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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회 사당 충의사 경내의 논개 사당 의암영당
 최경회 사당 충의사 경내의 논개 사당 의암영당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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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군 동면 백용리 422의 충의사는 최경회 의병장을 기려 세워진 임진왜란 사적지이다. 충의사 경내에는 논개를 모시는 의암 영각(義巖影閣)이 있다. 영당 앞의 안내판을 읽어본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2차 진주성 싸움 뒤 연약한 여성의 몸이지만 의분과 통한을 참지 못해 왜 적장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를 남강의 위암(危巖)으로 유인하여 그를 껴안고 깊은 강물 속으로 뛰어 들어 원수를 갚고 순절한 위대한 논개 부인의 영정을 모신 집이다.

이와 같이 청사에 빛나는 호국 충절 정신을 천추토록 기리기 위하여 진주의 의기사(義妓祠), 장수의 의암사(義巖祠), 함양 묘지 등 위패와 영정을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고 있다.

여기 의암(義巖)인 화순에서도 이곳 충의사(忠毅祠)와 함께 의암 영정각을 지어 나라 사랑의 귀감으로 삼고자 한다.'

최경회 사당 충의사 경내의 논개 사당 의암영각의 문 장수문
 최경회 사당 충의사 경내의 논개 사당 의암영각의 문 장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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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판에는 진주 촉석루 아래 남강의 한 바위를 위암과 의암으로 달리 부르고 있다. 위험한 암석이라는 뜻의 위암은 이 바위의 본래 이름이다. 논개의 순국 이후 위암은 의암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당대의 진주 시인 정식(1683∼1746)은 '그 바위, 이 여인이 아니었으면(岩非斯女) 어찌 의롭다 소리 들었으리(焉得義聲)'라고 노래했다. 

안내판은 또 진주에서는 사당을 의기사, 즉 의로운 기생의 사당이라 부르지만 화순과 장수에서는 의암 영당과 의암사, 즉 논개의 상징이 된 의로운 바위를 그대로 사당 이름으로 쓴다고 말해준다. 의암 영당과 의암사는 의암이 논개의 호가 된 사실을 반영한 사당 이름인 것이다. 나아가 본문은 논개를 '부인'으로 호칭하고 있다.

논개 생가 :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708
 논개 생가 : 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708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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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708의 '의암 주논개 생가 터' 안내판도 논개가 기생이 아니라 부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논개가 기생으로 알려진 일반적 인식과 달리 부인이라는 사실은 어디에 근거하는 것일까? 일단 생가 터의 안내판부터 읽어본다.

'이곳은 1593년(선조 26) 6월 남편 최경회 현감을 따라 2차 진주성 싸움에 참전했다가 중과부적으로 성이 무너지고 패하자 스스로 목숨을 버린 남편과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기생으로 가장하여 왜군 승전연에 참석, 왜장 모곡촌육조를 진주 남강변 현재 의암이라 불리는 바위로 유인하여 함께 투신 순국한 겨레의 여인 주논개(朱論介)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논개는 1574년(선조 7) 9월 3일 이곳 주촌마을에서 부 주달문(朱達文)과 모 밀양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주촌마을의 원래 생가는 1986년 내곡 저수지 축조로 수몰되었으며, 이곳은 논개 할아버지가 함양군 서상면에서 재를 넘어 와 서당을 차렸던 곳으로 전해지는 지역에 1997년부터 4년에 걸쳐 넓히고 옮기는 사업을 통해 2만 평을 조성하였다.

이곳에는 주논개 생가로 들어가는 관문인 의랑루(義娘樓)가 있고 연못과 정자 월아정(月娥亭), 주논개의 석상, 의암 주논개의 사료를 전시한 전시관 및 생가가 있다.'

안내판은 최경회가 논개의 '남편'이며, 논개가 '스스로 목숨을 버린 남편과 나라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 모곡촌육초를 의암 족으로 유인하여 함께 투신 순국한 '겨레의 여인'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논개는 '기생을 가장'했는데 뒷날 그대로 굳어져 실제 기생으로 알려졌다는 뜻이다.

논개를 기리는 장수 의암사
 논개를 기리는 장수 의암사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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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논개의 일생을 정리해본다. (앞의 두 안내판에 나오는 내용은 생략)

논개는 그녀의 이름이고, 호는 의암이며, 성은 신안주씨이다. 그녀의 가문은 대대로 학덕이 높은 훈장집으로 마을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뼈대 있는 집안이었다.

논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특하여 부모의 가르침을 잘 따랐으며 나이에 비해 성숙하였다. 아버지 주달문은 논개가 딸이지만 크게 될 인물이라고 기뻐하였다.

민며느리 제도와 민머리


민며느리 제도는 장차 며느리로 삼기 위해 어린 여자아이를 미리 데려와서 키우는 풍속을 말한다.
이때 여자아이는 아직 결혼을 한 것은 아니므로 쪽을 찌지 않고 민머리로 지내게 된다.
민머리는 결혼한 여자가 머리카락을 뒤통수에 땋아서 틀어 올려 비녀를 꽂아 쪽을 하는 것과 달리 그냥 풀어헤친 머리를 말한다.

논개의 집은 가난했지만 화목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논개가 다섯 살 때 갑자기 세상을 떴고, 모녀는 한 마을에 살던 숙부 주달무에게 기대어 살게 되었다. 노름으로 가산을 탕진한 주달무는 이웃마을 김풍헌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 달아나버렸다. 

논개 모녀는 도망을 쳤지만 김풍헌의 고발로 장수 관아로 끌려가 재판을 받게 된다. 이때 현감이 최경회였다. 최경회는 논개 모녀에게 아무 죄가 없다면서 풀어주었다. 갈 곳이 없는 모녀는 관아에서 일을 하며 살게 해달라고 최경회에게 부탁했다.

최경회가 허락을 하여 모녀는 관아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논개가 17세가 된 1590년 두 사람은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담양 부사로 있던 최경회는 그 해 모친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임한 후 시묘를 위해 고향으로 가면서 논개를 그녀의 고향 장수로 보냈다. 2년 뒤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논개 동상 : 논개 생가 터 경내
 논개 동상 : 논개 생가 터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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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을 입은 채 의병장이 된 최경회는 현감을 지냈던 장수에 의병을 모집하러 왔고, 두 사람은 2년 만에 다시 만났다. 최경회는 월강리 앞 들판에 의병청(義兵廳, 의병 본부)을 설치한 뒤 군사들을 훈련했고, 논개는 부인들과 함께 밥을 짓는 등 수발을 들었다.

전라도와 영남을 드나들며 많은 공을 세운 최경회는 1593년 4월 경상우도(낙동강 서쪽의 경상도 지역) 병사로 승진하여 진주성에 들어갔다. 소식을 들은 논개도 짐을 꾸려 진주로 갔다. 하지만 두 사람이 정겹게 일상의 평화를 누릴 겨를은 별로 없었다. 6월 19일 10만에 이르는 왜적 대군이 몰려왔고, 열하루 동안 피투성이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논개도 갖은 일을 하며 전투하는 장졸들의 뒷바라지를 했다.

전세는 점점 악화되었다. 일단 몸을 피해 있으라는 남편의 말에 따라 논개는 숨어 지내면서 전투의 흐름을 살폈다. 그때 남편이 남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죽음의 길을 갔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논개 기념관 : 논개 생가터 경내
 논개 기념관 : 논개 생가터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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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에 울부짖던 논개는 비장한 결심을 했다. 복수를 해야 한다! 칠월 칠석에 일본군이 승전 잔치를 연다는 정보를 입수한 논개는 기생처럼 곱게 단장한 후 관기(官妓, 관청 소속 기생)들 틈에 섞여 연회장인 촉석루 가까이까지 갔다.

거기서 논개는 혼자 위암 쪽으로 내려갔다. 촉석루에 올랐다가는 정체가 드러날 우려가 있었다. 그녀는 혼자서 남강 물가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불어 와 그녀의 치맛자락은 수양버들처럼 휘날렸고, 머리카락은 물결과 함께 달빛에 빛났다.

연회가 무르익자 왜적 장수들은 술이 얼큰해졌다. 그 중 누군가가 맨 먼저 촉석루 아래를 보며 눈빛을 번쩍이고 신음을 토했다. 그러자 다들 그곳으로 눈길이 쏠렸다. 왜장들 중 용맹하고 저돌적인 것으로 유명한 모곡촌육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국가 표준 영정으로 새로 지정된 논개 초상 (의암사 소형 홍보물 수록 사진을 재촬영한 것이므로 실제 그림과는 여러모로 다릅니다.)
 국가 표준 영정으로 새로 지정된 논개 초상 (의암사 소형 홍보물 수록 사진을 재촬영한 것이므로 실제 그림과는 여러모로 다릅니다.)
ⓒ 윤여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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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곡촌육초는 호기롭게 강가로 내려갔다. 연회는 중단되고 모두 그쪽만 보게 되었다. 적장이 다가올수록 논개의 미소는 더욱 향기롭게 피어올랐다. 왜장은 그녀가 자신을 유혹하고 있다고 믿었다. 스스럼없이 다가온 왜장이 눈앞에 서자 논개는 두 팔을 벌려 그 자의 허리를 껴안았다. 촉석루 위에서는 탄성과 환호가 터졌다.

그 환호작약하던 아우성은 이내 비명으로 변했다.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낀 논개는 두 손이 꽉 맞물리도록 왜장의 배를 잡아당긴 다음 함께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1620년 무렵 우리나라 최초의 야담집 『어우야담』을 저술한 유몽인(1559∼1623)은 이 장면을 아래와 같이 기술했다.

'논개는 진주 관기였다. 계사년(1593)에 진주가 마침내 함락되고  군사와 백성들이 모두 죽었다. 논개는 분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꼭대기에 서 있었다. 아래는 만 길 낭떠러지였다. 사람의 혼이라도 삼킬 듯 파도가 넘실거렸다.
    

왜병들은 멀리서 바라보며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다만 왜장 하나가 당당한 풍채를 뽐내며 접근했다. 논개는 요염한 웃음을 흘리며 왜장을 맞이했다. 왜장이 자신의 몸을 잡자 논개는 힘껏 적을 끌어안고 두 몸을 낭떠러지 아래로 던졌다. 둘은 함께 죽고 말았다. (하략)'

유몽인의 기록 이후 논개는 기생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경회 의병장이 직접 쓴 글 및 그와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이 쓴 글을 모은 『일휴당 실기』에는 다르게 적혀 있다. 이 책은 '공의 부실(副室, 첩)이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고 부른다.'라고 증언한다. 논개가 기생이 아니라 최경회 의병장의 둘째 부인이라는 뜻이다.

최경회 선덕 추모비(왼쪽)와 논개 생장지 사적비가 논개 생가로 들어가는 계단 앞 좌우에 나란히 서 있다. (사진은 가운데 계단을 생략한 것임)
 최경회 선덕 추모비(왼쪽)와 논개 생장지 사적비가 논개 생가로 들어가는 계단 앞 좌우에 나란히 서 있다. (사진은 가운데 계단을 생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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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개 생가로 올라가는 계단 좌우에 '최경회 현감 선덕 추모비'와 '논개 생장지 사적 불망비'가 서 있다. 논개 비는 이 일대가 그의 출생 및 성장 지역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에 비해 최경회 비는 그가 의병장 또는 경상 우병사였다는 것이 아니라 현감이었다는 점을 말하고,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업적이 아니라 착한 덕을 기리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은 뜻밖이다. 최경회은 무엇보다도 임진왜란 당시 손에 꼽히는 활약을 한 장수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이 비석의 이름이 말하는 '착한 덕'은 죄를 덮어쓴 논개 모녀를 억울함에서 풀어주고, 갈 곳 없는 두 사람을 관아에 머물게 하여 삶의 곤궁함을 풀어준 사실을 가리킨다. 그로 말미암아 최경회와 논개가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고, 논개가 촉석루에서 왜장을 유인하여 함께 죽음의 길을 걸음으로써 '겨레의 여인(생가 터 안내판의 표현)'이 되었다.

논개 생가 터에서는 최경회가 뛰어난 장수였다는 사실보다 그가 논개 모녀에게 덕을 베푼 일이 더 소중하게 기억될 일이리라. 비록 20세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논개 또한 남편과 나눈 짧은 사랑을 오늘도 하늘에서 추억하고 있으리라.

논개 영정 (윤여환 작)


30년 이상 '국민'들의 참배를 받아온 친일파 화가의 논개 영정이 2008년 이후 충남대 윤여환 교수의 작품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충무공 이순신 영정은 친일파 작품이 2017년 8월 15일 현재도 방방곡곡에서 국민들의 절을 받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2009년 발간한 「친일 반민족 행위 관계 사료집」에 등재된 친일 화가임에도 문화관광체육부는 줄곧  그 작가의 그림을 '국가 표준 영정'으로 써 왔다.

이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충무공 영정은 국가 표준 영정 해제 사유 중 한 가지인 '고증 및 사진 등 새로운 근거에 의하여 그 인물과 다르게 표현되어 있는 것으로 판명된 경우'에 해당되는지 심의를 받을 예정으로 있다.


태그:#논개, #최경회, #의암사, #의암영당, #촉석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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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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