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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안내가 왔다. 8월 18일은 '일본문화의 날(Japanese Cultural Day)'이니 아이들에게 일본 국기를 상징하는 빨간색과 흰색 옷을 입혀 보내도 된다고. (자료사진)
 며칠 전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안내가 왔다. 8월 18일은 '일본문화의 날(Japanese Cultural Day)'이니 아이들에게 일본 국기를 상징하는 빨간색과 흰색 옷을 입혀 보내도 된다고.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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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안내가 왔다. 8월 18일은 '일본문화의 날(Japanese Cultural Day)'이니 아이들에게 일본 국기를 상징하는 빨간색과 흰색 옷을 입혀 보내도 된다고. 호주 초등학교의 제 2언어는 학교마다 다른데, 아이의 학교는 일본어이다.

'어라, 이게 아닌데…'

소심한 반항으로 교복을 입혀 등교하니 곳곳에 '사쿠라'와 '일본 국기'가 걸어다니고 있다. 꽃무늬가 큼직하게 박힌 기모노를 입고 아이들을 맞이하는 호주 선생님도 있고, 평소 알고 지내던 몇몇 한국 아이들도 빨간색과 흰색 옷으로 맞춤을 하기도 했다.

'내년 광복절엔 날짜가 겹치는 거 아냐?'

해외(호주 멜버른)에 산다는 것은, 한국과는 다른 사건들을 끊임없이 조우하고 해석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위기감이 몰려왔다. 지난 주말에 보았던 영화 <군함도>가 떠올랐다. 나의 '완소남' 소지섭이 전기 고문을 당하며, 이정현이 일본인들 앞에 다리를 쫙 벌리고 누워 나에게 소리를 치는 듯하다. '영어 핑계대며 또 침묵할래?'

'이(말)가 없으면 잇몸(글)으로 산다.'

교장 S에게 이메일을 썼다. 8월 15일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한국의 광복절임을 언급하며, '일본문화의 날' 행사를 다른 달로 옮겨 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인으로서 아들이 일본국기를 상징하는 옷을 입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며, 정서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참 유별나네. 애들 하루 재밌게 노는 걸 갖고 뭘 그렇게 까다롭게 굴어. 아들에게 역사교육은 시키기나 하면서 이런 불만을 제기하는 거야?"

내가 교장에게 이메일을 보냈다는 소식을 들은, 같은 학교에 아이를 보내는 한국 엄마가 말했다.

앞으론 더 유별나게 내 감정을 지키며 살아야겠다
교장 S에게 이메일을 썼다. 8월 15일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한국의 광복절임을 언급하며, '일본문화의 날' 행사를 다른 달로 옮겨 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인으로서 아들이 일본국기를 상징하는 옷을 입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며, 정서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교장 S에게 이메일을 썼다. 8월 15일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한국의 광복절임을 언급하며, '일본문화의 날' 행사를 다른 달로 옮겨 줄 것을 요청했다. 한국인으로서 아들이 일본국기를 상징하는 옷을 입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며, 정서적으로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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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별나다', '까다롭다' 한국에서 직장생활 할때도 수시로 듣던 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왜 까다롭고 유별난 일이 되는지를 난 잘 알지 못한다. 한국과 일본 국적의 아이들이 모여있는 학교다. 교장이 양국간의 역사적 관계와 그 역사가 아직도 현재 진행형임을 알았다면 올해의 행사는 재고되었을 것이다.

교장에게 감정의 불편함을 알리기 위해 5살짜리에게 한일간의 역사교육을 먼저 시켜야만 하고, 아이가 재밌기만 하다면 엄마의 감정은 자동으로 '문제없음'으로 변하는 것인가. 감정표현에도 자격이 필요한가.

가끔 현지인들과 용무가 있어 대화를 하고 온 날엔 부아가 치밀어 오를때가 있었다. 그들이 대화의 끝에 달고 사는 "Are you happy with that(만족하지)?"란 질문에 맘에도 없는 "Yes" 를 입에 달고 살았다. "No" 다음의 언쟁을 이어갈 자신이 없어서 미소를 띠는 비겁함을 택했다.

영어의 공포는 나의 정신과 행동반경을 잠식해 거침없이 나를 소심하고 조용한 사람으로 몰아갔다. 그런 날엔 어김없이 잠을 못 이루고 뒤척였다. '내 감정을 온전히 방어하지 못했다'는 비참함 속에서.

교장에게 메일 한번 보내 보니 근거없는 자신감은 하늘을 찌른다. 최소한 호주인들은 나를 '종북좌빨', '빨갱이'라 부르진 않겠지, 앞으론 더 유별나게 내 감정을 지키며 살아야지.



태그:#멜버른의 광복절, #군함도, #종북좌빨, #빨갱이, #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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