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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범죄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으로 여성단체를 비롯해 온라인 공개사과 탄원운동까지 촉발시킨 캄보디아 행 미어 TV 아침뉴스 공동 진행자들. (좌로부터 미어 리티, 로스 소티아위)
 성폭행 범죄에 대해 부적절한 발언으로 여성단체를 비롯해 온라인 공개사과 탄원운동까지 촉발시킨 캄보디아 행 미어 TV 아침뉴스 공동 진행자들. (좌로부터 미어 리티, 로스 소티아위)
ⓒ ROS SOTEAVY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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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북동부 프레아 비히어주에 있는 시골고향집을 거의 1년 만에 찾은 19살 젊은 여성 소완 소말린은 가족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마친 뒤 곧바로 합승택시에 몸을 실었다. 자신이 일하고 있는 베트남국 경도시인 바웻 카지노에 가기 위해서다. 도로사정이 나쁜 캄보디아에선 8시간 넘게 가야하는 긴 여정이었다.

오후 5시 30분 무렵 딸이 잘 돌아갔는지 안부를 묻기 위해 엄마가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딸은 엄마에게 운전사가 좁은 길로 빠져들었다고만 답했다. 그게 딸과의 마지막 통화였다. 이후 걱정이 된 엄마가 30여분쯤 지나 수차례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딸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걱정이 된 부모는 이날 경찰에 신고를 했고, 다음날 딸은 논바닥 웅덩이 한가운데 옷이 벗겨진 채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리고, 사건이 발생한 지 6일 만인 지난 8월 8일, 현지경찰은 택시기사인 용의자 2명을 긴급 체포했다.

이 사건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한 지상파 방송국 남성 MC 미어 리티의 어처구니없는 여성 희생자 비하 발언 때문이었다.

이번 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캄보디아 헹미어 TV 아침뉴스 진행자 미어 리티. 그는 "성폭행을 당하면 그냥 살기 위해서 저항하지 말고 당하라"는 충격적인 발언으로 캄보디아 전역을 분노로 들끓게 했다.
 이번 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캄보디아 헹미어 TV 아침뉴스 진행자 미어 리티. 그는 "성폭행을 당하면 그냥 살기 위해서 저항하지 말고 당하라"는 충격적인 발언으로 캄보디아 전역을 분노로 들끓게 했다.
ⓒ 미이 리티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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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발생 이틀 후인 지난 10일 오전 그는 헹 미어TV '아침 뉴스쇼'에서 "호랑이의 마수에 걸리면 그들에게 동의하고 절대 저항하지 말라. 당신을 죽일 수 있으니 단지 목숨을 구하려고 애써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일부 여성은 강간하려는 남자를 비난하거나 비명을 지르곤 하는데 호랑이의 이빨에 물렸을 땐 그냥 그들이 강간하도록 자신을 놔둬라"라는 믿기 힘든 조언까지 서슴지 않고 했다.

한술 더 떠 그는 "강간 범죄자나 살인자들은 여성 희생자를 살려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성을 다시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희생자를 조롱하는 듯한 농담까지 던져 여성 시청자들을 더한 충격에 빠지게 했다.

이 같은 그의 발언은 방송을 시청한 여성들과 여성인권 단체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여성들은  페이스북 등 SNS을 통해 그의 정식사과를 요구하는 온라인 탄원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일주일 사이 1,500명이 넘는 네티즌들이 서명에 동참했다. 이들은 책임있는 공식사과를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작성해 공보부와 여성부 그리고 그가 일하는 방송국에 제출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나라 여성부만은 이 탄원서한을 받아주지 않았다. 대표자의 서명과 서명자들의 지문날인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여성의 인권을 보호해야 할 여성부가 말도 안되는 이유를 대며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캄보디아 여성들과 여성인권단체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는 상태다.

그나마 공보부는 뒤늦게나마 피해여성에 대한 폭력범죄 보고에 대한 행동규범을 만들어 발표했다. 신문·방송 등 언론이 성폭력사건의 희생자들에 대한 코멘트나 희생자를 폄하하는 사진 게재는 삼가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골자다.

캄보디아 현지 아침뉴스 방송 MC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인해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자 뒤늦게나마 최근 캄보디아 공보부가 성폭행범죄를 포함해 폭력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의견이나 희생자를 폄하하는 보도방식을 삼가해줄 것을 언론사에 지시하는 행동규범 조항을 만들어 발표했다.
▲ 캄보디아 공보부 전경 캄보디아 현지 아침뉴스 방송 MC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인해 사건이 일파만파 커지자 뒤늦게나마 최근 캄보디아 공보부가 성폭행범죄를 포함해 폭력피해자에 대한 잘못된 의견이나 희생자를 폄하하는 보도방식을 삼가해줄 것을 언론사에 지시하는 행동규범 조항을 만들어 발표했다.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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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사건이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자 문제의 이 남성 MC가 여성 시민운동가들과의 직접 대화를 제안한 상태다. 토론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적극 해명하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자신이 방송에서 한 발언내용에 대해선 조금도 반성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그는 지난 14일 방송에서 이미 충분히 공개사과를 했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적반하장격으로 지금은 자신에게 화살을 쏜 여성단체들을 비난하고 불만을 토로하기 이르렀다.

"그들이 갈수록 더 많은 사과요구를 한다. 그들이 원하는 게 도대체 뭔가?"

현재로선 그가 어떤 방식으로 이 사태를 수습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다. 추가공개사과나 방송하차 소식은 아직까지 들려오지 않고 있다.  

사실 논란이 된 이 방송에서 그와 함께 공동진행을 맡은 여성MC 로스 소티아위 역시 이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녀는 당시 방송에서 "여성들은 혼자 택시를 타는 등 스스로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자초해선 안된다"고 오히려 남성MC를 거들었다. 이후 사건이 확대되면서 자신에게까지 비난의 불통이 튀자 뒤늦게 해명에 나선 상태다.

이 여성 MC는 "이에 대해 만약 누군가 요청한다면 피해자의 가족들에게 사과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여전히 진정한 반성의 기미는 없어 보인다. 지난 16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솔직히 말해 이번 이슈가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다"라는 또 다른 무개념(?) 발언을 해 빈축을 사고 있는 상태다.

한편 방송이 나간 후에도 피해자 가족들은 슬픔에 빠져 이런 일이 발생한 사실에 대해서조차 알지 못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녀의 어머니는 최근 현지 영자신문〈프놈펜 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 "(딸아이가) 끔찍하게 살해당했다. 맞고 고문까지 당했다. 사람들이 내 딸을 비난하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런 말을 한 자가 있다면 뇌도 영혼도 없고 한번도 딸을 가져본 적이 없는 그런 사람일 것"이라고 비난했다.
 
캄보디아 사회는 여성에게 매우 보수적이다. 과거 70년대 크메르 루즈 정권 시절엔 출산률을 높이기 위해 여성들에게 강제 결혼을 종용한 적도 있다. 이 나라 정부의 생각은 과거와 그리 다를 바 없다. 최근에는 여성 권익에 앞장서도 시원찮을 여성부가 나서 한 여자배우가 노출이 심하다며 직접 불러 경고를 하고 방송 출연 제재 조치를 취한 적도 있다.

이에 여성인권단체가 들고 일어섰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이 나라에선 강간 폭행 사건마저 여성에게 일부 책임이 있다고 믿은 남성 위주의 전근대적인 사고방식도 여전하다. 이 사건 자체보다 이러한 사건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과 여성에 대한 편견이 더 큰 문제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을망정 비단 이 나라만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남녀평등시대라고 하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남성들의 우월적 사고가 바뀌지 않은 한 여성은 영원히 사회적 약자이자 희생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문득 지난해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이 떠오른다.


태그:#캄보디아, #헹 미어 TV 방송국, #캄보디아 성폭행살인사건, #캄보디아 여성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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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캄보디아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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