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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다크 가는 길, 끝없이 드넓게 펼쳐진 팡 평원(모레이 평원. 해발 4630미터)
 라다크 가는 길, 끝없이 드넓게 펼쳐진 팡 평원(모레이 평원. 해발 4630미터)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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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인도 마날리에서 지프를 함께 타고 온 까르마 가족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올라탔다. 지프를 타고 10시간 넘게 달려와 해발 4,500고지의 히말라야에서 버스로 갈아 탈 것이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버스에 오르자 한 청년이 배낭을 받아 준다. 버스 안에는 열댓 명의 승객이 전부다.

맨 뒷자리는 텅 비어 있어 두 다리를 쭉 뻗고 적당히 누울 수도 있다. 비좁은 지프를 타고 죄수처럼 바른 자세로 11시간 가까이 달려온 것을 생각하면 천국이다. 하지만 여전히 목적지인 라다크 레는 멀리에 있다. 마날리에서 사추까지 222킬로미터를 달려왔으니(마날리에서 레까지의 총거리가 473킬로미터) 반도 못 온 셈이다. 배낭을 받아 준 청년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 묻는다. 한국 사람이라 했더니 자신은 일본인이라며 반긴다.

"마날리에서 버스를 탔나요?"
"아니요. 이곳 사추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일본 사람이 무슨 일을?"
"사촌 형이 자동차 연료를 팔고 있는데 거기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사추에 작은 주유소가 있는데 자신의 사촌 형이 티베트 사람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스물 살 일본인 청년 겐또, 그는 라다크에서 부모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한다. 아버지는 스쿨버스 운전사이고 엄마는 인도 사람과 함께 제과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간단한 영어로 나이며 가족사를 주고받다가 내가 뜬금없이 큰아들 또래인 그에게 물었다.

"나는 아들과 친구처럼 지냅니다. 친구라고 불러도 될까요?"
"그럼요. 좋지요. 선생님은 나의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지만 여행지에서는 모두가 친구입니다."
"맞는 말이야 친구!"

여행지에서의 친구는 나이와 상관없이 서로를 존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부모님 따라 라다크에서 2년 째 생활하고 있다는 그 역시 나처럼 스스럼없이 "헤이 프렌드"라고 불렀다. 라다크 가는 버스 안에서는 모두가 친구다. 몇몇 인도 청년들이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신나는 인도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한다. 나의 두 아들이 이곳을 여행하면 좋겠다는 등 젊은 일본인 친구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영어 밑천이 떨어질 무렵 잠시 잠에 들었다.

머리가 어질어질 하고 속이 울렁거려 눈을 떴다. 버스는 여전히 주변에 나무 한 포기는 물론이고 풀 한포기 보이지 않는 황무지의 설산을 고불고불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노래 소리가 들려오지 않고 있다. 추위에 잔뜩 웅크린 승객들이 나처럼 약간의 고산증에 시달리고 있는 듯 했다.

라다크로 향하는 버스 안. ‘라추랑라(해발 5065미터)를 넘어서면서 추위에 잔뜩 웅크린 승객들이 고산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라다크로 향하는 버스 안. ‘라추랑라(해발 5065미터)를 넘어서면서 추위에 잔뜩 웅크린 승객들이 고산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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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자리에 앉아 있는 인도 청년이 아까부터 일어섰다가 다시 누웠다가 머리를 감싸 안고 어지럼증을 심하게 호소한다.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인도청년에게 주변 사람들이 간단한 지압이며 몇 가지 응급 처방을 해 보지만 소용이 없다. 나는 배낭을 풀어 다이아목스를 꺼내 남인도에서 왔다는 그 인도 청년에게 물과 함께 내밀었다.

"고산증에 좋다는 다이아 목스입니다."
"머리가 너무 아파요. 숨도 쉬기 힘들고..."
"말하면 힘드니까 말하지 마세요. 호흡을 최대한 천천히 해보세요."
"고맙습니다."
"나도 어제 저녁에 이거 먹었습니다. 걱정 말고 먹어요."
"고맙습니다."

청년은 고산증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양잿물이라도 마시겠다는 기세로 다이아목스를 목 안으로 털어 넣었다. 하지만 장담할 수 없었다. 다이아목스는 고산지대로 향하기 하루 전에 미리 복용해야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거기다가 내가 지니고 있던 다이아 목스는 4개월 전쯤 델리에서 구입하여 46도에 이르는 무더위를 보낸 것이었기에 인도 청년에게 효과가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가야 할 길이 멀었기에 다이아목스의 효과를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고산증을 버틸 수 있는 체질 덕분인지 아니면 어제 저녁 복용한 다이아목스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고산증에 크게 시달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4천고지에서 느꼈던 어지럼증과 호흡 곤란 현상이 사뭇 달라 겐또에게 물었다.

"여기가 해발 몇 미터나 되나요?"
"이곳은 라추랑라 인데 5천고지가 넘습니다."
"아, 그래서 어지럼증이 심해졌군요."

"그럴 겁니다. 저는 일주일에 서너 차례 오가는 길이라서 아무렇지 않지만 여행객들에게는 힘든 길이 될 겁니다. 그래서 여행객들 중에는 고산증 적응을 위해 사추의 텐트촌에서 하루 밤을 묵어가기도 합니다.
"이제 내리막길로 들어서면 괜찮겠죠?"
"아닙니다. 이 고개를 넘으면 더 높은 고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라다크 가는 길. 곳곳에 히말라야 설산이 녹아내린 회색빛 강물이 흐르고 있다.
 라다크 가는 길. 곳곳에 히말라야 설산이 녹아내린 회색빛 강물이 흐르고 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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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마날리에서 라다크로 가려면 '로탕라(해발 3980미터)' '바라라차라(해발 4890미터)' '라추랑라(해발 5065미터)' '타그랑라(해발 5360미터)' 등 4천, 5천고지에 이르는 4개의 험준한 고갯길을 넘어야 한다. 이들 각각의 지명 끝에 붙어 있는 '라'는 우리말로 산마루, 고갯마루를 뜻한다.

라추랑라를 지나면서 두통과 함께 다시 졸음이 쏟아진다. 비몽사몽간에 눈을 떠보니 너른 평원을 달리고 있다. 그냥 평원이 아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드넓다. 눈앞으로 지평선이 보인다. 울퉁불퉁한 산길을 달리던 버스는 고속도로나 다름없는 직선 도로를 내달리고 있다.

"와! 히말라야에 이런 곳이 있다니, 여기가 대체 어디입니까?
"아까 말했던 팡 평원입니다. 재수가 좋으면 야생마들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도 4천 고지가 넘을 텐데, 이곳에 정말 야생마들이 있단 말입니까."
"그럼요. 제가 이곳을 오가며 여러 차례 보았습니다."

히말라야 깊숙한 곳에 자리한 팡 평원(해발 4630미터). 고속도로나 다름없는 도로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히말라야 깊숙한 곳에 자리한 팡 평원(해발 4630미터). 고속도로나 다름없는 도로가 끝없이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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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 평원 저 멀리 산자락 아래 양떼와 야크들이 점으로 찍혀 보인다. 4600고지의 이 불모의 땅에도 유목민들이 살고 있었다.
 팡 평원 저 멀리 산자락 아래 양떼와 야크들이 점으로 찍혀 보인다. 4600고지의 이 불모의 땅에도 유목민들이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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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알게 된 것인데 우리나라 안면도 면적의 드넓은 '팡 평원'(해발 4630미터)은 '모레이 평원'이라고도 부른다. 끝없이 이어진 평원을 달리던 버스가 잠시 멈춰 섰다.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나는 고산증도 잊은 채 버스에 내려 사진기를 꺼내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눈 씻고 찾아 봐도 야생마는 보이지 않고 멀리 히말라야 산자락 아래 흰 점과 검은 점들이 움직이고 있다. 흰 점은 양떼들이며 검은 점으로 보이는 것은 야크들이다. 이곳 불모의 땅, 팡 평원에도 티베트 유목민들이 양과 염소, 야크를 목축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운전기사를 비롯해 몇몇 승객들이 도로가에서 바지를 까 내리고 볼일을 보고나자 버스는 곧장 출발했다. 아쉬웠다. 야영 장비만 있었다면 저 산 아래 유목민들의 삶에 끼어들어 몇날 며칠을 보냈을 것이었다. 갈기를 휘날리며 저 드넓은 평원을 자유롭게 달리는 야생마들을 맘껏 지켜보며.

창 평원을 벗어난 버스는 다시 험준한 산길을 내달린다. 고산증에 시달리던 인도청년은 죽은 듯 누워 있다. 길게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어 가며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을 벌이고 있을 것이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타그랑라(Taglangla 해발 5360미터)에도 여지없이 불탑과 함께 티베트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는 오색 깃발, ‘다르촉’이 내걸려 있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타그랑라(Taglangla 해발 5360미터)에도 여지없이 불탑과 함께 티베트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는 오색 깃발, ‘다르촉’이 내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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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7월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5천고지의 날씨는 사진기를 꺼내든 손이 시릴 정도로 추웠고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호흡이 가빠졌다.
 계절은 7월로 접어들고 있었지만 5천고지의 날씨는 사진기를 꺼내든 손이 시릴 정도로 추웠고 숨쉬기가 곤란할 정도로 호흡이 가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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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 평원에서부터 세 시간 이상 달려 온 것 같다. 부쩍 한기가 느껴져 와 마날리에서 구입한 붉은 숄을 덮고 좌석에 비스듬히 누웠다. 얼굴이 부어오르는 느낌과 함께 고갯 마루에서 다시 버스가 멈춰 섰다.

"여기가 그 유명한 타그랑라입니다."

버스가 멈춰 선 곳은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고갯마루, 해발 5360미터의 타그랑라(Taglangla)였다. 도로 주변이 온통 눈으로 덮여 있을 줄 알았는데 여름이라서 그런지 약간씩 눈 더미가 보일뿐 말짱했다. 몇몇 사람들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대부분 승객들은 고산증에 시달려가며 잠들어 있거나 버스 안에서 꼼짝 않고 차장을 통해 주변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에도 여지없이 불탑과 함께 티베트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는 오색 깃발, '다르촉'이 내걸려 있었다.

나는 사진기를 꺼내들고 히말라야 5천고지의 주변 풍경을 담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옮겨 다녔다. 눈이 쌓여 있지는 않았지만 히말라야 5천고지의 바람은 사진기를 꺼내 든 손을 시리게 한다. 거기다가 10여 미터에 불과한 걸음걸이에도 50미터를 힘차게 달리고 난 상태처럼 숨이 목구멍으로 차올랐다.  일본 청년이 인도 담배, 비리를 꺼내 물고 있는 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괜찮습니까?"
"숨쉬기가 힘드네요."
"천천히 걸으시고요. 이제 내리막길로 들어서면 괜찮아질 것입니다,"

버스는 다시 라다크 레를 향해 내리막길을 달렸고 호흡곤란 현상이 조금씩 사라졌다.
 버스는 다시 라다크 레를 향해 내리막길을 달렸고 호흡곤란 현상이 조금씩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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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장의 사진을 담아 낸 것으로 만족하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저만치 내리막길이 보인다. 버스가 내리막길을 따라 한 시간쯤 달릴 무렵 두통과 호흡 곤란 현상이 조금씩 사라져갔고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히말라야의 험준한 산들은 어둠 속으로 하나 둘 묻혀가기 시작했다.

어둠 속으로 내달리기 시작한 버스 안은 마치 인도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흥겨운 노래판이 벌어졌다.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불러가며 팔을 높이 치켜세워 어깨춤까지 추고 있는 몇몇 인도 청년들은 운전기사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노래를 요구하기도 했다. 고산증으로 앞좌석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청년조차 이제 좀 살만한지 고개를 들고 멀뚱멀뚱 어둠을 둟고 달리는 버스 앞 유리창에 시선을 두고 있다. 흥겨운 노래 소리를 듣다가 깜박 잠들었던 나를 젊은 일본인 친구가 흔들어 깨웠다.

"헤이 친구, 나는 여기서 내립니다."
"아, 다 왔나요?"
"아닙니다. 나만 내립니다. 당신은 이 버스 종점까지 가야 합니다."

밤 10시가 넘어서고 있었고 불빛이 흘러나오는 작은 마을에서 버스가 멈춰 섰다. 일본인 청년 겐또가 '행운을 빈다'는 인사말을 남겨놓고 몇몇 인도 사람들과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는 다시 혼잡한 도시를 관통해 버스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레'의 터미널에 도착했다. 밤 11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마날리에서 부터 라다크 레 까지 475킬로미터에 이르는 고불고불한 산길을 따라 지프와 버스를 이용해 4천고지, 5천고지의 히말라야 산맥을 넘고 넘어 장장 22시간을 내달려 도착한 레는 밤 11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무거운 배낭을 들쳐 메고 버스에 내렸지만 하룻밤을 어디서 묵어야 할지,레에 대한 여행 정보가 전혀 없었다.

하루 종일 바나나 몇 개와 라면 한 그릇을 먹은 것이 전부였기에 배가 무척 고팠다. 하지만 먼저 숙소부터 찾아야 했다. 버스 기사에게 게스트하우스가 몰려 있는 곳을 알려달라고 하자 손짓을 한다. 버스기사가 손으로 가리킨 곳으로 무작정 걸었다. 두 갈래의 길이 나왔다. 어디로 가야 할까 망설이다가 흐릿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길을 택했는데 저만치 건물 안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 나와 길을 막았다.

"멈춰요."

길을 묻기 위해 앞으로 다가갔더니 제복 입은 사내가 앞에 총 자세를 하고 다시 명령조로 말했다.

"멈춰요! 가까이 오지 마시오."
"아, 죄송합니다." 
"돌아가세요."
"게스트 하우스로 가려는데 이 길이 아닌 모양입니다."
"저 쪽으로 가세요."

갑자기 소총을 들이대는 바람에 당황스러워 총 든 사내가 경찰인지 군인인지 생각할 짬도 없었다. 또한 '저쪽으로 가라'했지만 그 저쪽이 어느 쪽인지 알수 없었다.  저 쪽이 어느 쪽인지 되묻다가는 낭패를 볼것 같아 총든 사내를 등지고 본래 왔던 두 갈래 길로 빠져 나왔다. 그 또다른 길로 들어서자 막다른 공터가 나왔다. 공터 주변에는 불빛 없는 허름한 집들이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그 움막집들 사이로 작은 골목이 어둠 속에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밤 11시가 넘은 이 시간에 차마 그 골목길을 통과할 자신이 없었다. 이번에는 칼을 든 누군가 툭 튀어 나올지 알수 없는 저 어둔 골목길을 용감무쌍하게 통과한들 게스트하우스 지역을 만날 보장도 없었다.

순수한 마음자리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라다크 사람들을 만날수 있을 거라는 설레임으로 도착한 신비의 땅, 라다크. 당장 숙소를 잡아야 하는데 두 다리가 후들거릴 정도로 배는 고프고, 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태그:#라다크 가는 길, #평고원(해발 4630), #타그랑라 (해발5360)), #라다크 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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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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