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축구는 과학 기술의 발전과 궤를 같이 한다. 덕분에 선수들의 플레이에 대해 다각도의 분석이 가능해져 이전보다 다양한 '숫자'가 팬들에게 데이터로서 제공된다. 데이터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코어, 득점의 수 등 몇몇 숫자만이 사람들의 흥미를 이끌어낸다.

보통 경기장 내에서 일어나는 플레이에 대한 숫자(득점, 슈팅 수 등)가 의미를 가지는 와중에 유독 플레이와 아무 연관이 없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숫자가 있다. 바로 선수들 등에 적힌 숫자. 즉 '등번호'다. 등번호는 그 선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동시에 많은 것을 말하기도 한다. 단순히 선수 구분의 편의성을 위해 탄생한 등번호는 세월이 흐르자 단순한 번호가 아닌 의미와 가치를 더해진 '특별한 숫자'로 변모했다. 물론 모든 등번호가 가치 있는 '위대한 등번호'가 될 수는 없다. 세계 축구사에서 소수만 인정받은 '위대한 등번호'의 계보를 살펴보자. - 기자 말

FC 바르셀로나(이하 바르사)는 스페인 축구의 2인자였다. 오랜 기간 바르사가 최고의 자리에 위치하지 못한 이유는 명확하다.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스페인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비호 아래 성장한 레알의 힘을 감당할 수 없었다. 벌어진 격차를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레알 이외에도 아틀레틱 빌바오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같은 쟁쟁한 팀도 다수 존재했다. 스페인은 절대로 호락호락한 무대가 아니였다.

스페인과 유럽에서 바르사가 현재의 명성을 얻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역시 '등번호 10번'의 활약이 컸다.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바르사 10번 계보의 시작은 199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위상을 떨쳤다. 뛰어난 10번의 등장과 클럽에 '크루이프즘'이 정착되면서 바르사는 레알과 비슷한 높이에 도달했다. 2000년대 후반에는 천재적인 감독 펩 과르디올라의 지휘 아래 '바르사 왕조'를 완성하기도 했다. 최근 20년여간 바르사가 세계 최고의 클럽이라는 레알과 비견해도 손색이 없는 성적을 거둔 데에는 '등번호 10번'들의 경이로운 활약상이 있었다.

'악동' 스트라이커 - 호마리우

   그라운드 밖 기행과 별개로 실력은 뛰어났던 호마리우

그라운드 밖 기행과 별개로 실력은 뛰어났던 호마리우 ⓒ YOUTUBE 동영상 캡쳐


바르사 10번 역사에 있어서 가장 거대한 이름은 디에고 마라도나다. 100년이 넘는 축구 역사를 여전히 펠레와 양분하고 있는 마라도나는 1982년 고향을 떠나 바르셀로나로 향했다. 마라도나 이름에 걸맞은 활약상을 두 시즌 동안 보여줬지만, 두 번째 시즌 빌바오와 경기에서 악의적인 태클로 선수 생활이 끝날 뻔한 큰 부상을 당했다. 반 년 만에 부상에서 돌아온 마라도나는 팀을 스페인 국왕컵 결승까지 인도했다. 그런데 하필 결승전 상대는 마라도나의 부상을 야기한 빌바오였고, 빌바오 선수들의 거친 플레이에 폭발한 마라도나는 경기 도중 집단 폭행 사태에 연루되면서 쓸쓸히 스페인 무대를 떠났다.

마라도나의 이탈 이후 한동안 위대한 주인을 만나지 못했던 '등번호 10번'은 1993년 브라질에서 온 왜소한 공격수로 인해 비상했다. 본격적으로 바르사 10번 계보의 시동을 건 주인공은 브라질의 천재 스트라이커 호마리우였다. 브라질 클럽 바스쿠 다 가마에서 데뷔한 호마리우는 빠르게 성장했고, 1988 서울 올림픽 브라질 멤버로 참가해 은메달을 목에 걸고 대회 득점왕을 차지했다. 유럽 클럽들의 레이더망에 포착된 호마리우를 처음으로 품은 클럽은 PSV 아인트호벤이었다. 아인트호벤에서 다섯 시즌 동안 활약한 호마리우는 109경기에 나서 98골을 성공시켰고, 4번의 네덜란드 리그 득점왕에 등극했다. 유로피언컵(UEFA 챔피언스리그 전신) 득점왕 자리를 차지하기도 했다.

1993년 호마리우의 바르사 입성은 요한 크루이프 감독 아래에서 탄생한 '드림팀'의 방점이었다. 당시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의 외국인 보유 상한선인 3명을 이미 충족한 상태였지만 과감하게 호마리우를 영입했다. 그만큼 호마리우는 당대 유럽 최고의 공격수로서 이미 군림하고 있었다.

브라질 선수답게 호마리우는 빠른 속도와 섬세한 드리블 능력을 동시에 갖췄고,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수비수 사이로 저돌적인 돌파를 즐겼다. 또한 재치있는 슈팅 능력과 문전 앞 침착성을 보유하고 있어 패널티 박스 안 호마리우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라운드의 맹수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와 짝을 이룬 호마리우는 데뷔 시즌 리그 33경기에 출장해 30골을 집어 넣는 괴물 같은 활약상을 보여줬다. 호마리우는 화려한 발재간과 골대 앞에서의 단호함으로 스페인 무대를 단숨에 정복했다. 호마리우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 것은 그의 '자신감'었다. 바르사 데뷔 전 호마리우는 리그에서 30골 이상을 잡아내겠다고 호언장담했고 자신의 약속을 지켰다.

호마리우 자신감의 절정은 1994년 1월 8일에 열린 '엘 클라시코' 경기였다. 호마리우는 브라질에서 열리는 카니발 축제에 참여하고 싶어 휴가 요청을 냈지만 리그가 한창 진행 중이었기에 거절당했다. 크루이프 감독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엘 클라시코에서 해트트릭을 하면 휴가를 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이를 받아들인 호마리우는 가볍게(?) 세 골을 작렬하며 유유히 브라질로 향했다. 엘 클라시코 데뷔전에서 믿을 수 없는 활약을 하고 휴가를 떠나 버린 호마리우의 만화 주인공 같은 모습에 열광하지 않을 바르사 팬은 없었다.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라리가) 득점왕을 차지하며 '드림팀'의 리그 4연패를 이끈 호마리우는 1994 미국 월드컵에서도 활약을 이어갔다. 결승전을 제외한 모든 경기에서 공격 포인트를 기록한 호마리우는 조국에게 네 번째 월드컵 우승을 선물했다. 호마리우는 월드컵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고, 1994년 FIFA 올해의 선수상도 수상하며 1994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바르사 첫 시즌에 많은 것을 거머쥔 호마리우는 특유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고치지 못하고 한 시즌 만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1994-1995 시즌 호마리우는 최악의 경기력 끝에 리그에서 4골을 뽑아내는데 그치며 두 시즌 만에 바르사 유니폼을 벗게 됐다. 아주 짧은 기간 바르사에서 활약했지만, 데뷔 시즌 활약상만큼은 역대 바르사 10번 중 가장 찬란했다.

'외계인' - 호나우지뉴

   외모만큼이나 실력도 '외계'스러웠던 호나우지뉴

외모만큼이나 실력도 '외계'스러웠던 호나우지뉴 ⓒ 위키미디어


축구 역사상 손에 꼽히는 공격수 마라도나와 호마리우로부터 시작된 계보답게 바르사 10번을 거친 선수들의 이름값은 모두 대단했다. 선배 호마리우의 등번호를 이어받은 히바우두는 고군분투하며 '드림팀' 해체 이후 무너지는 바르사를 지켜냈다. 2002년 히바우두의 이적으로 아르헨티나의 위대한 플레이메이커 후안 로만 리켈메가 계보를 이어갔지만, 팀 전술에 적응하지 못하고 1년 만에 팀을 떠났다.

드림팀의 영광은 과거의 산물이 되었고, 스타 선수들은 팀을 떠났다. 여전히 강한 레알과 라파엘 베니테즈 아래 성장한 발렌시아 CF의 반격에 바르사는 밀려났다. 반전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새롭게 바르사의 회장으로 선출된 호안 라포르타는 2002 한·일 월드컵 우승으로 스타덤에 오른 브라질의 호나우지뉴를 2003년 파리 생제르망에서 영입하는데 성공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이적에 가까웠던 호나우지뉴를 기어코 바르샤로 데려온 것은 '신의 한수'였다.

호나우지뉴는 데뷔 시즌인 2003-2004 시즌부터 강렬했다. 신임 감독 프랑크 레이카르트 체제가 자리를 잡지 못하면서 바르사는 2004년을 리그 9위로 시작했지만, 후반기 호나우지뉴를 활용한 왼쯕 측면 프리롤 전술이 먹혀 들면서 라리가 2위로 시즌을 마쳤다. 호나우지뉴는 리그에서만 15골 11개의 도움을 신고했고, 모든 대회를 통틀어 45경기 출장 22골 14개의 도움을 기록했다.

성공적으로 바르사 시스템에 안착한 '외계인'의 유럽 침공은 2004-2005 시즌부터 본격화됐다. 호나우지뉴처럼 영입된 포르투칼의 미드필더 데쿠와 '흑표범' 사무엘 에투의 활약과 바르사 유소년 정책이 산물인 사비 에르난데스, 빅토르 발데스 등이 성장하면서 바르사의 '드림팀'이 부활했다.

수많은 재능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졌지만 호나우지뉴는 군계일학이었다. 그는 브라질 축구 그 자체였다. 공격 2선에 위치한 호나우지뉴는 자유롭게 경기장을 누볐다. 좀처럼 공을 잃지 않았고 빠른 스피드와 화려한 몸놀림으로 상대를 무력화 시켰다. 정교하면서도 강력한 킥으로 상대 골망을 흔들었다. 왼쪽 측면을 기반으로 플레이했지만 공격형 미드필더답게 날카로운 패스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외계인'이 환하게 웃으며 경기를 즐기는 동안 상대는 지옥을 경험했다.

호나우지뉴의 원맨쇼와 동료들의 활약 속에 바르사는 6년 만에 레알을 누르고 라리가 타이틀을 가져왔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첼시에게 패하면 16강에서 탈락했지만, 패널티 박스 근처에서 첼시 수비수들을 농락하고 가볍게 골을 넣는 그의 실력은 정말 '외계'에서 온 것 같았다. 2004-2005 시즌 리그에서 9골 10도움에 그쳤음에도 2005년 발롱도르는 호나우지뉴 품에 안겼다. 호나우지뉴의 플레이는 공격 포인트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2005-2006 시즌은 바르사 '드림팀 2기'의 시즌이었다. 18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팀에 녹아든 리오넬 메시의 등장으로 'REM(호나우지뉴-에투-메시)' 라인이 본격적으로 가동됐다. 에이스는 단연 호나우지뉴였다. 데쿠와 에드미우송 등이 버티는 중원은 단단했고, 본래 주전 오른쪽 측면 공격수였던 루도빅 지울리와 신성 메시의 등장으로 좌우 균형도 맞춰지며 공격의 폭발력은 배가됐다. 동료들의 활약 덕에 호나우지뉴는 더 자유롭게 필드 위를 뛰어다녔다. 라리가 챔피언은 또 한번 바르사가 차지했고, 잉글랜드의 아스날을 물리치고 14년 만에 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레알의 홈 관중들이 호나우지뉴의 플레이에 기립 박수를 보냈을 정도였다.

그 누구보다 반짝였던 호나우지뉴는 급격히 추락했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 부진을 시작으로 예전의 모습을 잃었다. 2006-2007 시즌 리그에서만 21골을 성공시켰지만 기록만 좋았을 뿐 영향력은 예전만 못했다. 방탕한 사생활로 문제를 일으켰고 구설수에 올랐다. 결국 경기력, 태도, 자기 관리 등 모든 면에서 특별함을 잃은 호나우지뉴는 2008년 펩 과르디올라 감독의 부임으로 바르사와 작별하게 됐다. 끝은 좋지 못했지만 단기간에 바르사를 유럽 최정상에 올려 놓은 호나우지뉴를 팬들을 잊지 못하고 있다.

바르사의 '메시아' - 리오넬 메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 자리를 노리는 리오넬 메시

축구 역사상 최고의 축구 선수 자리를 노리는 리오넬 메시 ⓒ 위키미디어


호나우지뉴가 2006년 여름부터 하락세를 타자 바르사도 몰락하기 시작했다. 나태해진 호나우지뉴와 모든 성공을 누린 주축 선수들이 동시에 부진했다. 호나우지뉴를 대신할 '메시아(구세주)'가 필요했다. 그 인물은 누가 봐도 정해져 있었다. 만 17세의 나이에 1군 무대에 데뷔해 빠르게 팀의 핵심 멤버로 부상한 리오넬 메시가 호나우지뉴의 후계자로 낙점을 받았다. 메시는 호나우지뉴가 특별함을 잃기 시작한 2006-2007 시즌부터 바르사의 에이스로서 활약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바르사의 에이스는 호나우지뉴처럼 보였지만 상대 수비진을 균열시키고 차이를 만드는 선수는 메시였다.

하지만 소년 메시가 팀 전체를 이끌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바르사는 수페르 코파 우승컵 하나만 챙기며 철저히 실패했다. '소년 가장' 메시가 2007년 발롱도르 3위를 차지한 것이 바르사 팬들에게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메시는 2007-2008 시즌부터 완전한 바르사의 핵이 되었다. 메시가 곧 바르사 공격이었다. 메시가 시즌 중후반 부상 당하기 전까지 바르사는 나름 순항했지만,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메시가 부상을 당한 이후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결국 리그에서 3위까지 밀려났고, 메시의 복귀에도 불구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게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서 패하며 무관으로 시즌을 마쳤다.

위기에 빠진 바르사는 변화의 칼을 뽑았다. '드림팀 2기'의 수장 레이카르트를 경질하고 초짜 감독인 펩 과르디올라에게 지휘봉을 넘겼다. '스폐셜 원' 조세 무리뉴 대신 1부 리그 감독 경험이 전무한 과르디올라를 선택한 바르사는 부정적인 평가에 놓였다. 과르디올라가 호나우지뉴, 데쿠 등을 이적시킨 것도 큰 불안요소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바르사는 점유율 축구와 티키타카를 위해 바르사 유소년 팀에 있던 페드로 로드리게스와 세르지오 부스케츠를 과감히 1군 멤버로 합류시켰다. 사비에게는 과거보다 더 많은 권한을 줬다. 결정적으로 잦은 부상에 신음하던 메시를 '건강한' 메시로 변모시킨 것이 결정적이었다. 2008년 발롱도르에서 이미 2위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났던 메시가 부상 없이 시즌을 보내자 바르사의 공격은 폭발했다.

'HEM(앙리-에투-메시)' 라인은 정확한 임무 분담 아래에서 상대 수비진을 무너뜨렸다. 메시가 폭발적인 드리블로 중원과 오른쪽 측면을 헤집어 놓으면 티에리 앙리와 에투가 마무리했다. 물론 메시의 득점력도 대단했다. 리그에서 처음으로 20골 고지를 밟았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9골을 터뜨리며 득점왕을 차지했다. 메시의 놀라운 퍼포먼스와 과르디올라의 전술이 합쳐진 바르사는 무적에 가까웠다.

결국 바르사는 2008-2009 시즌 라리가-스페인 국왕컵-챔피언스리그를 모두 석권하며 스페인 클럽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바르사는 UEFA 슈퍼컵-수페르 코파-FIFA 클럽 월드컵까지 모조리 우승하며 2009년에만 6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세계 축구의 패권이 단번에 메시와 바르사에게 넘어오는 순간이었다.

오른쪽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메시는 중앙에 위치하며 '제로톱' 전술에도 완벽한 플레이를 이어갔다. 득점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졌고 드리블은 시간이 흐를수록 완벽해졌다. 터치의 대부분을 왼발로 가져가는 것을 상대가 파악했다고 해서 메시를 막을 수는 없었다. 2011년에는 'MVP(메시-비야-페드로)' 조합의 중심으로서 또 한번 챔피언스리그를 정복했고, 2015년에는 역대 최강의 트리오라 불리는 'MSN(메시-수아레즈-네이마르)'의 중심으로서 유럽 축구 역사상 최초의 '한 클럽 두 번째 트레블'이란 신화를 만들어냈다. 그 사이 바르사와 라리가 득점에 관련된 대부분의 기록은 메시 차지가 됐다.

라이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갈수록 골문과 가까워지며 찬사를 받는 반면 메시는 골대와 멀어지면서 신화를 써 내려가고 있다. 2012년 한 해에만 91골을 넣었을 정도로 한 때 득점에 집중했던 메시는 현재 골게터와 플레이메이커로서 동시 활약 중이다. 완벽한 왼발과 득점력, 심지어 경기를 주무르는 능력까지 보유한 메시는 세계 축구의 '신(神)'이라 불리며 펠레와 마라도나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국가대표에서는 다소 아쉽지만 메시의 클럽 커리어는 완벽에 가깝다. 다만 최근 바르사가 전력 약화로 위기를 맞이한 것은 훗날 옥의 티로 남을 수 있다. 바르사의 차기 10번으로서 안성맞춤이었던 네이마르가 파리 생제르망으로 이적함에 따라 어깨가 무거워졌다. 어쩌면 소년 가장 시절보다 더한 부담감이 메시 앞에 놓여 있다. 바르사 10번 계보의 정점에 서있는 메시가 이 위기를 타개하고 다음 주자에게 기분 좋게 10번을 넘길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바르사 10번 호마리우 호나우지뉴 리오넬 메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