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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아! 너 때문에 대한민국 엄마들 머리가 돌 지경이다

"중학교 때 아이에게 고등학교 과정 선행을 시켜주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어려움을 겪어요. 중학교 과정에서 빡세게 선행학습을 한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가서 다른 스펙을 쌓을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을 수 있어요."

아이들 적응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내게 옆에 앉은 선배 교사가 들려준 이야기이다.

글쎄,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많은 관심을 갖고 노력한 부분이 있다면 '책 읽히기'이다. 학교 다니면서 교과서와 전공서적 외에는 별반 읽은 것이 없어 내 아이 만큼은 책을 끼고 살게 해주고 싶었다, 이것이 로망이 되어 독일에서 아이 나이에 맞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접할 수 있도록 도서관을 열심히 드나드는 노력봉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노력 외에는 아이 키우면서 별반 한 게 없는 나에게, 또한 선행개념이 전혀 없는 나라에서 살다온 나에게, '선행이'는 생소한 단어였다.

한국에 돌아온 지 2년 쯤 지나서이다. 아이가 어느 정도 한국말을 이해하고 말귀를 알아듣자 그동안 가슴에 무겁게 담아두었던 '선행이'를 한번 꺼내 보기로 했다.

'도대체 선행이가 뭐란 말이냐?' 

서점에 처음 간 날, 깜짝 놀랐다. 아이들 코너에는 온통 선행이와 관련된 내용뿐이었다. 수학선행, 영어 선행, 국어 선행..... 책이면 책, 자습서면 자습서, 모두 선행과 관련된 내용들로 도배되어 있었다. 아이에게 필요한 책을 사주러 갔다가 그걸 보고 마음만 시끄러운 채 돌아섰다. 이 일을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봐야 할지 고민되었다. 물론 안다. 우리 아이들에게 선행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데 문제는 언제까지 이대로 머물러 있어야 할지, 답을 모르겠다는 사실이다. 남들은 저리도 선행에 목숨 걸고 달려가는데 말이다. 

대한민국은 '선행블리~'

주변 엄마들 중에 선행이를 모르는 사람은 나빼고 아무도 없었다. 선행이를 어느 정도 아는 엄마부터 시작해서 선행이를 섭렵한 엄마들까지. 그렇게 다들 정신없이 선행에 집착하여 달려가고 있었고, 대한민국은 온통 '선행이 앓이 중' 이었다. 그 레이스에 뒤늦게 합류한 나는 이미 속도와 거리에서 밀려 있었고, 그런 속에서 어디 하나 마음 둘 곳이 없었다.

엄마들이 모였다 하면 선행이는 늘 단골 메뉴로 등장했고, 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불안감은 더해졌다.

"00는 벌써 고등학교 진도를 나간대요. 미분이 뭐예요? 확률과 통계도 다 뗐대요?"
"00는 해리포터를 초등학교 때부터 원서로 읽었대요. 아이고, TEPS 시험에 벌써 몇 번 도전했는지 몰라요."

선행아! 너는 도대체 뭐니? 너 때문에 대한민국 엄마들 머리가 돌 지경이다.

독일에서 듣도 보도 못한 단어가 내 삶에 끼어들어, 자나 깨나 이 단어 앞에 걱정과 한숨이 나올 줄이야!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선행학습이 사회 분위기를 장악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래서 독일에 있을 때 사람들이 그렇게들 말했나보다.

"왜 들어 오려고 해? 남들은 못나가서 야단인데, 왠만하면 그냥 거기 눌러 앉아!"

선행이를 알면 알수록 내 마음은 반감에 반감이 들었다. 선진국은 아이들에게 지‧정‧의에, 건강까지 챙기며 고르게 성장하도록 노력을 기울이는데, '왜 이 나라는 어린아이들에게 이렇게 지나치리만큼 공부를 강요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과 함께 다음의 생각들이 내 마음에서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선행블리가 안되는 나! 비정상인가요?

선행이 왜 필요하지? 그렇게 다 앞서가면 그 결과는 무엇이지? 원하는 것만큼 얻을 수 없다면? 옛날에는 있는 집 자녀들만 티 안내고 했던 것을 모두가 다 달려들어 하면 결과가 바뀌나? 결과는 이미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는 것 아닌가? 모든 대한민국의 엄마들이 그렇게 매달리면 그 스트레스는 또 뭐고? 사교육비를 벌기위해 뛰어든 보통 엄마들의 삶은? 가정생활이 그래서 행복한가? 들인 돈 때문에 아이들과 부모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어떡하고? 그렇다고 안하고 있으면 불안하다고 말하는 엄마들은 또 뭐지? 아이들의 자율성은? 하기 싫어도 가야하고, 보내기 싫어도 보내야 하는 이 수동적인 삶은? 그래서 사회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가?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선행이 아이들과 미래를 망치고 있구나!' 라는, 한국 부적응자에게 어울리는 생각은 굳어지고, 내가 알고 있는 이상과 내게 주어진 현실사이에서의 갈등은 계속 되었다.

이런 복잡한 생각, 정리되지 않는 생각 속에 떠오르는 그림이 하나 있다. 바로 '꽃들에게 희망을'에 나와 있는 '애벌레 탑'이다. 목표가 무엇인지 모르고, 남들이 가니까 덩달아 따라가다 짓밟고 짓밟히고. 그 결과가 허무한 것을 모른 채 열심히 올라가는, 딱 그 모습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더퍼스트미디어에 연재된 글의 일부를 기초로 하였습니다.



태그:#독일교육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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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키일대학(Christian-Albrechts-Universitat zu Kiel)에서 경제학 디플롬 학위(Diplom,석사) 취득 후 시골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21년, 독일 교육과 생활의 경험을 담은, 독일 부모는 조급함이 없다(이비락,2021)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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