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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올해 2월까지 근무하던 의정부여자중학교에서 내부 감사를 요청했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 해고 이후 복직을 위한 법적투쟁을 이어가면서 학교 내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며 만난 책과 사람을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글을 적는다.-기자 말

학교 비정규직 강사의 정규직화 문제에 이어 예비 교사들의 TO 증원 요구가 연일 화제다. 교원 TO 급감에 대하여 현직 교사와 예비 교사들은 OECD 수준으로 교사 수요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와 함께 비정규직 강사와 기간제 교사의 정규직화에는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학교에서 근무하고 싶은 예비교사들이 이미 학교에서 근무하고 있는 비정규직 교사와 강사의 고용 안정에 반대하는 모습은 의자뺏기 싸움을 연상시킨다.

학교에서 일할 이들의 고용과 관련된 논쟁에서 우리 사회의 교육이 나아가야할 방향과 교육을 담당할 이들이 지향해야 하는 가치에 대한 논의는 자취를 감췄다. '임용절벽'과 '해고'라는 벼랑 끝에 선 이들의 불안만이 감돌고 있다.

경쟁과 각개약진만이 남은 학교에서 과연 교육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왜 우리는 타인을 배제하고 경쟁으로 돌진하는 방식을 '공정한' 방식이라고 믿게 된 걸까?

이런 질문을 품고 현재 우리 사회의 '비정상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발해 온 젊은 사회학자, 지난 11일 오찬호씨와 마주 앉았다.

자기 계발 담론과 능력주의를 내면화한 채 괴물이 되어 버린 청년 세대를 다룬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2013), 취업사관학교가 된 대학의 실태를 드러낸 <진격의 대학교>(2015), 그리고 공무원 시험이 청년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의 유일한 희망이 된 현실을 그린 <대통령을 꿈꾸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2016).

이 세 권의 책을 넘나들며 학교를 둘러싼 논쟁을 넘어 청년세대와 사회의 변화에 대해 그와 대화를 나눴다.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다

사회학자 오찬호씨
 사회학자 오찬호씨
ⓒ 지유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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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도에 출간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는 기존의 20대 담론과 달리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청년 세대의 모습을 다뤄 많은 이들에게 울림을 주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독자 피드백이 무엇인가?
"이 책의 내용이 너무나 일상적인 이야기여서 큰 감흥이 남지 않는다는 반응이 오히려 더 기분 좋았다. 자신의 머릿속에 망원경을 들여다 놓은 것 같다는 청년들의 반응을 보면 현실을 엉망으로 분석한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청년들에게 책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 아닌가?
"그 책은 청년 세대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청년 세대를 구체적인 독자로 설정하고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는 청년들의 현실과 그들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특정한 대상에게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내용을 쓴 적이 없었다. 사회학이라는 학문의 역할은 해결방안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가려져있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책을 통해 그 일을 했을 뿐이다.

모두가 누군가를 멸시하고 누군가에게 멸시받는다. 그래서 '보란 듯이 갚아주겠다'는 자기계발에 몰입한다. 그러나 이건 늘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순환고리에 갇힌다. 고생하는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본인이 쌓은 기반을 지키려고 시간관리라는 차별화 도구로써 학력을 위계화시키는 생존전략에 매달리지만, 이것으로 악전고투의 현실을 탈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는 이십대의 자기긍정은 결국 '덫'이요 '늪'일 뿐이다. 실패하면 끝장인 세상에서 이십대들은 그렇게 차갑게 변한다.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저자가 책에서 묘사한 것처럼 실업문제에 짓눌리는 청년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요구에 형평성을 이유로 반발하는 모습은 현실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학교 비정규직 강사들의 정규직화에 대한 예비교사들의 반대 또한 그러한 현상의 일부이다.

장기화되고 있는 청년 실업과 한국의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공무원 시험 경쟁률이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에서 절대 다수의 사범대생들은 임용고시를 통과하지 못하고, 최근 급감한 초등 교원 TO로 교대생들도 안정적으로 학교에서 근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학교 비정규직의 현실은 사대, 교대 졸업생의 현실이자 임용고시생들의 현실과 그리 멀지 않아 보임에도, 많은 임고생들이 비정규직 강사의 정규직화에 격렬히 반대한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비정규직은 '무능력하다'는 편견과 임용고시라는 선발체제의 '공정성'에 대한 강한 믿음이 흐르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저자의 의견을 물었다.

-학교 비정규직 강사들과 현직교사뿐만 아니라 예비교사들 모두 학교의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인데 서로 적으로 여겨지는 상황이 답답하다. 학교 안에서도 비정규직과 정규직이라는 신분 차이로 인해 교육이나 학교 민주주의에 대한 본질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일이 쉽지 않다.
"학교 내에 존재하는 위계의 문제는 사실 다른 전문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법조계에서도 사시 출신과 로스쿨 출신 사이를 나누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이는 위계를 구분하는 이 사회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럴 때일수록 교사의 전문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과연 교사의 전문성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현재의 교원 양성 체제와 임용고시가 그것을 담보해주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동료 선생님들은 '10년은 수업해야 수업에 대한 감이 온다'는 말을 하곤 했다. 단순히 교과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실제로 배움이 일어나게끔 내용을 구조화하고 수업을 구성하며 아이들에 대한 안목을 얻는 것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뜻이다. 책 속의 문자로 적힌 교육 이론들이 담아내기엔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너무나 입체적이고 각양각색이었다.

교사에게 필요한 능력과 덕목은 무엇인지, 그것들을 키워내고 확인해낼 수 있는 평가방법은 무엇인지 묻는 일은 질문 자체에서 복잡하고 다양한 답의 가능성을 안고 있지만, 그에 비해 성적순으로 교사가 될 이와 그렇지 않은 이를 구분하는 일은 훨씬 간단하고 쉽다.

그리고 그 쉬운 방법은 교대, 사대 내에서, 그리고 학교 현장에서 학교 주체들 사이의 위계를 만들어내는 기준으로 작동한다. 그 기준으로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이들을 차별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걸까. 그리고 과연 그 기준이 임용고시의 높은 경쟁률로 인해 학교에서 일하지 못하는 수많은 예비교사들에게도 유리한 기준일까.

-비정규직 강사들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예비 교사들의 주장을 들여다보면 임용고시가 능력을 증명하는 '가장 공정한 시험'이라는 믿음이 깔려있다. 정부의 교원 수급 정책 실패로 인해 교대, 사대를 졸업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안정적으로 일할 가능성이 갈수록 낮아지고 있는데 시험의 '공정성'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선발 체제를 수호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학교 안에는 임용고시를 통과하지 않고도 일하고 있는 많은 교사들이 있다. 임용체제가 도입되기 전에 교사를 했던 사람들도 그렇고, 사립학교의 교원들도 그렇다. 공정성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선 그 내면을 잘 들여다봐야 한다.

과연 기회는 평등한가. 교대를 입학하는 사람들의 사회적 배경이 갈수록 비슷해지고 있다. 성적이 높은 학생들이 교대에 입학하는데, 수능 성적에 부모의 경제적 배경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과연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진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더 나아가 학교 현장을 생각해봤을 때 교사 집단이 균일한 사회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지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가르치는 학생들의 배경은 각양각색인데 교사 집단은 상위 몇 프로의 사람들일 때 그 교사들이 학생들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청년세대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인 점에 대해 책에서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은 자신이 피해자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쉽게 수긍하지만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는 큰 거부감을 느끼는 것 같다. 교대, 사대를 졸업했지만 학교에서 일할 수 없고 다른 직장도 구하기 어려운 학생들이 이 사회의 피해자인 것은 맞지만 그와 동시에 사회의 위계를 재생산하는 가해자일 수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억울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한 건 주로 구조의 일부로서 개인들이 동조하는 것으로도 그 위계를 재생산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였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가해자'라고 하면 극단적인 사례에서의 절대악을 떠올린다. 가해자라고 지목받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심한 이유가 그것이다. 하지만 선악개념을 떠나 개인들은 많은 경우에서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일 수 있고 극단적인 사례가 아닌 일상 속에서 우리는 위계를 재생산하는 데 일조한다.

예를 들어 아동 학대라고 규정된 사건에 대해 우리는 극도로 분노하지만 그 이면을 잘 들여다 보면 그 안에는 우리가 쉽게 '훈육'이나 '체벌'로 규정하는 행위들이 포함되어있다. 아동학대라고 규정하면 폭력이고 훈육이나 체벌로 규정하면 폭력이 아닌 게 아니다. 그 개념들을 일상과 분리하지 말아야 한다.

과거에 공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노골적인 폭력이 사라졌다고 해서 현재 국가에 의한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나 사회에 대한 고민이 사회운동가나 정치가들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결국 일상에서의 감수성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사회학이라는 것도 결국은 우리가 늘 겪는 경험을 개인의 차원을 넘어 재해석하는 것을 돕는 학문이고 인문학적 소양 또한 그 감수성을 높이는 훈련이다. 인문학적 소양을 높이는 일은 단기적으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반복적이고 계속적인 사고 훈련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가 책에서 보여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란 결국 그 사회적 감수성을 가지고 본 세상일 것이다. 내가 타인과, 더 나아가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을 인식하는 일에는 '훈련'이 필요하고, 그 '훈련'을 위해 우리는 학교라는 사회화 기관을 거치며 성장한다. 초중고에 이어 대학교까지 최소 16년. 그 16년 동안 우리는 어떤 훈련을 받은 걸까.

각개약진식 경쟁은 청년문제 해결해주지 않아

대학은 교육 릴레이의 마지막 주자다. 애초의 목적을 잃어버린 경주지만 마지막 주자는 포기하지 않고 결승선을 향해 보란 듯이 진격한다. '무감'을 만들어내고, '영어'를 숭배하고, '돈'만 되면 무엇이든 하고, '비판'을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하는 대학에는 고통을 고통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이는 주술만 가득하다. -오찬호, <진격의 대학교>

청년세대가 자기계발담론과 무한경쟁을 내면화하는 과정의 끝에는 기업화한 대학이 있었다. 대학은 사회 변화에 발맞춘다는 명목으로 빠르게 기업의 요구를 수용하는 취업사관학교가 되었지만, 취업률을 기준으로 한 학과 구조조정, 영어 교육 강조, 상대평가의 일반화 등 급격한 변신에도 불구하고 10년 전에 등장한 취업 3종 세트는 취업 9종 세트로 진화했다. 기업화를 통해 대학이 사실상 학생들의 취업도 학문의 다양성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그는 <진격의 대학교>에서 폭로했다.

-대학이 어떤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이런 질문이 가장 어렵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대학에 대한 인문학적 가치나 교육 철학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인문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대학은 대학에 들어가지 않은 이들보다 대학에 들어간 이들이 좀 더 안정적으로 중산층에 진입할 수 있도록 직무 역량을 키워주는 역할을 언제나 해왔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균형이라고 생각한다. 경영학과 학생들이 기업에 대해 배우는 것에는 문제가 없지만, 지금의 대학에선 단순히 취업률이나 시장성만을 가지고 판단할 수 없는 다른 학과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을 강요한다. 이런 불균형 속에서 비판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학문들은 설 자리가 없고, 대학이 취업 학원이 되어버린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일반 학과와의 차이점이 없지 않지만, 사범대도 이런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범대학이 임용고시 합격률로 학과의 등급을 매기고, 수업 또한 임용고시에 맞춰 진행한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1학년 때부터 일찌감치 시험 준비를 해야 하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과 폭넓은 교양을 쌓는 일은 사치가 된 지 오래다. 졸업 후 임용고시라는 바늘구멍을 뚫어야만 학교에서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적극적으로 사범대학이 임용고시에 맞춰주길 요구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교육의 의미나 교육의 공공성에 대한 고민은 모두 합격 뒤로 미뤄진다.

-현실적으로 대다수의 학생들이 취업을 목적으로 대학에 진학한다. 오로지 취업만이 목적인 이들에게 책에서 주장한 시민 교육이나 대학의 공공성에 대한 고민이 어떻게 가닿을 수 있을까?
"철저히 기업화된 현재 대학의 모습과 그럼에도 대학이 취업조차 담보하지 못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 학생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대학의 공공성에 대한 고민 없이, 취업률로 학교들을 줄 세우고 학과를 통폐합하며 오로지 취업만을 위한 교육을 해왔음에도 취업 경쟁은 더 심해지고 대학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그렇게 변화한 결과를 보자는 거다.

기업에 맞춰 빠르게 변화했지만 청년들의 현실이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았다면 그건 해결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다. 각개약진식의 경쟁은 현재의 청년들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러한 문제점들은 95년도에 대학 진학률이 50%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논의됐어야하는데 이에 대한 고민 없이 시기가 지나버렸다. 현재 대학 진학률이 떨어지고 있는 추세지만 이는 대학을 가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어서가 아니라 대학이 더 이상 취업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률은 지금보다 더 낮아져야한다. 그와 동시에 대학을 꼭 가지 않고 고등학교까지만 다니고도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하다."

취업이라는 목적에 맞춰 변화한 대학이 취업'조차'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깨달음 뒤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이 있을까. 교사양성기관이 임용고시에 맞춰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정교사가 될 가능성은 계속해서 낮아지고, 학교에서 비정규직 교사로 일할 경우 임용고시를 통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쪽짜리 교사' 취급을 받는다.

그 현실을 알기에 더욱이 시험공부에 매진해보지만 모두가 경쟁에 뛰어들 경우 경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은 치열한 경쟁을 버틸만한 자원을 충분히 가진 이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최소한 우리는 이미 '느끼고' 있다. 그가 책을 통해 한 작업은 사람들이 이미 알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는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 일일 것이다.

그나마 따라잡을 수 있을 정도의 불평등 간격 수위를 넘겨버린 사회에서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좋은 사회'를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는다. "위험과 불안이 상존하는 사회에서 개인은 누구나 알아서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그 결과, 민주주의는 '밥 먹고 사는 일'에 비하면 너무나도 하찮은 가치가 되어 버렸다. 이와 비례해 지금은 '밥 먹고 사는 일' 자체에 직면한 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아졌다. 즉, 우리의 '현실론'은 틀렸다.-오찬호, <대통령을 꿈꾸던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책에서 그가 보여준 현실은 암울하다. 그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파편화된 개인들이 하는 선택이 현실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더욱 암울하다. 뭔가 잘못됐다는 건 알지만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막연하고 나 혼자 생각을 달리 먹는다고 세상이 변할지도 의문이다. 이런 고민에 대해 그와 이야기 나누어봤다.

-"헛된 희망에 홀리는 것보다 현실의 절망을 파괴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일관되게 주장해왔다. 하지만 절망을 파괴하기 위해선 현실을 직면해야한다. 사람들이 현실을 직면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지금같이 각자도생의 상황에서는 실패에 대한 온갖 상상력이 작동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쟁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유리한 위치에서 경쟁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다니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이런 선택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경쟁만 계속해서 가속화될 뿐이다. 실패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요구가 필요하다."

-강준만 선생님이 '개천에서 용나는' 모델을 비판하신 것과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것 같다.
"같은 주장이다. 개천의 평범한 사람들이 용이 되지 않고도 개천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들로 현실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귀를 여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개인이 변하지 않으면 구조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청년세대, 기업화된 대학, 공무원 시험 열풍을 다룬 사회학자 오찬호의 저작.
 청년세대, 기업화된 대학, 공무원 시험 열풍을 다룬 사회학자 오찬호의 저작.
ⓒ 윤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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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세 권의 책은 사회가 사라진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자 시장이 아닌, 사회의 복원을 주장하는 책이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의 청년 세대는 IMF이후 신자유주의가 가속화되는 시기에 온전히 십대를 보낸 사람들이다. 우리는 복원해야 할 사회를 경험해 본 적이 없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사회를 복원해야하나.
"지금의 청년보다 윗세대가 시민 교육이나 사회에 대한 별도의 교육을 받으며 살았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합의되었다고 느껴지는 것들,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라든가 '그래도 사람이 먼저지'와 같은 말 속에서 사회를 경험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대는 그게 아니라 모든 상황을 경영학적이고 효율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방법을 배운다. 그런 관점들이 사회를 부수는 것이라면 그 사고방식을 확장하지 않는 것이 사회를 복원하는 방법이다. 어려운 철학이나 개념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의 답변을 듣고 정말로 청년 세대가 사회를 경험해본 적이 없는지 다시 돌이켜본다. 그의 말처럼 굳이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공공의 가치가 합의돼있는 곳, 말뿐이라 하더라도 차별을 노골적으로 옹호하지 않는 공간, 그렇지만 오늘날 계속해서 부서지고 있는 공적인 공간이 없는지 떠올려본다. 나는 타인들과 섞여 공통의 경험을 쌓는 공간 속에 머물러 본 경험이 정말로 없었나.

한참을 고민하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답을 찾는다. 학교. 어린 시절 우리가 경험한 최초의 사회, 학교가 있었다. 그렇다면 사회 안의 작은 사회인 학교가 효율과 경쟁의 논리에 잠식되는 것을 막는 것이 사회를 복원하는 한 방법 아닐까.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과연 기업화된 대학과 임용체제, 장기화된 실업문제 같은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인식 변화만으로 바꿔낼 수 있을까. 구조라는 거대한 장벽을 변화시키는 것보다는 그 구조에 맞춰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더 빠르다.

부당한 차별을 감내하고 있는 비정규직들도, 비정규직 강사의 정규직화에 반대하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고 있는 교대생들도, 교사 TO가 늘지 않는 이상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임고생들도 모두 같은 마음일 것이다. '이게 잘못된 건 알지만, 당장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것밖에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의 시야가 사회에서 개인의 차원으로 좁아진 것도, 개인들에게 경쟁이란 선택지만 남겨진 것도 모두 사회와 구조 변화의 결과이다. 20여 년 전만해도 대학에 가지 않아도 가족을 이루며 먹고 살 수 있었고, 비정규직이란 말도, 임용고시란 시험도 존재하지 않았다. 차별과 경쟁이 없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일상이 경쟁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구조와 사회는 어떻게 변화하는 것일까?

-구조와 사회는 어떻게 변화한다고 생각하나.
"개인들이 변화하지 않으면 구조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구조, 사회, 제도들도 결국 사람에 대한 것들이다. 그것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선 사람들이 변해야 하는데, 그 변화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고, 당장 문제를 풀 수 있는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도 알려지지 않은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 변화들이 축적됐을 때 조금씩 사회는 변화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원론적인 답변들에 나는 그 '뻔한' 답 말고 다른 답은 없는지 계속해서 그를 채근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바꿀 방법은 없는지, 구조가 바뀌려면 한참인데 개인들이 그 구조를 바꾸겠다고 당장의 이득을 포기하겠냐며 구조의 변화를 앞당길 지름길은 없는지 캐묻는 내게서 조급함이 읽혔다. 조급함 뒤에 오는 공허함 속에서 그의 마지막 답변을 한참이나 곱씹은 후에야 나는 애초에 내 질문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사회가 여러 개인의 합 그 이상을 뜻한다면, 한 사람의 변화보다 여러 사람의 변화가 오래 걸리는 것은 수학 문제의 답처럼 당연하다. 나라는 한 개인이 변화하는 속도를 돌이켜 보면 사회가 왜 쉽게 바뀌지 않는지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다. 타인은 결코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수천, 수만의 타인들이 얽히고 섥혀 이루는 구조가 몇 몇 개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또한 자명하다.

언제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보다 나 자신을 구조에 맞추는 게 빠르고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자신이라는 개인뿐이라면, 문제는 속도와 난이도가 아니라 어느 방향으로 나를 맞추느냐였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 방향에 맞춰 나를 변화시킬 만큼 내가 '진정으로 그 변화를 원하는지'였다.

한 개인이 변화한다고 해서 구조가 변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가 말했듯 구조 안의 한 사람 한 사람이 변하지 않으면 그 구조가 변화할 가능성은 0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당장 행할 수 있는 인스턴트식 해답이 아니라, 쉬워 보이는 해답 앞에 잠시 멈춰 서서 이것이 과연 내가 원하는 결과를 낳는 선택지인지 깊게 생각해보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시간 아닐까.

'나 혼자로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 '당장 변하지 않을 것 같아서' 익숙한 선택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을 가리는 불안 속에서 나의 방향을 가늠해보며 무기력과 고립감에 눌리지 않고 내 일상의 작은 변화를 지켜내는 평범한 용기 아닐까.


태그:#오찬호, #학교 비정규직, #우리는차별에찬성합니다, #청년세대, #영전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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