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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강원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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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의 사진은 모두 필름으로 촬영, 직접 스캔하는 과정을 거쳤으며 사이즈 조정 외 다른 보정은 없습니다. 사진 설명 앞의 괄호에 있는 정보는 카메라 기종, 필름 종류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입니다. - 기자 말

5박 7일의 강원도 여행 중 마지막 여정이었던 '덕산기계곡 - 정선읍내 - 육백마지기들'에서 필름에 담은 풍경과 마음에 적은 이야기를 풀어놓으려 한다.

화암면에서 정선읍으로 가다 보면 어천과 합류하는 덕산기계곡의 하류 지점을 만날 수 있다. 상류 쪽은 화암면 쪽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곳은 십수 년 전까지만 해도 꼭꼭 숨겨진 오지 중의 오지였으나 몇몇 여행자들에게 그 숨은 비경을 들킨 뒤로 조금씩 알려져 이제는 하루에 수십 명 정도는 방문하는 곳이 됐다.
화암 소금강 (67ii/Pro160NS)덕산기계곡으로 진입하기 전, 화암면을 지났다. 지난 겨울 위용을 뽐냈던 뼝대는 새롭게 화사한 녹색 옷을 입고 있었다. ⓒ 안사을
화암 소금강 (67ii/Pro160NS) ⓒ 안사을
탐방 경로는 하류보다 상류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정선읍에서 출발하면 하류 쪽은 그리 멀지 않지만 상류 쪽은 꽤 돌아 들어가야 한다. 오지 중의 오지라고 표현할 만한 것이, 상류와 하류를 관통하는 길은 매우 거친 비포장 도로 하나뿐이어서 만약 휴식년 기간이 아니라 해도 일반 승용차로는 양 끝단만 접근할 수 있다.

화암면 근처에서 길이 아닐 것 같은, 왕복 1차로의 좁은 오르막으로 우회전하면 꽤나 높은 곳까지 계속해서 오르게 된다. 정점은 '문치재'다. 경사의 방향이 반대로 바뀌는 지점에 산불감시초소가 하나 있고 그 밑으로 뱀처럼 구불거리는 도로가 보인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안전한 곳에 차를 대고 사진을 한 장 담은 후 내리막으로 진입했다. 아늑한 대자연의 품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덕산기계곡은 '휴가 중'
어떤 길 (67ii/Pro160NS)문치재에서 북동마을로 내려가는 길 ⓒ 안사을
덕산기계곡의 성수기는 조금 특이하다. '비 온 뒤'가 바로 찾는 이가 가장 많아지는 순간이다. 평소에는 계곡의 상류 부분과, 하류의 합수 부분 근처에만 물이 흐르지만 비가 내리고 나면 사방으로 둘러싼 산속에서 물이 흘러내려 힘찬 계곡을 이룬다.

마을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이 물길을 따라 비포장으로 조성되어 있는데, 계곡이 생겨난다는 것은 곧 이 길이 끊길 수도 있다는, 재미나면서도 역설적인 상황이 연출되곤 한다. 그래서 이곳에는 해외의 유명한 폭포의 이름과 비슷한, '나가라 폭포'가 있다. 이 폭포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빨리 계곡에서 나가라는 뜻에서 주민들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현재 휴식 중이다. 계곡 휴식년제를 발령해 취사, 야영, 차량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시점인 '북동교'에는 온종일 어르신 한 분이 명부를 가지고 문지기 역할을 하고 계신다. 명부에는 진입이 가능한 차량의 정보가 들어있다. 마을 내에 민박집이 두세 채 있는데, 그곳의 손님들에 한해 출입이 가능하다.
물빛 (67ii/Pro160NS)북동교에서 본 덕산기계곡의 물빛. 이 곳에서 더 상류로 올라가면 신비의 약수터가 나오는데, 걸어 들어가는 것도 통제되고 있었다. ⓒ 안사을
이곳에서부터 계곡 등산화로 갈아 신고 탐방을 시작한다. 물길과 탐방로가 합쳐지는 곳이 종종 나오면 계곡물 속으로 걷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대부분의 도보여행객들은 계곡과 길이 나누어지는 곳에서도 물속을 걷는다. 그러려고 일부러 이곳을 찾는 것이다.

오지라고는 하지만 개발이 전혀 안 된, 험준한 등산로 같은 길은 절대 아니다. 탐방길 초입은 잘 정돈된 뚝방길이고 모든 길이 차량과 사람이 동시에 지나가야 하는 길이기 때문에 매우 편안하게 걸을 수 있다. 오히려 너무 난이도가 낮아서 실망할 수도 있다.
빈 집 (67ii/Pro160NS)폐가나 흉가라고 하기엔 사람의 흔적이 아직 식지 않은 빈집 한 채. ⓒ 안사을
뚝방길을 10여 분 걸었을까. 드디어 계곡물로 들어가야만 진행할 수 있는 지점이 등장했다. 사람뿐 아니라 자동차도 계곡 물길을 어느 정도 타고 가야 하는 지점이다. 오프로드를 즐기는 사람들이 이곳을 오프로드의 '성지' 쯤으로 여기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얼마 전 몰상식한 사람들이 휴식년제임에도 불구하고 감시가 없는 이른 시간을 틈타 4륜차를 타고 탐방로에 진입했다고 한다. 게다가 탐방로와 분리된 계곡에까지 들어가서 자갈이고 물길이고 모조리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다고 하니, 휴식년제가 끝나면 이곳이 다시 본격적으로 몸살을 앓게 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연둣빛 (67ii/Pro160NS)이번 여행의 모든 사진은 후지필름을 사용했는데, 예전부터 녹색의 발색이 화려하다는 평을 받고 있기 때문. 물이 지나가는 길이면서 찻길이면서 탐방로이기도 한 곳. ⓒ 안사을
신비한 물빛 (67ii/Pro160NS)덕산기계곡을 찾는 이들은 이런 물빛을 보기 위해서 오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이 깊은 곳은 더욱 진하면서도 투명함을 잃지 않는 빛깔을 보여준다. ⓒ 안사을
전날 비가 왔기 때문에 적잖은 기대감을 갖고 탐방을 시작했지만 생각만큼 물이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때 묻지 않은 울창한 숲과 골짜기는 충분히 귀한 탐방길을 제공해 주었다. 가끔 보이는 사람의 흔적은 자연을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 오히려 반가운 느낌이 들게 했다.
도라지꽃 (67ii/Pro160)과거에 누군가가 밭을 일구었음직한 공터에 남색 도라지꽃이 피어있다. ⓒ 안사을
숲 속에 집 한 채 (67ii/Pro160NS)걸으며 발견한 집 한 채가 참 반가웠다. ⓒ 안사을
탐방로 (67ii/Pro160NS)바퀴의 흔적이 두 줄로 길게 나 있다. 비가 많이 내리면 이 길은 곧 계곡이 된다. ⓒ 안사을
갈림길 (67ii/Pro160NS)왼쪽은 편한 길, 오른쪽은 재미있는 길. ⓒ 안사을
절벽과 계곡 (67ii/Pro160NS)절벽과 물길 사이에 쉴만한 돌 터가 있다. ⓒ 안사을
첨벙거리며, 저벅거리며 물길과 자갈길을 번갈아 가다 보니 금세 숲속 책방이 100m 전방에 있음을 알리는 팻말이 보였다. 포털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지도에는 계곡과 등고선 정도만 나와 있어서 예상시간을 정확하게 잡을 수 없었다. 책방까지의 소요시간을 어림잡아 한 시간으로 잡았었는데 예상보다 2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이정표 (67ii/Pro160NS)정확한 위치를 몰라 막연한 마음으로 걷다가 만난 정겨운 이정표. "그대 이곳엔 왜.." ⓒ 안사을
아무리 강원도의 고원 숲속이라고 해도 뙤약볕을 40분간 부지런히 걸었으니 땀이 범벅이었다. 아무도 없는 듯 고요한 마당으로 조심스레 들어가 문을 여니 넉넉한 웃음을 가지신 여사님 한 분이 맞아주셨다.

"어머, 걸어오셨어요? 물속에서 다 젖어가면서?"
"네. 생각보다 얼마 안 걸리네요."
"우와 멋지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높낮이의 폭이 꽤 큰 성조로, 동화구연을 하듯 부드러운 말투로 말씀했다.

"커피 되죠?"
"그럼요. 더치커피 되고 드립커피 되고요. 어떻게 드릴까. 따뜻하게?"
"차갑게요."
"우와. 차갑게요? 더우신가보다."
숲속 책방 (67ii/Pro160NS)부부가 함께 기거하며 운영하는 곳. 남편분은 소설가, 아내분은 동화작가이시다. ⓒ 안사을
짧은 대화에서도 이곳이 얼마나 시원한 곳인지 대충 알 수 있었다. 8월 초 도보 여행자가 차가운 음료를 주문하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전날 남면의 한 모텔에서 숙박을 했는데, 그곳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여긴 다른 곳과 조금 다르다며, 에어컨이 없는 이유를 밤이 되면 알 수 있을 것이라던 모텔 주인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오버랩됐다.
내부 사진 (67ii/Pro160NS)아기자기한 소품들이 가득 ⓒ 안사을
아기자기한 프론트 (67ii/Pro160NS)혹자는 덕산기계곡을 '한국의 네팔'이라고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찻집 인테리어의 색깔이 마치 그곳 같기도 하다. ⓒ 안사을
여사님께서는 건물 바로 앞에 있는 원두막으로 올라가서 쉴 것을 권유하셨다. 위로 올라가 잠시 앉았더니 산들바람에 5분 만에 땀이 다 식어버렸다. 한 20분간 시쳇말로 '멍때림'을 즐기다가 방명록 역할을 하는 작은 나무토막에 이런저런 글을 끼적인 후 겨울이 돌아오면 얼어붙은 계곡 위를 걸어 다시 방문하겠노라고 기약을 남기고 왔던 길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언제나 그렇듯 돌아가는 길은 더욱 짧았다.
원두막에서 (67ii/Pro160NS) ⓒ 안사을
정선 읍내를 거쳐 '육백마지기들'로

정선 읍내는 장날과 장날이 아닌 날, 그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 불과 하루 차이에 열 배가 넘는 사람들이 오고 간다. 아리랑시장 자체가 유명한 관광지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여행의 일정상 자연스럽게 장날에 읍내로 들어오게 됐다. 말 그대로 가는 날이 장날이었던 셈.

강원도의 음식은 참 담백해 전라도의 진한 맛과 대조가 되면서 색다른 느낌을 준다. 시장에 들르게 되면 항상 먹는 곤드레밥과 콧등치기국수가 이곳의 대표 메뉴다. 개인적으로 콧등치기국수는 얼음 띄운 여름 버전보다 김이 풀풀 나는 겨울 버전이 더 좋다. 곤드레밥은 일 년 내내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그 향이 코끝을 스쳐 지나가는 착각이 들 정도로 정이 든 음식이다. 주먹밥으로 만들어서 도시락통에 넣은 다음 집으로 돌아가는 긴 운전 시간 동안 하나씩 꺼내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인제-평창-정선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꼭 들러야 하는 곳을 가장 먼저 정해 놓았었다. 읍내에 있는 한 커피집인데, 올 2월 남루한 행색으로 우연히 들어갔던 곳이다. 이곳이 특별한 이유는 다름 아닌 커피 맛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일반 에스프레소 샷을 스페셜 블렌딩 원두로 추출한다. 그러니 아메리카노 맛이 특별할 수밖에 없다. 이윤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항상 신선하고 좋은 원두를 고집하는 자매 사장님들 덕분이다.

머그잔에 가져다주신 커피 한 모금에서 지난겨울 여행의 맛이 났다. 그 카페의 커피 향이 정선 여행을 대표하는 향기로 뇌 깊은 곳에 저장돼 있었나 보다. 소포장으로 원두 400g을 사면서 읍내에서 가장 맛있는 피자 가게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육백마지기들에는 정식 야영장이 없어서 취사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올해가 가기 전에 한 번 더 올 것을 말씀드리고 저녁거리를 산 후 평창군 미탄면에 위치한 육백마지기들로 향했다.
자작나무숲 (67ii/Veivia50)육백마지기들 정상, 풍력발전단지에 이르기 직전, 자그맣게 조성되어있는 자작나무 숲. ⓒ 안사을
육백마지기들이라는 재미난 이름에는 높은 고원지대를 넓디넓은 밭으로 일구어낸 주민들의 노력이 깃들어있다. 이곳, 1000m 고지에 화전민들이 밭을 일구고 삶의 터로 잡았던 시절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명칭의 유래를 찾아보니 종자 육백말을 뿌릴 수 있는 땅이라는 말도 있고 개간한 땅의 넓이가 육백마지기라는 말도 있고 도통 어느 것이 맞는 것인 줄 몰랐는데 바보 같은 고민이었다. '마지기'라는 말 자체가 종자 한 '말'을 뿌릴 수 있는 땅 넓이라는 데에서 온 말이었다. 그러니까 그 두 가지의 유래는 결국 같은 뜻이었던 것이다.
언덕의 서쪽편 (SW612/Pro160NS)서쪽편에 언덕이 있어서 지평선으로 넘어가는 해는 조망할 수 없지만 붉게 물든 하늘과 풍차의 실루엣은 충분히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다. ⓒ 안사을
이미 도착한 시간이 저녁 6시를 넘기고 있어서 텐트를 치고 나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처음 가보는 곳이고 지도상에 길이 정확하게 나와 있는 곳이 아니어서 애초에 방위를 확인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노을, 일출, 북극성 등의 촬영 위치를 미리 잡을 수 없었다. 자동차로 언덕을 오르내리며 세 번을 돌아본 뒤에야 밤과 아침 촬영지의 위치를 대충이라도 잡을 수 있었다.

가장 깊은(높은) 곳에 있는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조망 방위는 남서쪽이었다. 두 달쯤 더 전에 이곳을 방문했더라면 화려한 은하수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날은 은하수의 비교적 어두운 부분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날 달이 지는 시각은 새벽 한 시였다. 그 시각을 기점으로 해 피사체를 달리했다. 1시 이전에는 달빛이 비치는 육백마지기들의 모습을 담았고, 1시 이후에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별 일주 사진, 그리고 은하수의 한쪽 꼬리를 담았다.
달과 육백마지기들 (MX/Natura1600)남서쪽 하늘에서 달이 점차 기울고 있고 야밤에도 풍차는 쉬지않고 일하고 있다. 눈으로 보이는 장면은 보다 어둡다. 90초동안 노출을 주었기 때문에 별들이 지구의 자전 반대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 안사을
대낮처럼 밝았다고 하면 당연히 과장이 심한 말이겠지만 비유적인 표현으로 쓰기에는 충분히 가능한 밝기의 달빛이었다. 게다가 습기가 싹 가신 하늘은 꽤 밝은 달빛에도 지지 않고 함께 빛나고 있었다. 달이 지고 난 뒤 암흑이 찾아오면 별들이 얼마나 또렷하게 담길지 기대감에 부풀었다.
풍차와 별 (MX/Natura1600)아직 달이 지지 않은 상황이라 하늘의 한쪽편이 밝다. F2.8에 30초 노출. ⓒ 안사을
별 일주 (67ii/Pro160NS)위 사진과 동일한 찍기 시작하여 약 1간 반 정도 셔터를 열어두었다. 역시 달빛이 있어서 하늘의 바탕이 조금 밝게 나왔다. ⓒ 안사을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다음날 운전을 해야 하니 셔터를 열어놓고 밤을 꼴딱 새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텐트에 들어가서 한두 시간 눈을 붙여야 하는데, 알람 소리에 깨도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것이 매번 쉽지만은 않다. 이날은 맑은 하늘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벌떡 일어나서 나갈 수 있었다. 날씨가 애매한 날은 셔터를 열어놓고 다시 나가지 않을 때도 가끔 있다. 잠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하다.

알람 소리에 일어나보니 월몰 시간이 막 지나있었다. 텐트 문을 살짝 열어보니 암흑 속에서 발전기의 불빛만이 깜빡이고 있었다. 전망대 바깥으로 보이는 북쪽 하늘에는 북두칠성과 북극성이 또렷하게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잠이 훌쩍 달아났고 삼각대 두 개에 각각 설치해놓았던 카메라를 같은 방향으로 놓았다. 감도 1600짜리 필름을 넣은 35mm 카메라로는 30초 노출로 점상 촬영을, 감도 160짜리 필름을 넣은 카메라로는 셔터를 열어놓고 별의 궤적을 촬영했다.
까만 하늘에 별 (MX/Natura1600)평생 중 가장 많은 별을 보았다. 발전기의 불빛이 없었다면 몽골이나 남미의 밤하늘 못지 않은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F2.8에 30초 노출 ⓒ 안사을
인터벌을 두고 몇백 장을 찍은 뒤 합성하는 디지털 방식과 달리 필름카메라는 몇 시간이고 셔터를 계속 열어 모든 빛을 다 필름에 기록하기 때문에 간혹 강한 불빛이 섞여 들어가는 순간을 골라낼 수 없다. 촬영의 끝물에 구름이 몰려와도, 디지털은 구름이 없었던 순간까지만을 선택해 합성하면 되지만 필름에는 구름의 움직임이 모두 기록되기 때문에 그동안 기록된 깔끔한 궤적이 가려지고 만다. 이날 하늘이 매우 청명했지만 구름이 다가올까 두려워 잠시 일어났던 순간에 셔터를 닫아버렸다.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궤적을 담은 뒤였다.
별 일주 달이 지고나니 암흑이 찾아와 별의 궤적이 좀 더 또렷하게 담겼다. 조리개 4(최대개방)에 2시간 반 정도 노출을 주었다. 시민박명 시각이 꽤 남아 있어서 한 시간 정도는 더 열어둘 수 있었지만 구름이 언제 몰려올지 몰라 셔터를 닫았다. ⓒ 안사을
별 촬영을 모두 마치고 텐트에 다시 들어간 시각은 새벽 4시쯤. 일출 시각을 확인해 다시 알람을 맞추고 쪽잠에 들었다. 요란한 알람 소리에 다시 일어나보니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뜬 느낌이었다.

지난 저녁 보아 둔 일출 포인트로 차를 몰았다. 아뿔싸. 그런데 방향이 틀렸다. 어제 보아둔 곳은 정확한 동쪽이 아니라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곳이었다. 시선의 방향만 조금 왼쪽으로 틀면 동쪽이 나오기는 하지만, 높은 언덕으로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풍경 또한 아름다웠다. 사선으로 비춰오는 미명과 새벽의 운해가 어우러진 광경이었다.
해뜨기 직전 (SW612/Pro160NS)왼쪽의 산 너머에서 해가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다. ⓒ 안사을
운해와 하늘 (67ii/Pro160NS)같은 광경을 망원렌즈로 담은 것. 운해가 산능선을 넘어 흘러내리는 모습이 참으로 신비했다. ⓒ 안사을
위 두 컷을 찍는 동안 4분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나름 서두른 것이다. 카메라 두 대를 삼각대에 설치해야 하고 한 대는 노출계도 없어서 머릿속으로 노출을 계산하거나 옆 카메라의 노출을 참고하여 셔터스피드와 조리개를 기계식으로 조절해야 한다. 해가 지평선으로 드러난 순간부터는 마치 빨리감기를 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시간이 조급하게 흘러간다. 이러한 상황에서 4분이라는 시간은 꽤 긴 시간이다.

카메라를 다시 차에 넣고 동쪽을 향해 언덕길을 조금은 서둘러 달린다. 산의 북동쪽 면은 하우스들과 밭이 가득하고 전력공사의 관리동이 있는데 전날 둘러본 바에 의하면 시야가 시원하게 터져있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능선을 돌아서 가보니 이미 해가 구름 위로 떠 오른 지 5분은 돼 보였다. 망원렌즈(165mm/환산화각 83mm)로 잡으니 시야를 방해하는 주변의 선들을 피해 일출의 모습을 잡을 수 있는 최소한의 각이 나왔다.

해가 상당히 높이 올라왔기 때문에 긴장되는 마음으로 노출을 조절했다. 지상과 하늘의 노출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필름스캐너 미리보기로 나오는 모습에 쾌재를 불렀다. 현행 디지털 카메라의 HDR기법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치겠지만 최대한 표현할 수 있는 디테일은 건진 듯했다.
육백마지기들의 일출 (67ii/Pro160NS)분홍빛 하늘과 사광에 비친 녹색 식물, 나무의 실루엣과 하얗게 빛나는 구름들. 사진으로는 다 표현하지 못한 당시의 벅찬 광경이 눈 앞에 선하다. ⓒ 안사을
잠자리로 삼았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니 이곳은 산 그림자에 가려져 아직 새벽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사진을 마저 한 장 더 담고 야영짐을 정리하다 보니 강렬한 햇빛이 내려왔다. 며칠 전부터 꾸준히 이슬에 젖어왔던 텐트며 쉘터 등을 차에 널어 말리기 시작했다.
남쪽 하늘 (SW612/Pro160NS)해가 산능선을 넘어 올라오면 저 안개들은 곧 사라질 것이다. ⓒ 안사을
보통 여름철 야영 후 아침이 되면 둘 중 하나는 젖게 되는데, 하나는 짐들이고 또 하나는 나 자신이다. 쨍한 햇살이 비추면 짐들은 바싹 말릴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땀이 줄줄 흘러 내 옷이 젖게 되며, 햇빛이 나지 않는 날이면 그 반대의 상황이 연출되곤 한다.

하지만 이날은 둘 다 젖지 않았다. 8월 초순의 한여름이었음에도, 그리고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었음에도,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온몸이 쾌적했으며 나의 짐들은 바스락거리며 기분 좋게 말라갔다. 3월이나 10월쯤 겪을 수 있는 기분 좋은 순간을 이날 아침에 맞이하며 다시 돌아오는 길고 긴 길의 시작을 힘차게 출발할 수 있었다.

총 세 편으로 이루어진 이번 강원도여행기 첫 번째 기사 첫머리에, 강원도는 나의 커다란 피난처라는 서술을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끊임없이 가을과 겨울의 여정을 또다시 계획한 것을 보면 그 마음이 더욱더 깊어진 것이 틀림없다. 9월 말이 되면 민둥산의 정상에서 하룻밤을 보낼 것이고 1월 중순이 되면 인제의 농원에 텐트를 며칠 쳐 놓고 이곳저곳을 탐방할 것이다.

나의 생애에, 그리고 후손들의 시대에도 여전히 찾아볼 만한 청정한 대자연이 우리나라에 가득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태그:#강원도, #여행, #필름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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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 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인 '고산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필름카메라를 주력기로 사용하며 학생들과의 소통 이야기 및 소소한 여행기를 주로 작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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