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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72돌이다. 독립운동가이기도 했던 시인 심훈이 <그날이 오면>에서 읊었던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온 지, 1945년 일본 제국주의로부터의 식민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되찾은 지 어느덧 72년이 지났다. 주택가와 길거리에는 시민들과 지자체가 계양한 태극기로 덮였으며,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뜻을 기리고 계승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있다.

광복(光復). 말 그대로라면 '빛을 되찾은 날'이다. 징용과 공출, 수탈, 그리고 황국신민서사로 얼룩진 일제 치하 한국민들의 삶은 어둠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점에서 주권을 되찾고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1945년 8월 15일은 민족에게 빛을 되찾은 날이었다.

물론, 연합국의 승전과 일제의 패망 그리고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시대 흐름은 남북 분단이라는 비극을 가져오기도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에서 "왜적이 항복한다는 소식은 나에게 희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일이었다. 수 년 동안 참전을 준비한 것도 모두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라고 말했다.

혹자는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제의 패망으로 찾아온 광복이라는 점에서 독립운동의 의미를 애써 폄훼하기도 한다. 그러나 독립이 우리 민족을 스스로 찾아온 것은 절대 아니었다. 3·1운동의 정신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군의 활동, 그리고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한국의 독립은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1943년 11월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연합국의 루스벨트, 처칠, 장제스가 선언한 카이로 선언의 일부는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한국인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일정한 과정 뒤에 한국을 자유 독립케 한다"는 한 문장은 독립운동가들의 노력과 희생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독립운동도 많지만, 반대로 역사 속으로 잊힌 독립운동도 분명 존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특히 각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이뤄졌던 독립운동의 역사는 그 규모나 의의에 비해 우리에게 알려진 바가 적다. 광복절을 맞아 대구지역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던 효목동 조양회관과 대구·경북 항일운동기념탑을 걸으며 대구·경북 지역 독립운동의 한 조각을 찾아봤다.

조선의 빛이 되어라... 조양회관에 담긴 독립·계몽운동의 역사

금호강 일대에 펼쳐진 망우공원을 거닐다보면 저 멀리에 고풍스러운 빨간 벽돌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현재는 광복회 대구 경북 연합지부 회관으로 사용되며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조양회관이다.
▲ 조양회관 전경 금호강 일대에 펼쳐진 망우공원을 거닐다보면 저 멀리에 고풍스러운 빨간 벽돌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현재는 광복회 대구 경북 연합지부 회관으로 사용되며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조양회관이다.
ⓒ 천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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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강 일대에 펼쳐진 망우공원을 거닐다보면 저 멀리에 고풍스러운 빨간 벽돌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현재는 광복회 대구 경북 연합지부 회관으로 사용되며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는 조양회관이다. 항일 독립운동과 민족 계몽운동의 중심이었던 조양회관은 그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등록문화제 제4호로 지정되기도 했다.

대부분 외국인에 의해 설계된 당시 대구의 근대건축물과 달리 조양회관은 한국인 건축가 윤학기에 의해 이뤄졌다. 화강암 기초 위로 세워진 붉은 벽돌 건물은 당시 벽돌공장을 운영하던 백남채의 감독 하에 중국인 기술자들에 의해 올려졌다.

1층은 현관을 중심으로 복도와 이어져 있으며 복도는 각각의 크고 작은 방들과 연결돼 있다. 2층은 강당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정면에서 바라본 조양회관은 돌출된 현관이 인상적이었다. 평지붕을 받치는 4개의 돌기둥과 반원형 아치가 건물의 얼굴처럼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처럼 돌출된 현관과 좌우 대칭형의 건물은 근대 건축의 전형인 대칭성과 정면성·중심성을 보여주고 있다.

문과 창문에 설치된 인방석이 강조하는 수평성이 인상적이다.
▲ 측면에서 바라본 조양회관 문과 창문에 설치된 인방석이 강조하는 수평성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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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개인 건축물로서는 매우 큰 규모였던 조양회관은 대구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뜻을 모아 1922년 독립운동가 동암 서상일 선생에 의해 지어졌다. 건축에 사용되는 목재를 압록강 근처의 낙엽목을 사용할 정도로 심혈을 들여 세워졌다.

부지는 달성공원 인근 서상일 선생의 땅 500평에 조성되었으며, 당시 건축비 4만3080원50전은 대구구락부 회원들이 조금씩 분담해 모았다. 당시 일제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서상일 선생의 전답을 처분해 부족한 건축비를 충당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조양회관은 이후 독립운동과 민족계몽운동의 중심이 됐다.

완공 이후 조양회관에서는 대구구락부, 대구여자청년회, 대구운동협회, 농춘봉사단체 등이 입주하여 다양한 민족계몽운동을 펼쳐나갔다. 특히 1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2층 강당에서는 각종 청년단체들에서 야학을 열어 많은 청년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으며, 시국강연, 국산품 애용, 상공업 진흥 등에 대한 강연이 이뤄졌다.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조양회관은 직영하던 사진실, 인쇄시설을 임대하고 사회 계몽활동에만 주력한다. 1940년대에 들어오면서 일제의 말살 정책으로 건물의 기능을 상실했으며, 일본 부대가 주둔하며 보급부대로 사용됐다.

해방 이후에는 제헌국회의원 등 서상일의 정치참여로 한민당 사무실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후 존폐위기를 겪던 조양회관은 시민사회와 광복회의 보존 여론에 대구시가 매입해 현재 위치로 이전됐다.

동상 뒤로 대구·경북 항일운동기념탑과 태극기가 보인다.
▲ 동암 서상일 선생(1887~1962) 동상 뒤로 대구·경북 항일운동기념탑과 태극기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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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회관을 건립한 동암 서상일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박상진 선생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군자금을 모집했으며, 이후 조선국권회복단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무기를 반입해 일제 관서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는 등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의 길을 걸었던 서상일 선생이 대구로 돌아와 민중계몽운동에 앞장서게 된 것에는 3·1운동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

헌병 경찰을 동원한 무단통치에 한계를 느낀 일제가 문화통치로 통치의 방식을 변경하게 된 것이다. 특히나 무장독립운동이 독립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일부 독립운동가들에게 3·1운동은 당시 독립운동의 새로운 동반자로서 민중을 인식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나는 조양회관 인근의 항일운동기념탑에서 서상일 선생이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서게 된 계기가 되었던 3·1운동의 한 조각을 찾을 수 있었다.

항일운동기념탑, 그곳에서 만난 독립운동가 '김강아지'

조양회관(오른쪽)과 대구·경북 항일운동기념탑(왼쪽)
 조양회관(오른쪽)과 대구·경북 항일운동기념탑(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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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회관에서 고개를 돌려 동쪽을 바라보니 거대한 화강암제 석탑이 눈에 들어왔다. 대구·경북 항일운동기념탑이었다. 1945년 맞이한 광복의 의미를 기려 45m로 지어졌다는 거대한 기념탑을 둘러싼, 오석에 음각된 수많은 대구·경북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구한말의 의병장 이강년(1858~1908), 신돌석(1878~1908),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시일야방성대곡>을 <황성신문>에 게재했던 언론인 장지연(1864~1921, 후에는 변절해 친일 경향의 글과 시를 발표했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간부로 활동했으며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했던 서상돈(1850~1913) 선생 등 익숙한 이름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처음 접해보는 생소한 이름들이었다. 걸음을 옮기며 찬찬히 살펴보던 중 '김강아지(金江牙之)'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글과 함께 병기된 한자 표기는 오직 소리만이 '강아지'라는 이름을 설명할 뿐, 흔히 작명에서 찾아볼 수 있는 어떠한 뜻도 담겨있지 않았다.

조선 후기 호적대장 연구를 통해 한 노비 가문의 가계를 추적한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권내현 교수의 저서에 따르면, 강아지(江牙之), 도야지(道也之), 두거비(斗去非) 등 동물 이름을 빗대어 만든 무성의한 호칭은 조선시대 노비의 이름이었다. 아마도 무의미한 한자 표기는 일상적인 우리말 호칭을 문서에 기록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기념탑을 둘러싼, 오석에 음각된 수많은 대구·경북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익숙한 이름도 찾아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처음 접해보는 생소한 이름들이었다. 걸음을 옮기며 찬찬히 살펴보던 중 ‘김강아지(金江牙之)’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념탑을 둘러싼, 오석에 음각된 수많은 대구·경북 지역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익숙한 이름도 찾아볼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처음 접해보는 생소한 이름들이었다. 걸음을 옮기며 찬찬히 살펴보던 중 ‘김강아지(金江牙之)’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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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독립운동가 김강아지는 어떤 사람이었고, 어떤 연유로 독립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을까?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의 짤막한 기술에 따르면, 김강아지 선생은 1897년 태어났다. 노비가 해방된 제1차 갑오개혁이 1894년 일어났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공식적인 노비 해방 이후로도 그의 부모가 주인집에서 이전과 같은 생활을 이어가던 중 김강아지 선생이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강아지'라는 이름은 이러한 그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주고 있었다. 1919년 5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재한에서의 김강아지 외 6명에 대한 짤막한 판결문은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던 그의 행적을 말해준다.

"피고 성갑 외 6명은 조선 각 지방에서 한국독립 시위운동이 치열하며 이를 성원하면 독립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김학배 또는 김태호 등의 선동에 의하여, … 피고 강아지(江牙之)는 대정 8년(요시히토 일왕의 연호, 서기로 1919년) 3월 18일 오후 9시경부터 다음날 19일 오전 1시경에 이르기까지 그곳에서 다른 2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함으로써 치안을 방해했다."

의성 점곡면 일대의 만세운동은 김태호, 김학배 등에 의해 추진되었다. 1919년 3월 18일 오후 9시경, 점곡동 일대에 500여명의 주민이 모여 미리 준비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일으켰고, 이튿날 300여 명의 시위군중은 사촌동에 집결한 후 주재소로 행진하여 만세운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일본 군경은 자정을 넘긴 새벽 1시경 발포를 감행하여 군중을 해산시켰다. 김강아지는 이틀간 계속된 점곡면 만세 시위에 참가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보안법 위반'의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강아지는 결국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김강아지'라는 개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지 않다. 그는 우리가 이름조차 알지 못하고 지나치는 수많은 무명의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러나 광복은 우리가 이름을 알고 있는 독립운동 지도자들만의 노력만으로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의 독립 선언만으로 한민족의 독립 의지가 세계에 알려질 수 있었을까? 일경에 스스로 연행된 민족대표의 뒷모습이 3·1운동의 마지막 모습이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헌법을 통해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기념하고 있을까?

우리에게 기억되지 않는 무명의 독립운동가 김강아지 선생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이름에서 보여지듯, 그는 당시의 사회 지도층·지식인과는 거리가 있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가 1919년 서울이 아닌 의성의 한 작은 마을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의 한 가운데 서있었다는 사실은 3.1운동의 많은 의의를 내포한다.

3.1운동이 민족대표들만의 공허한 외침이 아니라 독립에 대한 전 민족적 합의로 이어졌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특히 지식인들에게 교화의 대상으로만 취급되었던 민중들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어 독립운동의 동반자로써의 민중의 역할이 새롭게 발견되기도 했다. 조양회관은 이러한 인식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대구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뜻을 모아 세워졌던 조양회관은 이후 대구 지역 민족 계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대구 지역 민족 계몽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조양회관과 서상일 선생, 항일운동기념탑에 음각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과 김강아지 선생이 증언하는 독립 운동의 역사는 72돌을 맞이한 광복절의 의미를 빛내고 있다.

독립은 우리 민족을 스스로 찾아오지 않았다. 광복은 오랜 독립운동과 민족 계몽운동의 결과였다. 조선의 빛이 되어라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조양회관은 수많은 민족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중심이 됐다. '빛을 되찾은' 광복절을 맞아 태극기를 계양하면서 서상일 선생을 비롯한 민족 계몽가들, 그리고 우리가 이름조차 모르는 수많은 '김강아지' 선생을 기억해보는 것은 어떨까?


태그:#광복절, #조양회관, #서상일,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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