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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무라 간조의 〈구안록〉
▲ 책겉표지 우치무라 간조의 〈구안록〉
ⓒ 포이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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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좋은 침대를 살 수 있지만 달콤한 잠까지는 살 수 없다'는 말이 있죠. 많은 돈이 절대적인 평안을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재력으로도, 높은 권좌로도, 남다른 명예로도 누릴 수 있는 게 아니죠. 절대적인 평안은 인간 내부로부터 주어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 내부의 노력으로부터 추구하는 평안은 일시적이고 되레 미궁에 빠질 때가 많죠.

기독교의 '신적 타력' 곧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만 인간에게 영원한 평안이 주어진다고 이야기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죠.

인간의 자기 열심을 통해 얻는 평안은 대부분 진통제에 불과할 뿐이고, 더 깊은 괴로움에 직면할 때가 많다는 이유입니다. 물론 그런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평안을 얻었다 할지라도 자신이 행할 바를 행치 않고 '신 뒤에 숨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것은 싸구려 은총으로 전락시키는 행위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죠.

"인위적인 거룩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의 언행은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나의 근신은 친구들의 혐오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자연스럽고 고통스러웠다. 약간의 방종이 어찌 신앙에 방해가 되는가, 침묵은 우울증을 불러올 위험이 있다, 항상 돌부처처럼 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라는 식으로 경계심이 조금씩 풀리자 모든 게 허물어지고 말았다."(18쪽)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의 <구안록>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이자 사회 사상가로 알려진 그는 1890∼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성서주석을 썼고, 무교회주의적인 기독교 이해로 일본 개신교계를 이끈 인물이죠. 그런 그도 '그리스도의 대속'을 깨닫기까지는 '참된 평안'을 얻을 수 없었고, 오히려 크나큰 위선자에 지나지 않았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에도 시대에서 메이지 유신으로 넘어가던 격변기에 무사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877년 사포로 농학교의 교장 클라크와 그 학교의 제1기생들의 반강제성에 의해 '예수를 믿는 자의 서약'에 서명하고 세례까지 받았죠. 졸업 후 1884년 아사다 다케와 신혼생활을 꾸렸는데 7개월 만에 끝나고, 그 공백과 상처를 치유코자 18884년 11월 미국으로 떠났는데, 그 이듬해 1월부터 펜실베이니아 주립 지적 장애시설의 간호사로 근무하게 되죠.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는 일본 사회의 거짓과 부패가 여전하다는 걸 실감했고, 기독교인이 된 자신의 내면 속에도 정신적인 번뇌와 영적인 무력감이 여전히 짓누르고 있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그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자 자연과 학문과 교회생활에 정진했고, 아동들을 위해 그렇게 헌신하여 이타적인 자선사업가가 되고자 했지만, 그것들이 실은 자기 의를 드러내는 또 다른 '이기심의 본성'임을 자각하게 됐습니다.

1885년 9월 애머스트 대학교에 입학한 그는 스승인 줄리어스 H. 실리 총장을 통해 진정한 회심, 곧 참된 평안을 얻게 되죠. 그때까지도 그는 마치 어린 아이가 화분에 나무를 심어 놓고 그 성장을 보려고 매일같이 뿌리째 뽑아보는 것과 같은 내면의 성찰에만 몰두하고 있었는데, 그 총장의 권면을 통해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른바 그의 불완전한 내면까지도 온전히 하나님과 햇빛에 맡기고 안심하면서 자기 성장을 바라보도록, 조언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죠.

물론 그가 깨달은 그리스도의 대속 곧 '속죄 신앙의 특징'은 신적 타율만 강조한 게 아닙니다. 신적인 타율과 인간의 자율이 균형을 이루는 것, 다시 말해 믿음과 행위의 합리적인 긴장 관계를 강화시키는 것이 그의 주된 구원론의 특징이죠. 바로 그것이 과도한 합리주의적 시대정신에 매몰되지 않으면서도 미신적인 몽매주의에 빠지지 않고, 정통적인 기독교의 속죄론 진리를 분명하게 확립한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큰 감동을 받고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려도 우리의 이성을 움직이지 못하는 변화는 머지않아 사라지고 만다. 16세기 프로테스탄트 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감정적 혁명이 아니라 합리적 혁명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로 카리파와 로욜라가 가톨릭 교회에서 일으킨 개혁은 감정적이었기 때문에 100년도 지나지 않아 사라져버렸다."(39쪽)

이것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은 한국개신교회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권고이지 않나 싶습니다. 아무리 기독교의 '타력종교' 곧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강조해도 그것이 이 세상에 합리적인 이성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결국은 '감정적인 은총'으로 끝나버릴 수 있다는 지적입니다.

그것은 요즘 논의되고 있는 '종교인 과세'도 마찬가지겠죠. 개신교 목회자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을 이 세상에 전하고 드러내려 한다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처럼, 과세에 대해 기꺼이 협력하는 게 좋을 것입니다. 물론 고등종교와 하등종교의 구분 없이 모든 무속인들도 파악해서 함께 과세한다면, 더 이상 옥신각신하지는 않겠죠. '그리스도의 대속'을 외치는 것 만큼 '신 뒤에 숨지 않는 목회자'가 되는 것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죠.

"죄란 불완전이 아니다. 내 양심이 나를 책망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같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지 못해서가 아니다. 성서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5:48)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적 완전에 도달하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완전하신 것처럼 사람도 사람으로서 완전하라는 말이다. 완전한 말(馬)이 사람처럼 말을 하고 생각을 하는 말이 아니라, 말의 재구실을 완전히 다하는 말이다."(87쪽)

절대적인 평안을 누리게 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은 인간을 완전한 수준으로 만드는 데 있지만, 그 깨달은 수준만큼의 도리를 갖추면 된다는 뜻입니다. 달리 말해 인간의 불완전함 자체는 죄가 될 수 없는 것이요, 오히려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않고 감추려 드는 게 죄라는 사실이죠. 그런 자에게는 결코 참된 평안이 깃들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것 자체가 더 이상 선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악을 행해도 위험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죠. 그리스도의 대속은 믿는 자를 무책임하게 만드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대속의 은총은 믿는 자들을 더욱더 책임감 있게 이끄는 동력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치무라가 왜 그런 인간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이야기했을까요? 왜 그렇게 대속의 은총을 받은 자들의 수준 속에 있는 인간의 책임감을 강조했을까요? 그 당시에 '대형대벌론'을 부정한 채 하나님을 '사랑의 신'으로만 이해하는 일본 내 자유주의 신학과 유니테리언교의 '신신학(新神學)'을 바로잡기 위함이었죠.

궁극적으로 그것은 힘에 의한 약육강식을 옹호하는 '후쿠자와 유키치'나, 천황제 중심의 군국주의적 제국주의를 찬양하는 그릇된 일본 내 지성인들과 대척점에 선 입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들도 자칫 '신 뒤에 숨어버리는 종교인들',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누리는 은총을 '싸구려 은총'으로 전락시키는 '거짓 종교인들'임을 일깨워주기 위함인 것이었죠.

비록 이 책은 우치무라 간조가 기독교에 입문한 뒤, 그의 내면 안에 있던 갈등과 번민과 불완전함을 해소하고자 하는 과정 속에서 그리스도의 참된 평안을 얻고 누리는 비결을 일깨워주는 것이지만, 이 책의 행간을 읽어나가면 그 시대의 제국주의를 떠받드는 교권주의자이나 신학자들에 맞선 그의 모습 곧 '신 뒤에 숨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한 오늘날의 한국개신교인들에게 귀한 이정표를 제시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참 고마운 책입니다.


구안록 - 참 평안을 얻기까지

우치무라 간조 지음, 양현혜 옮김, 포이에마(2016)


태그:#종교개혁 500주년, #한국개신교회, #우치무라 간조, #구안록, #종교인 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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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기억력보다 흐릿한 잉크가 오래 남는 법이죠. 일상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려고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에요.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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