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21년 차 신동진 아나운서는 2012년 파업 이후 사회공헌실에 배치됐다. 2013년 4월, 부당전보 무효 판결에서 승소해 아나운서국에 복귀했지만, 한국아나운서협회 회장을 맡아 발간한 협회지 '아나운서 저널'을 통해 해직 언론인, 박원순 서울시장, 손석희 JTBC 보도본부 사장 등을 인터뷰했다는 이유로 사측의 압박을 받아야 했다. 결국 사측의 '1급 정치범 수용소'라고 불리는 주조실 MD로 발령 났다.

부당 발령에 항의하며 이유를 묻는 그에게 신동호 아나운서 국장은 "그런 건 가르쳐주지 않겠다"고 했고, 사측은 "능력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발령낸 것"이라고 했다. 사측 논리에 따르면, 김범도 아나운서가 가장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은 스케이트장 관리고, 황선숙 아나운서의 적성은 방송 프로그램 심의다.

이렇게 부당 전보 받은 아나운서가 11명. 견디다 못해 스스로 회사를 나간 아나운서가 12명이다. 22일 서울 상암동 MBC 앞마당에 선 27명의 아나운서는 "2012년 파업 이후, MBC 아나운서들은 대한민국 방송역사상 유례가 없는 비극과 고통을 겪었다"고 외쳤다. 그래서 "방송거부와 업무거부라는 최후의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는 그들은, 김장겸 사장과 현 경영진, 신동호 아나운서 국장의 탄압을 폭로했다. 

이재은 아나운서의 눈물 "동기 김소영 퇴사... 다음은 누구일까"




얼마 전 퇴사한 김소영 아나운서의 동기인 이재은 아나운서는 "누구보다 실력 있고 유능한 아나운서였던 동기는, 지난해 10월 <뉴스투데이> 하차 이후, 무려 10개월 동안이나 방송을 할 수 없었다. 수많은 프로에서 섭외 요청이 왔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배제당했고, 결국 떠밀리듯 회사를 나갈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하나뿐인 동기가 회사를 떠나는 모습을 보며, 슬픔을 넘어 자괴감, 무력감, 패배감 때문에 힘들었다"고 했다. 타 부서로 쫓겨나거나, '주어진 일을 하면서, 우리가 돌아갈 자리를 지키고 있으라'는 말을 믿고 회사가 나아지기를 기다렸지만, "5년이 지나도록 나아질 기미는커녕, 사무실에 빈자리만 늘어갔다"고 자조했다.

이재은 아나운서는 이어 "뉴스를 진행하는 동료들은 오늘 큐시트에는 어떤 뉴스가 있을까 두려워했다. 이미 방향이 정해져 있는 뉴스는, 아나운서들에게 언론인의 역할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다들 뉴스에 들어가게 될까봐 무섭고 두려워한다. 뉴스 앵커가 명예이고 자랑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제는 '멍에'가 됐다"고 폭로했다. 그는 "김소영 아나운서는 10개월 동안 벽만 보고 있다 떠났다. 그다음 차례는 나일까, 옆자리 선배일까, 알 수 없다. 사소한 개진도, 건전한 비판도 할 수 없다"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MBC의 간판 아나운서였던 손정은 아나운서는 2012년 파업 이후 방송 업무에서 제외됐다. "이제는 '아나운서'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게 좀 어색하다"는 손 아나운서는, 파업 이후 TV 출연에 배제된 채 라디오 저녁 뉴스만 진행했다. 그마저도 어느 날 이유도 모른 채 하차 통보를 받았다. 이후 들려온 소문은, 임원 회의에서 모 고위직 임원이 '손정은이 내게 인사하지 않았다'는 발언을 했고, 이 때문에 프로그램에서 하차 됐다는 것이었다. 손 아나운서는 그 임원을 본 적도 없었다고.

이외에도 MBC 드라마 <몬스터> 제작진이 극 중 아나운서 역으로 손정은 아나운서의 출연을 요청하자 담당 국장은 '손정은 말고 다른 아나운서 없느냐'며 출연을 막았고, <경찰청 사람들> MC 요청도 '손정은은 절대 안 된다'는 이유로 무산됐다. 손정은 아나운서는 "각종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요청도 모두 막혔다. 나는 TV에 목소리조차 나올 수 없는 아나운서가 됐다"고 말했다. 손정은 아나운서는 현재 사회공헌실에 배치돼 있다. 

아나운서들은 "이런 상황이 누구 하나만 겪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허일후 아나운서는 "라디오에 7초짜리 시그널도 '허일후 목소리는 안 된다'고 했다"면서, "담당 PD의 섭외 요청이 있었음에도 출연할 수 없었다. 이런 식의 출연 거부를 딱 50번 까지만 셌고, 그 이후 세는 걸 멈췄다"고 자조했다. 최근 <무한도전>에 농구 캐스터로 출연한 것도, 녹화 직전 김태호 PD의 섭외 요청을 받고 담당 부장이 어렵게 설득해 출연할 수 있었다고. 허일후 아나운서는 "담당 부장에게 나도 모르게 '애써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그런데 이게 감사하다고 인사해야 할 일인가 싶어 며칠 밤 괴로웠다"고 씁쓸해 했다.

김범도 아나운서협회장은 "영상기자들의 블랙리스트 문건이나, 고영주 이사장의 녹취록 같은 물증이 아직 확보되지 않았을 뿐, 가장 심각한 수준의 블랙리스트가 자행된 곳이 아나운서국"이라면서 방송 거부, 업무 거부라는 최후의 수단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호소했다.

이재은 아나운서는 "소중했던 방송을 미련 없이 내려놓을 수 있었던 건, 할 수 있는 방법이 이것뿐이기 때문"이라면서 "더 이상 동료가 떠나는 모습을 가만히 앉아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호소했다. 이어 "어쩌면 다시 방송으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드라마 소품실, 스케이트장 관리를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이상 겁내지 않겠다. 모든 MBC 아나운서들이 온전히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때까지, 모든 걸 내려놓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말로 제작 거부에 임하는 아나운서들의 각오를 전했다.


"나쁜 건 계약직 아나운서 협박하는 사측"

아나운서들이 방송 거부에 돌입함에 따라, 이들의 빈자리는 계약직 아나운서 등이 채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MBC 아나운서들은 "노조와 협회에 가입할 수 없는 단기 계약직 아나운서를 뽑아 기존 아나운서들의 자리를 채운 사측이 문제일 뿐, 재계약에 모든 걸 걸 수밖에 없는 단기 계약직 아나운서 후배들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고 밝혔다.

허일후 아나운서는 "그 친구들은 근본적으로 불안한 위치에 놓여있기 때문에, 우리와 뜻을 함께할 경우 계약이 해지될 수도 있다"면서 "후배들을 볼 때마다 안쓰럽고, 애쓰라는 말 말고는 해줄 말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허 아나운서는 "계약직 아나운서를 뽑아 기존 아나운서들을 대체하려고 계획한 자, 그걸 실행에 옮긴 자들이 가장 큰 거악"이라고 지적하며 저항의 대상을 분명히 했다.

김범도 아나운서협회장은 "MBC 아나운서로 입사한다는 건, 방송인이자 언론인으로 입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뽑은 11명의 아나운서는 노조는 물론, 아나운서 협회에도 가입할 수 없다. 사측이 언론인의 역할을 삭제한 채 입사시킨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뉴스의 기본인 라디오 스트레이트 뉴스를, 이름도 밝힐 수 없는, 바우처를 받는 이들에게 맡기고 있다. 언론의 기능을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범도 아나운서는 "계약직 아나운서들은 재계약에 모든 걸 걸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방송을 맡긴 게 아니라, 방송을 가장한 협박과 공갈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이런 불행한 상태에 놓여있다. 그 어떤 언론 탄압보다 가장 치사하고 악랄한 탄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업무 거부에 돌입한 MBC 아나운서는 변창립, 강재형, 황선숙, 최율미, 김범도, 김상호, 이주연, 신동진, 박경추, 차미연, 한준호, 류수민, 허일후, 손정은, 김나진, 서 인, 구은영, 이성배, 이진, 강다솜, 김대호, 김초롱, 이재은, 박창현, 차예린, 임현주, 박연경 아나운서 등 총 27명이다. 현재 휴직 상태인 하지은, 이정민, 오승훈 아나운서는 업무 거부에 참여할 수 없어 동참 의견을 따로 구하지 않았다고 알렸다.

현재 아나운서국에는 신동호(아나운서 국장), 김완태(아나운서 1부 부장), 김미정(아나운서 2부 부장) 아나운서 등 보직자 3명과, 한광섭, 이윤재, 최대현, 이재용, 양승은 등 언론노조에 속해있지 않은 아나운서 5명, 11명의 계약직 아나운서가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