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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교육부에서 박춘란 차관이 2021학년도 수능개편안 시안을 발표하고 있다.
 지난 10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교육부에서 박춘란 차관이 2021학년도 수능개편안 시안을 발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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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명동 서일필(泰山鳴動 鼠一匹)' : 태산이 떠나갈 듯 요동케 하더니 뛰어나온 건 쥐 한 마리 뿐이었다는 뜻. 예고만 떠들썩하고, 실제의 결과는 보잘것없음을 비유하는 말.

교육부가 얼마전 발표한 202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개편 시안에 대한 솔직한 소감이다. 정권을 교체한 촛불혁명이 여세를 몰아 적폐의 또 다른 온상으로 지목돼 온 우리 교육을 일거에 개혁해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건만, 아쉬움을 넘어 배신감마저 느껴진다. 한 동료교사도 실망이 컸는지, 체념하듯 이렇게 말했다.

"고르디온의 매듭을 끊어낸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난마처럼 얽힌 우리네 교육 현실 앞에서는 무릎을 꿇게 될 것 같아요."

교육부는 총 8개 수능과목 중 한국사와 영어 등 5개 과목만 절대평가를 적용하는 1안과 전 과목 모두 절대평가를 도입하는 2안 등 두 개의 시안을 내놓고는 국민더러 양자택일하라며 등 떠밀고 있다. 두 가지 시안을 마치 획기적인 개혁안인 것처럼 호들갑 떨며 여론수렴 절차를 거쳐 이달말 확정하겠다고 한다. 활활 타올랐던 촛불이 우리 교육 현실 앞에서는 순식간에 심지만 남아버린 느낌이다.

사실상 '속도'만 다를 뿐, 둘의 차이는 없다. 1안대로 일정 기간 시행한 뒤 종국에 2안으로 가겠다는 의도다. 제3의 대안까지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면, 네 차례의 전국 순회 공청회에서 어떤 이야기가 나오든 교육부의 결론은 이미 1안으로 정해져 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현 상태에서 2안은 1안을 위한 '들러리'며, 공청회는 요식행위일 뿐이라는 지적이 일찌감치 나오는 이유다.

이낙연 총리의 '공정성 프레임'... 삐걱거리는 교육개혁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 3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 3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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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점과 100점이 똑같이 1등급인데, 어쩌다 보니 91점을 받은 나는 대학에 합격하고, 100점을 받은 친구는 떨어졌다면 그 친구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 3일 열린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 석상에서 수능 절대평가의 부작용을 우려하면서 꺼낸 발언이다. 그러면서 "대학입시와 같은 문제는 학생과 학부모, 대학이 모두 승복하고 수용할 수 있도록 신중하고, 때로는 천천히 가야 한다"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졸지에 수능 절대평가와 고교학점제 도입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표적인 교육 공약에 태클을 건 모양새가 됐다.

총리의 발언으로 담대해야 할 교육개혁의 노정은 시작부터 삐걱거리게 됐다. 사실 수능 절대평가 도입은 교실수업 개선과 고교학점제 안착을 위한 선결조건이다. 그런데도 그는 절대평가를 공정성 프레임으로 끌어들여 교육 전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을 부추기고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입시전형의 대세로 자리 잡은 학교생활기록부 종합전형(학종)은 애초 도입돼서는 안 될 나쁜 제도다.

더욱 눈여겨봐야 할 건 총리의 인식에 우리 교육의 모든 적폐가 고스란히 담겨있다는 점이다. 의도야 어떻든, 수능 절대평가는 불공정하다는 인식을 심어주며 수능의 본뜻 자체를 왜곡하고 있다. 기실 수능은 점수로 줄 세우는 상대평가와는 어울리지 않는 시험제도다. 대학에서 수학할 역량이 되는지를 확인하는 시험이니, 성취 기준에 다다르면 통과되는 합불 방식이라야 마땅하다.

주지하다시피 수능은 지난 1994년 과목별로 소수점 따져가며 당락을 결정했던 학력고사를 대체하기 위해 도입됐다. 멀쩡한 교과서를 내팽개친 채 주야장천 문제집만 풀어댔던 교실수업을 개선하고, 과도한 점수 경쟁을 완화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를 모았다. 또, 수험 과목의 축소로 아이들의 학습 부담이 크게 줄어 공교육을 정상화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이름만 그럴 듯하게 바뀌었을 뿐, 명문대를 향한 과열된 경쟁은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그나마 점수가 아닌, 등급제가 도입된 게 진보라면 진보다. 온존한 학벌구조 속에 수능체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이전의 학력고사 시절과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힘을 잃었다. 이는 학력고사와 수능의 문제라기보다 상대평가가 지닌 태생적 한계다.

수능의 본 의미는 '능력검증'이지, '변별력'이 아니다

지난 10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회원들이 집회를 열고 2021학년도 수능개편안 시안 관련 전과목 5등급 절대평가를 요구하고 있다.
 지난 10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소속회원들이 집회를 열고 2021학년도 수능개편안 시안 관련 전과목 5등급 절대평가를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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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은 말 그대로 대학에서의 수학능력을 검증하기 위한 절대평가 방식의 '자격고사'로 남아야 하며, 전가의 보도처럼 내세우는 '변별력'을 수능에 요구해서는 곤란하다. 수능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다. 수능으로 점수 경쟁 완화와 변별력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마치 '증세 없는 복지'라는 구호처럼 애먼 국민들을 현혹시킬 뿐이다.

총리는 불공정하다고 나무랐지만, 91점짜리 아이가 100점 맞은 아이보다 열등하다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게 교육의 본령이다. 특정 분야에선 얼마든지 발군의 재능과 역량을 펼쳐 보일 수도 있다. 불공정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고 있지만, 어떻든 학종이 수능의 보완책으로 대두된 것도 계량화된 점수로 아이들의 꿈과 재능을 파악해내기가 힘들다는 성찰 때문이다.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 교육 적폐의 정점엔 '대학'이 있다. 수능 개편을 고민하기에 앞서 대학 개혁과 학벌구조 타파라는 근본적인 대책이 제시됐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마치 수능체제만 손보면 공교육이 바로 설 것이라는 어설픈 인식은 '을'일 수밖에 없는 고등학교에 책임을 묻는 꼴이다. 자칫 1안과 2안 사이의 어처구니없는 갈등이 교육개혁의 열망과 대의조차 그르치게 될까 두렵다.

결국 총리가 제시한 타협안은 '속도 조절'이다. 곧, '방향은 맞지만 속도를 늦추라'는 것이다. 여론을 수렴해 확정하겠다고 해놓고는 공청회를 열기도 전에 실무자들에게 지시를 내린 셈이 됐다. 대놓고 1안으로 가야 한다고 의중을 밝힌 것이다. 올바른 방향이라면 국민들을 설득할 대안 마련에 집중해야지,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는 건 개혁의 동력만 약화시킬 뿐이다.

'어정쩡한 눈치 보기 개편안'... 현직교사들의 평가

'죽도 밥도 아닌, 어정쩡한 눈치 보기 개편안'이라는 게 지금껏 만나본 현직 교사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누구에게도 욕 먹기 싫다며 좌고우면하다가는 게도 구럭도 다 잃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한 동료교사는 이번 수능 개편 시안을 두고, "교육 문제를 해결한 방안이 없어서가 아니라 개혁해내려는 의지가 박약해서"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당장 문과와 이과의 구분을 없애겠다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취지부터 훼손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교육과정과 수능 개편안이 따로 논다는 지적이다. 현재도 문과와 이과는 대학입시를 위해 편의상 나눠 운영하는 것일 뿐더러 아이들은 수학의 가형과 나형 선택의 차이로 둘을 구분하는 게 현실이다. 문과를 선택한 아이의 십중팔구는 수학공부에 대한 부담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물며 1안의 경우 수학영역에선 절대평가를 적용하지 않는다고 못 박았으니, 문과와 이과의 실질적 통합은 이미 물 건너 간 셈이다. 절대평가를 적용한다고는 하지만, 엄연한 수능과목인 통합사회와 통합과학까지 느닷없이 공부해야 하는 마당이니 아이들의 학습 부담만 늘어난 꼴이 됐다. 듣자니까, 이미 사교육업계는 이 두 '블루오션'을 개척하기 위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한다.

요컨대, 수능 전 과목의 절대평가 도입은 공교육 정상화를 위한 최소한의 전제조건일 뿐이다. 갈 길 바쁜 지금 5개냐 8개냐 따져가며 과목 수를 가지고 핏대 올리며 다툴 일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전가의 보도처럼 '변별력'만 부르대는 대학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 학벌구조에 기대어 아이들을 일렬로 줄을 세워 뽑기 위해 혈안이 된 그들의 주장에 휘둘릴 텐가.

"어른들이 싼 X, 우리가 치우는 느낌"

교육부가 수능 개편 시안을 발표한 10일 오후 서울 대치동 학원거리에서 학생이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교육부가 수능 개편 시안을 발표한 10일 오후 서울 대치동 학원거리에서 학생이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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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모들의 우려를 핑계 삼지도 말라. 그들은 수능 개편안의 내용의 '올바름'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의 자녀에게 미칠 유불리만 따질 뿐이다. 아무리 완벽한 개혁안일지라도 당신 자녀가 지금까지 준비해온 것들이 소용 없게 된다면 극렬 반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수많은 학부모들은 교육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까지 더해 입시제도의 변화에 대한 맹목적인 거부감을 지닐 수 있다.

옳다면 그대로 밀어붙일 배짱도 때로는 필요하다. 결과가 빤한 공청회를 연답시고 아까운 시간과 예산을 낭비하지 말고, 차라리 학교를 찾아가 아이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보라.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올해 중학교 3학년인 아들 녀석이 다가와 한 마디를 보탠다. 아이는 2015 개정 교육과정과 이번에 확정될 수능 개편안을 적용받게 되는 첫 번째 학년이다.

"교육감 선거에도 투표권이 없더니, 수능을 개편한다는 논의에도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네요. 매번 어른들이 싸질러놓은 X을 우리가 치우는 느낌이에요."


태그:#수능 개편안, #2015 개정 교육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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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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