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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타워 아래 해방촌.
 남산타워 아래 해방촌.
ⓒ 설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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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호다! 우연히 '피카소의 우는 여인'을 봤을 때 든 생각이었다. <오발탄>이라는 소설이 들어온 것은 참 오래 되었다. 교과서 지문으로 첫 인연을 맺고 주제의식의 무게감으로 인해 쉽게 손이 가지 않았던 작품이다. 그런데 북대서양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의 피카소의 그림에서 우리 문학과 공감대를 발견했다.

피카소의 '우는 여인', 에스파냐 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작품.
 피카소의 '우는 여인', 에스파냐 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작품.
ⓒ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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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우는 여인

1937년 작품인 '우는 여인'은 스페인 내전 이후 피카소가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다. 노란색, 녹색의 섞인 얼굴의 여인은 슬픔과 두려움에 가득한 눈으로 울고 있다. 보라색 꽃 장식을 한 빨간 모자를 쓰고 있다. 이 그림은 여러 각도에서 본 모습을 한 화면에 합쳐 그리는 방식인 큐비즘 기법을 사용하여 괴기스러운 얼굴을 부각시켰다. 여인의 얼굴을 소재로 하여 전쟁의 참혹함을 극대화했다. 전쟁의 상처가 자기분열된 얼굴이라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철호는 또 눈을 꼭 감았다. 머릿속의 뇟줄이 팽팽히 헤워졌다. 두 주먹으로 무엇이건 콱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에 철호는 어금니를 바서져라 맞씹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7년 성실, 도덕을 신념으로 계리사로 일하는 철호는 차비도 되지 않는 월급을 받으며 처절하게 살고 있다. '양공주'로 나선 누이 동생, 도덕·법률을 비웃으며 권총 강도를 구상하며 살아가는 남동생을 안타까워 한다. 가장으로 임신한 아내, 딸 아이, 아픈 엄마를 모시고 살아가는 철호는 이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 손에 묻은 잉크물을 닦으며 핏물이라고 생각하고, 딸아이가 부르는 소리에 흠칫 놀라는 철호는 심각한 자기분열을 앓고 있다.

영화 오발탄의 촬영장소 그 때의 모습을 닮은 채 남아 있다.
 영화 오발탄의 촬영장소 그 때의 모습을 닮은 채 남아 있다.
ⓒ 설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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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발탄>의 무대 해방촌

해방촌이라는 이름부터가 예사롭지가 않다. 오발탄에서 여지없이 해방, 해방촌에 대한 역설이 등장한다. 전쟁 이후 피난민, 실향민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동네가 바로 해방촌이다.

해방촌은 공식적인 지명이 아니다. 행정동으로는 용산동2가를 말하는데 용산동2가는 용산미군기지와 남산 사이의 산비탈에 들어선 곳을 말한다. 용산동2가에 전해오는 전설 중 하나는 이곳에 남산의 소나무와 호랑이가 살던 곳이라는 이야기다. 애초에 사람이 살던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해방촌이라는 지명은 이중적인 의미로 쓰인다. 해방을 맞이하며 몰려든 사람들이 만든 마을이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주민들 스스로 이곳에서 벗어나는 걸 해방됐다고 표현할 정도로 터부시됐던 마을이라는 것이다.

"산비탈을 도려내고 무질서하게 주워붙인 판잣집들이었다. 철호는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레이션 갑을 뜯어 엎은 처마가 어깨를 스칠만치 비좁은 골목이었다. 부엌에서들 아무데나 버린 뜨물이 미끄러운 길에는 구공탄재가 군데군데 헌데 더뎅이 모양 깔렸다."

일제의 신사 간판을 뜯어다 집을 만들다

경성호국신사 1943년 일제가 패망하기 바로 직전 대륙침략전쟁에 한창일 당시 전쟁전사자를 추모하고 승전 분위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건설한 신사가 바로 경성호국신사다. 일제는 경성호국신사 건립에 조선인들의 강제동원하고, 신사 건립 이후에도 신사참배에도 더욱 열을 올렸다.

마지막 발악이 끝난 이후 얼마 못가 일제의 항복과 함께 경성호국신사도 채 2년을 버티지 못한 채 문을 닫게 되었다. 그 호국신사의 간판을 떼어다가 집을 만들어 살았다고 증언을 할 정도로 해방촌은 산비탈 점유로부터 시작된 마을이다.

선천 미용실. 해방촌에는 평북 선천 주민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선천 미용실. 해방촌에는 평북 선천 주민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 설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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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들의 집단거주지 해방촌

철호의 어머니는 지주의 딸이다. 해방을 맞이하고 시집올 때 입었던 홍치마를 꺼내 입고 환영을 나갔던 어머니가 바로 남쪽으로 쫒겨오고, 전쟁을 겪으며 어머니는 도저히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가 없게 되었다.

해방촌은 평북선천주민들의 집단 거주지역이다. 북한의 토지개혁에 반발해 남쪽으로 피난을 온 선천 주민들은 다시 돌아가기 위해 함께 모여 살았다고 한다. 함께 모여살 곳으로 택한 곳이 바로 해방촌이 되었다. 남산자락과 일본의 군사기지 사이에 동네에 불법점유가 용이한 곳이었기에 선택되었을 것이다.

"가자, 가자"를 외치는 철호의 어머니는 결국 월남, 38선, 전쟁 등 비참한 현실과 화해하지 못했다. 해방촌 주민들은 어땠을까? 철호는 이제 미라같은 모습으로 악다구니를 쓰는 어머니가 있는 지옥같은 집에서 나와 어둠이 깔리기까지 산비탈에 앉아서 밤하늘에서 정남북을 본다. 북두칠성이 가르치는 정남의 방향은 바로 고향집이다. 예전 시절로 돌아가기 위해 함께 모여 살았던 해방촌 주민들은 긴 기다림을 어떻게 견디어 오고 있을까. 돌아갈 수 없는 현실과 화해할 수 있었을까 궁금해진다.

해방촌 신흥시장내 국수가게. 아직도 손으로 국수를 뽑아서 팔고 계신다.
 해방촌 신흥시장내 국수가게. 아직도 손으로 국수를 뽑아서 팔고 계신다.
ⓒ 설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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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물주의 오발탄

"아들 구실, 남편 구실, 애비 구실, 형 구실, 오빠 구실, 또 계리사 사무실 서기 구실. 해야 할 구실이 너무 많구나. 그래 난 네 말대로 아마도 조물주의 오발탄인지도 모른다. 정말 갈 곳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건 가긴 가야 한다..."

아내가 죽고서야 철호는 앓던 이를 뺄 수 있었다. 인정하기 싫은 경멸스러운 양공주 누이동생이 준 돈으로 말이다. 철호의 자기 분열은 극에 달한다. 아내의 죽음 앞에 앓던 이를 빼고서야 시원함을 느낀다. 그리고 갈 길을 잃는다. 아내의 병원으로, 권총강도로 남동생이 잡혀있는 경찰서로 아니 집으로 도무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한다. 그제서야 철호는 그렇게도 증오하던 어머니와 같이 "가자", "가자"를 외친다. 갈 길을 잃은 철호를 실은 택시는 목적도 모르고 방향도 모른 채 대로행렬에 끼어 달리고 있다. 소설의 마지막은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한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해방촌 입구 모습
 해방촌 입구 모습
ⓒ 설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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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을 걸어보자

토대와 상부구조. 오발탄의 철호를 설명하는데 이보다 더 적절한 비유는 없을 것이다.
소설작품에서 인물이 상부구조라면 배경은 바로 토대라는 비유를 할 정도로 소설의 배경은 소설의 중요한 요소이다. 특히 해방촌, 용산은 소설 속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다.

해방촌이 매력적인 동네로 거듭나고 있다. 남산이라는 자연경관과 서울에서 보기 쉽지 않은 옛골목의 흔적이 젊은 청년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그 중심에 신흥시장이 있다. 얼마전까지만해도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해 쇠락해가던 어두침침한 외관이 안타까웠던 신흥시장이 이제 다시 새로운 신흥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젊은예술가들 작업장, 연예인의 책방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이번주엔 해방촌을 걸어보자. 걷기 전 <오발탄> 읽기에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 매우 다행스러운 건 <오발탄>만 단일 제작된 도서는 없다. 그만큼 소설이 매우 짧기 때문이다. 소설 속 해방촌을 발견하는 특별한 재미를 얻게 될 것이다.



태그:#오발탄, #해방촌, #이범선,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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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대안적 개발을 모색하고, 생태환경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불평부당한 사회를 민의 힘을 믿고 바꿔 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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