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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국제연감 1990년판에 소개된 문은희
 브리태니커 국제연감 1990년판에 소개된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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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수정 : 11월 13일 오전 9시 45분]

일본에서 매년 발행되는 브리태니커 국제연감은 국제문제,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문화, 예술, 스포츠 분야에서 한 해 동안 일어난 중요한 사건과 인물을 기록하고 소개하는 책이다. 그 책의 1990년판 미술품 매매 분야에 문은희의 4폭 누드 병풍이 소개되었다. 그것은 1989년 도쿄의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에서 전시된 문은희 수묵화전 '나부백태'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림 아래 설명은 '수묵화 누드 백태'로 되어 있다.

문은희처럼 작품 사진이 소개된 화가는 피카소, 칸딘스키 등 5명이다. 피카소와 칸딘스키는 입체파와 표현파 화가로 1900년대 초부터 작품 활동을 한 서양 현대회화의 거장들이다. 피카소의 작품으로는 1905년작 '피에로의 결혼(ピエレツトの婚礼)'이 소개되고 있다. 사진과 작품의 크기(115×195㎝)까지 나온다. 그런데 피카소 작품목록에서 이 작품을 찾을 수가 없다.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준 운보 김기창 화백

문은희가 그린 운보 김기창
 문은희가 그린 운보 김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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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 화백은 평생의 은인이다. 그는 50년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시절 스승이다. 70년대 신수회 활동 때는 지도교수 역할을 했다. 80년대 누드화를 그리던 시절에는 든든한 후원자였다. 1987년 4월 22일 문은희가 남긴 기록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늘 아침 10시 김기창 선생님께서 일본에서 산 누드 크로키 책을 가지고 우리 화실을 방문해주셨다. 그리고는 일본 대가들 크로키보다 내 붓 크로키가 낫다고 칭찬해 주셨다. 늘 선생님의 은혜만 받아 정말 죄송스럽다. 선생님께서는 내가 열심히 작품 활동 하는 것에 만족해하시는 것 같다. 스승으로서 대가답다."

1989년 일본 전시를 위해 김기창 화백을 방문한 미술관장과 평론가
 1989년 일본 전시를 위해 김기창 화백을 방문한 미술관장과 평론가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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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창 선생의 후원 결과 80년대 후반 일본 전시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일본의 도쿄전 운영위원이던 우사미 쇼고를 소개해준 사람이 김기창 화백이다. 1989년 스트라이프하우스 미술관 '문은희 수묵화전 나부백태'전시를 추진하던 미술관장과 미술평론가에게 문은희의 수묵 누드가 세계 제일이라고 말한 사람도 김기창 선생이었다. 그는 제자 문은희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홍대 시절 아이 어머니로서 열심히 공부하는 제자로서 인상 깊다. 신수회 입회하여 20여 년간 그의 작품을 주시해왔다. 나는 가끔 수묵 누드 작업을 하는 화실에 놀러갔으며 격려해 왔다. 89년 일본서 성공적인 전시를 마치고 돌아온 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이번에 조선 화랑에서 전시를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앞으로 국제적으로 진출하여 우리나라를 빛내기 바란다."

운보 김기창의 문은희 평
 운보 김기창의 문은희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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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화랑 전시는 1991년 8월 29일부터 9월 4일까지 '소원 문은희전'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이 전시는 문은희 미술 인생의 중간 결산쯤 된다고 보면 좋겠다. 그것은 대학교 시절의 작품부터 70년대 산수, 추상, 정물, 80년대 감, 섬, 수묵 누드 작품까지 전시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그림 외에 도자기도 전시되었다. 

'문은희의 수묵 나부 소동'을 쓴 우사미 쇼고

'문은희의 수묵 나부소동'을 쓴 우사미 쇼고의 글
 '문은희의 수묵 나부소동'을 쓴 우사미 쇼고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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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미 쇼고는 개인적으로 김기창 화백과 친구다. 그는 김기창 화백의 화구를 일본에서 보내주는 등 적극적으로 운보를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문은희의 수묵 누드화 일본 전시를 성사시켜 문은희를 유명하게 만든 것도 그였다. 더 나가 그는 아트 매거진(Art Magazine) 1989년 4월호 "마화인 야화(魔畵人 夜話)"란에 '문은희의 수묵 나부 소동'을 실어 일본에 문은희의 예술인생을 자세히 소개했다.

문은희는 한국화단의 거성인 운보 선생의 제자다. 그 동안 문은희는 감 작가로 유명했다. 매년 가을 도쿄도미술관에서 열리는 '도쿄전'에 단독전시실을 마련해 일본에 알려졌다. 서양화에는 나부 명작이 많지만, 동양화에는 거의 없다. 현재 작품 한 점에 수십만 엔을 받지만, 고흐의 해바라기처럼 일억 엔을 받을 날이 올 거다. 뉴욕이나 파리에서 전시회를 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다.

우사미 쇼고
 우사미 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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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미 선생은 1916년생으로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전력왕 마츠나가(松永安左)의 문하에서 활동했다. 재계의 사정에 밝아 전후에는 경제와 경제인에 대한 책을 썼다. 재계를 떠난 후에는 평소 관심을 가졌던 미술계 일을 시작했다. <일본화단 이면사> 등의 저서가 있고, 도쿄전 운영위원 겸 감사를 지냈다. 그리고 창작화가협회 이사로 활동했다.

문은희 그림을 알아준 시인 천상병

문은희가 그린 천상병 시인
 문은희가 그린 천상병 시인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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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병은 문은희와 비슷한 연배로, '천상의 나부'라는 시를 통해 문은희의 수묵 누드를 문학으로 승화시킨 바 있다. 그는 시뿐 아니라 짧은 시평을 통해 문은희의 대성 가능성을 예언하기도 했다. 그의 글을 보면 시인의 느낌이 평론가의 느낌보다 정확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은희 화가는 여인의 나체화를 잘도 그린다. 나체화는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문은희 화가는 어김없이 그렸다. 여인의 육체는 신비하다. 그것을 몇 안 되는 선으로 구상하니 우리는 잠잠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문은희 화가의 여인 나체화는 다들 곱고도 곱다. 인간은, 여성은 예술품이라는 인상이 강렬하다. 문은희 화가의 화업은 앞으로 대성할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노력도 많이 들 것이라 믿는다. 문은희 화가의 미술 풍토가 대성하여 우리나라에 이름을 날릴 것을 나는 굳게 믿는다."

이 시평은 1987년 3월 발행된 <소원 문은희 크로키집>에 실려 있다. 그 천상병 시인이 1993년 4월 세상을 떠났다. 그 사이 문은희의 일본 전시 소식을 들었고, 프랑스 전시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천 시인의 문은희 평을 듣지 못했다. 그가 살았다면 아마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에 이름을 날릴 것이라는 시평을 썼을 것이다. 문은희와 천상병이 만났던 귀천다방은 지금 천상병 시인의 처조카인 목영선이 운영하고 있다.   

그림만 보면 화제가 절로, 연민 이가원 선생

문은희가 그리고 이가원이 글씨를 쓴 연민 이가원 초상
 문은희가 그리고 이가원이 글씨를 쓴 연민 이가원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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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이가원 선생은 한문학자다. 연민이 문은희 전시회를 찾은 때는 연세대학교 교수 시절이다. 그는 전공이 한문학이지만 국문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진정한 인문학자였다. 문은희는 1970년대 도자기 작업을 하면서 이가원 선생과 친교를 가지게 되었다. 이가원 선생이 도자기에 관심이 많아 수광도요에서 아틀리에에 작품이 도착하면 문은희 도자기와 선생의 글씨를 교환하기도 했다.

이가원 선생은 1975년 문은희의 신세계 개인전에 참석해 개막테이프를 끊을 정도로 가까웠다. 문은희가 80년대 들어 수묵 누드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는 작품에 화제를 직접 써주기도 했다. 연민의 화제가 들어간 그림은 여러 편 있다. 산수, 감, 도자기 그림 등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문은희 그림, 이가원 화제의 수묵 누드
 문은희 그림, 이가원 화제의 수묵 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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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辛未)에 문은희가 그린 수묵 누드에 연민 선생은 다음과 같은 화제를 써주었다. 이 글은 소동파의 시문에서 인용한 것이다. 옷을 벗으면 다 똑같은데,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을 차별하는 인간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문구 같다.

위로는 옥황대제께 공손히 절하기도 하고 上揖玉皇大帝
아래로는 비천한 거지아이도 불쌍히 여긴다. 下憐卑田乞兒

연민 이가원이 쓴 화암화실
 연민 이가원이 쓴 화암화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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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甲戌) 문은희가 충주호변 화암리로 화실을 옮기자, 연민 선생은 화암화실(花巖畫室)이라는 편액을 써주었다. 연민과 소원의 교유 흔적은 그림뿐만 아니라 화실 곳곳에 남아 있다. 연민의 글 중 문은희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마아철저(磨我鐵杵)'라는 서예다. '나의 쇠공이를 간다'는 뜻이다. 쇠공이를 갈아 바늘을 만들 정도로 끊임없이 정진하라는 당부처럼 들린다.

반대로 연민 이가원 선생에게 간 문은희의 작품은 지금 단국대학교 연민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2000년에 세상을 떠난 연민의 묘는 현재 문은희 화백이 살고 있는 충주시 동량면에서 멀지 않은 엄정면에 있다. 이곳 충주시 엄정면에 묘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충주의 거유(巨儒)였던 이호창(李鎬昌) 선생과의 교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연민의 고향은 안동시 도산면이다.

그림을 좋아한 구상 시인과 성천 유달영 선생

전시장을 찾은 구상 시인과 유달영 선생
 전시장을 찾은 구상 시인과 유달영 선생
ⓒ 문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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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 시인과 유달영 선생도 문은희의 후원자다. 구상 선생은 문은희의 일본 전시 때 전시회장을 찾아주었고, 동료 시인 최화국으로 하여금 <국민일보>에 전시평을 쓰도록 했다. 1991년에는 조선일보미술관의 소원문은희전을 찾아 축하해 주었다. 구상 시인은 역사와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성찰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절망과 어둠을 형이상학적으로 승화시키는 시를 썼다.

유달영 선생은 농학자이면서 문학과 예술을 좋아하는 인문학자였다. 그는 문은희의 전시가 있을 때면 가장 먼저 전시회장을 찾아 축하해주었다. 그는 또 월전 장우성 화백과도 아주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동양화에 대한 조예도 깊은 편이었다. 그는 인간의 삶과 관련한 수필집도 여러 권 냈다. 구상 시인과 유달영 선생은 2004년 세상을 떠났다.


태그:#운보 김기창, #우사미 쇼고, #천상병, #연민 이가원, #구상, 유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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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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