기고 사는 도망자 신세다. 그러니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다. 그런 그에게 교장은 주말인 토요일에 스키교실을 열 것을 주문한다. 체육관은 낡고 시설은 열악하기 짝이 없는데다 장비도 하나 없는데 어떻게 스키교실을 열 수 있단 말인가.
 
혼자서 펜싱 연습을 하는 엔델을 본 여자 아이 하나가 펜싱에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시작된 펜싱교실, 비로소 엔델은 삶의 의욕을 느끼며 아이들에게 애정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관료적인 교장은 펜싱에 대해 부정적이다. 펜싱은 봉건주의적이고 반사회주의적인 엘리트 운동이라며 펜싱클럽을 없애라고 한다.
   
 펜싱의 묘미는 예리한 거리 감각으로 적과 마주서야 하는 데 있다.

펜싱의 묘미는 예리한 거리 감각으로 적과 마주서야 하는 데 있다. ⓒ 싸이더스


스탈린의 철권 통치 아래 놓여있는 에스토니아는 감시체제에 얽매여 있다. 주민들은 겁에 질려 자신의 의견을 내기를 꺼려한다. 아이들이 펜싱을 하며 변화하는 것을 본 학부모들은 펜싱부 없애는 것을 속으로는 반대하지만 드러내놓고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펜싱은 봉건적인 스포츠가 아니며 칼 마르크스도 젊은 시절에 펜싱을 했다'고 말한다. 그제야 다른 학부모들도 조심스레 손을 들고 그 의견에 동조를 한다. 그래서 펜싱클럽은 유지된다.
 
펜싱은 신체의 급소를 검으로 찔러 점수를 내는 경기다. 그러나 실상은 '찌르기'보다 '거리두기'가 더 중요하다. 예리한 거리 감각으로 상대와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 상대의 칼끝은 여지없이 내 신체를 관통한다. 상대의 위치를 파악한 후에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온 신경을 집중해서 조용히 움직이다 기회가 보이면 가차없이 공격해야 한다. 그것은 곧 도망자 신세인 엔델이 취할 행동 방식이기도 하다.

거리두기의 묘미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거리두기는 무엇일까. 그리고 엔델은 그것에 성공할까. 엔델은 아이들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그는 온 마음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쳤다. 더구나 레닌그라드에서 열리는 펜싱대회에 아이들을 출전시키기까지 한다. 자신의 신분이 노출될 위험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그렇게 한다.

그곳 학생들 중에는 아버지가 없는 아이가 많다. 강제 징집되어 전쟁터에서 죽거나 실종된 것이다. 엔델과 마음을 나누는 여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헛된 기다림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언젠가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는 기다림을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엔델마저 실망을 주고 떠날까 봐 염려를 한다. 

"아빠가 있는 애가 몇 명이나 되는지 알아? 토마스도 마르타도 아빠가 죽고 없어. 얀의 아빠는 실종되었고 그 애 할아버지도 잡혀 갔어."

엔델은 아이들의 아빠가 되어 주기로 한 걸까. 돌아오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는 애들에게 결코 너희들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주고 싶었던 걸일지도 모른다.
 
위험을 무릅쓰고 대회에 나간 엔델은 체포될 위험에 처하자 한창 경기중인 아이들을 남겨두고 경기 현장을 떠난다. 아이들은 간절한 눈빛으로 선생님을 찾는데 의지처인 선생님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차마 아이들을 버릴 수 없었던 엔델은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경기장으로 돌아온다.

"이제 딴 데 가지 마세요. 약속해요. 우리끼리만 시합하기 싫어요."

마르타의 말에 엔델은 그저 아이들을 꼭 안아줄 뿐이다.

 '마르타'에게 펜싱을 가르치고 있는 엔델 선생님.

'마르타'에게 펜싱을 가르치고 있는 엔델 선생님. ⓒ 싸이더스


희망을 선물하다

영화 속의 화면은 뿌옇게 안개가 낀 듯 늘 회색빛이었다. 마치 엔델의 처지를 말해주는 듯 했다. 도망자 신세인 그에게 현실은 늘 불확실하고 미래 역시 암담하기만 하다. 평범하게 살고 싶지만 그런 기회가 그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런 삶 속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장면에서는 늘 노란빛이 머물렀다. 비록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져서 우중충해 보이는 체육관이지만 펜싱을 하는 아이들의 머리 위로 노란 햇살이 비추었다. 그 빛은 희망을 보여주는 듯했다.

영화는 체포되어 떠났던 엔델이 다시 찾아오는 것으로 끝난다. 큰 가방을 어깨에 맨 엔델이 기차에서 내린다.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이 그를 향해 달려간다. 그들 뒤에는 마음을 나누었던 여 선생님도 서있다. 그들을 향해 엔델이 천천히 다가온다. 그리고 활짝 팔을 벌려 아이들을 안는다.

이제 그들 곁에는 밝은 빛이 가득하다. 뿌연 연무 대신 환한 기운이 넘실댄다. 엔델과 아이들이 걸어갈 미래를 보여주는 듯 화면은 온통 밝고 환하다. 

나의 펜싱 선생님 에스토니아 펜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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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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