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부산,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결승전 못지않은 명승부였다. 아쉽게도 승리를 챙기지는 못했지만, 한국 농구의 저력을 보여주며 밤잠을 설친 농구팬들을 흡족하게 했다.

허재 감독이 이끄는 남자 농구 대표팀이 20일 새벽 3시(이하 한국 시각)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열린 '2017 FIBA 아시아컵' 준결승 이란과 경기에서 81-87로 아쉽게 패했다. 이로써 우리 대표팀은 준결승전에서 호주에 79-106으로 대패한 뉴질랜드와 다시 만나 3, 4위전을 치르게 됐다.

출발은 최악이었다. 우리 선수들은 218cm의 장신 하메드 하다디의 존재에 위축되면서, 몸이 굳었다. 김종규의 공격 리바운드와 이종현이 하다디의 골밑슛을 블록하며 기세를 올리는 듯 보였지만, 아니었다. 골밑이 아닌 3점슛 라인으로 나와 공격을 진두지휘하는 하다디,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외곽슛 기회를 만드는 이란을 막지 못했다. 점수는 3-18까지 벌어졌고, 1쿼터 초반에 승부가 갈리는 듯 보였다.

이때 하다디의 높이에 주눅 들지 않는 사내가 등장했다. 울산 모비스 유재학 감독의 애제자 전준범이었다. 전준범은 코트에 들어서자마자 과감한 3점슛을 성공시키며, 6-20으로 따라붙었다. 1쿼터 종료 1분 14초를 남긴 상황에서는 3점슛 성공과 상대의 반칙까지 얻어내며, 4점 플레이를 완성했다. 13-30. 점수 차가 크게 벌어졌던 1쿼터였지만, 전준범의 3점슛 3방 덕분에 희망이 생겼다.

최준용의 3점슛으로 기분 좋은 출발을 알린 2쿼터. 한국 농구의 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준범이 또다시 3점슛을 성공시켰고, 오세근의 미들슛이 폭발했다. 우리는 2쿼터 시작 2분 30초간 이란을 무득점으로 묶었고, 10점을 몰아넣으며 단숨에 7점 차까지 점수를 좁혔다. 잠시 코트를 떠났던 하다디가 재투입됐지만,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하다디는 심판 판정에 예민한 모습을 보이며 테크니컬 파울을 범했고, 연속된 턴오버로 한국의 기를 살려줬다.

이승현이 믿을 수 없는 힘을 자랑하며, 하다디의 골밑 공략을 완벽하게 틀어막았다. 이란 가드진 봉쇄에 나선 최준용의 순간적인 도움 수비도 하다디를 막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이승현의 3점슛까지 터지면서, 점수는 29-31, 2점 차까지 좁혀졌다. 아쉽게도 이란의 스피드가 살아나며 33-39로 2쿼터를 마무리했지만,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3쿼터, 오세근의 점프슛으로 기분 좋은 출발을 알렸고, 전준범의 원맨 속공이 분위기를 살렸다. 전준범은 하다디가 버티는 골밑에서도 과감한 레이업을 시도했고, 또다시 3점슛을 터뜨리며, 믿을 수 없는 활약을 이어갔다.

3쿼터 종료 3분 5초가 남은 상황, 잠잠하던 이정현이 3점슛을 터뜨리며 동점이 됐다. 허웅의 3점슛까지 터지면서, 54-51, 첫 역전에도 성공했다. 허웅의 3점슛이 다시 한 번 림을 갈랐고, 최준용과 이정현의 골밑 돌파가 성공하면서, 61-57, 리드를 잡은 채 3쿼터를 마무리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선수들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넘쳤고, 한국 농구 역사의 또 하나의 기적이 쓰이는 듯 보였다.

그러나 4쿼터 출발은 불안했다. 하다디를 끊임없이 공략하던 오세근이 오펜스 파울을 범하며 파울 트러블에 걸렸다. 경기 종료 7분 10초가 남은 상황, 최준용이 3점슛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하다디의 반칙을 이끌어내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하다디도 파울 트러블에 걸리며, 움직임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시소게임이 이어졌다. 이정현이 이종현의 스크린을 받아 3점슛을 성공시켰고, 반칙까지 얻어내며 4점 플레이를 완성했다. 이란은 사자드 마사에키의 골밑, 모함마드 잠시디의 3점슛으로 재역전에 성공했다. 이날 야투 성공이 하나도 없었던 하다디가 골밑에서 힘을 발휘하며, 79-74로 점수 차를 벌렸다.

우리 대표팀은 포기하지 않았다. 허웅이 경기 종료 47초 전, 자유투 2개를 깔끔하게 성공하면서 78-81,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하다디의 패스를 받은 카제미가 결정적인 골밑슛을 성공시켰고, 이정현이 5초 반칙을 범하며 아쉽게 경기를 마무리했다.

81-87. 목표는 이루지 못했지만, 정말 잘 싸웠다. 이전 대표팀이었다면, 1쿼터에 승부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대표팀은 특유의 빠른 농구와 폭발적인 외곽슛을 앞세워 이란을 몰아붙였고, 역전에도 성공했다. 막판까지 승부의 향방을 알 수 없게 만들면서, 명승부를 만들어냈다.

특히, 전준범과 오세근을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강심장' 전준범이 있었기에 시소게임이 가능했다. 1쿼터에 코트를 밟은 선수 중 유일하게 하다디의 높이에 위축되지 않았고, 백발백중의 외곽슛 능력을 뽐내며 분위기 반전에 앞장섰다. 수비에서도 몸을 아끼지 않는 투혼을 선보이며, 국가를 대표하는 슈터로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오세근은 서장훈과 김주성을 잇는 한국 농구의 보물임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발이 느린 하다디를 점프슛과 스피드를 앞세워 쉼 없이 공략했고, 체력을 떨어뜨리는 데 성공했다. 오세근이 21점 5리바운드 3어시스트로 맹활약한 반면, 하다디는 7점에 그쳤다. 하다디의 높이(14리바운드 8어시스트)를 완벽하게 봉쇄하지는 못했지만, 오세근의 맹활약은 NBA 출신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120kg의 하다디를 힘으로 압도했던 이승현도 박수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승현은 하다디의 골밑 투입을 힘으로 막아냈고, 리바운드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골밑의 중심을 잡아줬다. 가드로 새롭게 태어난 최준용도 공수 양면에서 좋은 활약상을 남겼다. 과감한 골밑 돌파와 패스로 공격의 활로를 열었고, 순간적인 도움 수비로 하다디 봉쇄에 힘을 더했다.

또다시 이란의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지만, 고개를 숙일 필요 없다. 밤잠을 설치며 경기를 지켜본 이들이라면, 허재호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을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원정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다'라는 희망을 얻었다. 무엇보다 양동근과 김주성, 조성민, 문태종 등 대표팀을 오랫동안 이끌어온 선수들을 떠올리지 않게 만들면서, 세대교체에도 성공했다. (대표팀 평균 연령 26세)

다시 시작이다. 대표팀은 21일 오전 0시 30분 뉴질랜드와 3, 4위전을 치른다. 이후에는 오는 11월부터 시작되는 2019 FIBA 농구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을 준비한다. 2019년 예선부터는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경기가 치러지면서, 농구 인기 부활이 기대된다.

기대치를 뛰어넘는 선전으로 한국 농구의 힘을 보여준 허재호. 대표팀의 앞날에 행운이 가득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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