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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서울살이와 직장생활을 내려놓고 제주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서른일곱 살 늦은 나이에 '육아'의 세상에 갑자기 던져져 온갖 추태를 보이며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육아 중인 모든 이들에게, 이렇게 웃기고도 모자라게 육아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드리기 위해 좌충우돌 육아일기를 연재해보려 합니다. - 기자 말

남편과 나는 동갑내기로 서른네 살에 만나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2년 정도 장거리 연애를 했다. 나는 직장생활 10년 차를 향해가고 있었고, 남편은 이런저런 이유로 서른이 훌쩍 넘어 취업했을 때였다. 하지만 나이가 있어서 그런지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꽤 빨리 시작되었다.

"돈은 없지만 내랑 결혼하면 좋은 점이 있데이. 시누이도 없고, 형님 동서도 없고, 심지어 시부모는 멀리 섬에 계신다."

남편은 우스갯소리로 자신의 특장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지만 여차저차하여 나는 시부모님이 있는 바로 그 섬에서 결혼해 시집을 지척에 두고 살게 되었다.

세상에 '이런 시어머니' 없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시어머니는 손주 맞을 준비를 아주 단단히 하셨다. '아이돌보미' 교육을 받고 1년 가까이 다른 집 아이들을 봐주는 일을 하셨다. 당신도 37년 전에 하나뿐인 자식을 키워본 일밖에 없어 요즘 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육아하는지 보고 싶으셨던 것이다. 그런 덕에 어머니는 나보다도 훨씬 육아용품이나 정보를 더 많이 아셨다.

할머니 사랑은 엄마가 주는 사랑에 비할 수 없는 것 같다. 은발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할머니
▲ 할머니와 손주 할머니 사랑은 엄마가 주는 사랑에 비할 수 없는 것 같다. 은발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할머니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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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신생아 시절, 어머니는 거의 '두 집 살림'을 했다. 아침에 우리집에 와 살림을 도맡아 하고, 저녁에 다시 댁으로 건너가 아버님 식사를 준비했다. 어머니는 굉장히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성향이다. 제주로 이주하기 전까진 제사를 비롯한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도맡아 하는, 그 시대 전형적인 어머니셨다.

나의 친정엄마는 좀 달랐다. 엄마의 시부모는 일찍 돌아가셨고, 집안일을 꼼꼼하게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내가 아주 어릴 적부터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셨고, 나는 자주 할머니나 이모에게 맡겨졌다. 온 집안이 기독교라 제사는 접해보지 못했다. 요리하는 엄마의 모습은 좀 생소할 정도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나는 경제적 신체적으로 부모에게서 독립했다. 대학교 등록금 대출금도 내가 직접 벌어 갚았다. 부모님께 독립적인 성향은 물려받았으나, 집안 살림에 관한 부분은 사실 '제로'에 가까웠다.

그런 내게 전혀 다른 어머니가 생긴 것이다. 어머니는 아이를 낳으러 가는 내게 "친정엄마처럼은 못해도 최선을 다하마"라고 말씀하셨다. 산후조리를 받으며 나는 종종 어머니께 이야기했다.

"우리 친정엄마는 이렇게 못해요. ㅎㅎ"

시어머니가 차려주신 생일상. 서른일곱번째 생일. 이후로도 나는 미역국을 100일 정도 매일 먹었다. 미역국을 끓여주시던 어머니도 내가 정말 대단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 출산 후 며칠 뒤 받은 생일상 시어머니가 차려주신 생일상. 서른일곱번째 생일. 이후로도 나는 미역국을 100일 정도 매일 먹었다. 미역국을 끓여주시던 어머니도 내가 정말 대단하다고 혀를 내둘렀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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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부터 열까지 헌신적으로 가족을 챙기는 어머니가 위대해 보이고, 존경스럽고,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론 어머니의 젊은 시절이 안쓰럽고 아까웠다. 또 어머니는 한 번도 내게 "이렇게 해라" 하지 않으셨지만, 나 또한 어머니처럼 해야 되는 건 아닌가 걱정되기도 했다. 제법 내 힘으로 잘 살아왔다고 자부했는데, 갑자기 아기가 되어 모든 일에 도움받아야 할 존재가 된 것 같아 조금 불편하기도 했다.

'모유'를 믿는다는 건...

고맙고 죄송해서 몸 둘 바를 알지 못하는 와중에도, 서운한 감정은 또 그 감정대로 올라왔다. 첫 번째는 '모유 수유' 때문이었다. 나는 최소한 1년 정도 모유 수유를 하고 싶었고, 조리원에서 고군분투하며 열심히 모유량을 늘려가고 있었다. 그런데, 집으로 와 어머니가 조리해주시던 처음엔 거의 모유를 먹이질 못했다.

아이가 계속 빨아줘야 모유가 늘어난다는데, 내가 아이에게 젖을 물리면 어머니는 금세 분유를 타 와서 옆에 앉아 "엄마 쭈쭈 그만 먹고, 분유 먹어"라고 하셨다.

이 땅의 손주가 배곯는 것을 견디는 할머니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모유는 도통 답답한 음식 중 하나였다. 많이 먹은 건지 적게 먹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젖을 먹다 잠들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런 면에서 어머니는 '아기가 배부르게 먹지 못한 건 아닌가' 걱정이 되셨을 거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이 투명했으면 좋겠단 생각, 젖병처럼 눈금이 그려져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게다가 어머니는 아들을 키울 때 모유의 상태가 좋지 않아 분유를 먹였단다. 분유로 갈아타자마자 아들이 쑥쑥 자랐던 기억이 어머니에겐 선명하게 남아 있었을 것이다.

나도 아직 내 가슴을 믿지 못하는데, 모유에 관한 한 어머니 앞에서 나는 '절대적 약자'였다. 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다. 이후 아이가 모유를 너무나 좋아하게 되는 바람에 분유는 자동적으로 멀어졌지만, 신생아 시절 아니, 그보다 훨씬 이후에도 나는 참 모유 수유를 어렵고 고단하게 생각했다.

아이의 발목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종아리의 살이 붙어가는데도,  나는 늘 내 모유량을 의심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 포동포동해져도 아이의 발목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종아리의 살이 붙어가는데도, 나는 늘 내 모유량을 의심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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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쑥쑥 자랐고, 장딴지는 '이만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굵어졌다. 그래도 나는 늘 모유량을 의심했다. 모유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것이구나. 세상 모든 '완모맘(완전한 모유 수유를 하는 엄마)'들을 존경하게 되었다.

아이가 10개월에 들어선 지금은 이유식과 분유와 모유를 혼합해 먹이고 있다. 아이가 맛있게 먹을 때마다 행복하고 즐겁다. 불과 몇 달 전 일인데도 까마득해진 지난날을 뒤돌아보며, 난 왜 모유량에 그렇게 집착했을까, 노심초사했을까, 생각하게 된다. 좀 더 행복한 수유를 했어도 됐으련만. 젖 물고 자면 잔다고 걱정하고, 또 젖을 금방 먹으면 왜 이렇게 짧게 먹나 걱정하며 지냈다. 지금은 '굳이 왜 그랬을까' 생각하게 된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어느 책의 제목처럼,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아, 그때 왜 그랬을까? 좀 더 여유로워도 됐는데, 좀 더 느긋해도 됐는데' 할 때가 많다. 사실 인생 대부분의 날들이 그렇지 않을까? 사람을 용서하지 못했을 때, 조급한 마음에 닦달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그중에서도 육아는 정말 최고봉인 것 같다. 정답이 없는 일을 늘 결정하고 선택해야 하니, 나는 선택한 일을 금방 후회하는 일이 잦았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갈팡질팡하고, 후회하고, 사소한 일에 상처받거나 걱정하면서, 나는 누군가의 말처럼 '육아(育我)는 아이가 아니라 나를 기르는 일'이라는 말을 절감하게 되었다.

모유 수유에 관한 일도, 가부좌 틀고 모유 먹이는 대신 며느리가 좀 더 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신 거란 걸 이제는 잘 알고 있다. 어머니는 종종 "내가 아이를 볼 테니, 가서 산책하고 와, 운동하고 와, 좀 걷고 와, 때 목욕하고 와"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나는 아이가 100일이 될 때까지, 그렇게 먼저 허락해주시는 시간을 누리질 못했다.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으면서, 그래도 아이 곁을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젖살이 오를대로 오른 아이의 발. 저 발로 걸을 수 있을까 걱정하던 때가 있었다.
▲ 부종 아닙니다 젖살이 오를대로 오른 아이의 발. 저 발로 걸을 수 있을까 걱정하던 때가 있었다.
ⓒ 윤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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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일이 지난 지금은?

이제는 "어머니, '나갔다 오라' 분부만 하십시오. 내가 그 말씀 받잡고 외출하겠나이다"라고 말한다. 그 덕분에 '일주일에 한 번, 서너 시간'을 고정적으로 누리게 되었고 조금씩 일도 시작하게 되었다. 아이를 낳기 전에도 어머니와 사이가 좋았지만, 육아를 하며 나는 어머니와 더 두터운 '전우애' 같은 것이 생겼다.

"시댁이 가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지 몰라요."
"야야, 우리 아들이 너 꼬실 때 '시댁이 섬에 있다'고 그랬다며?"

나는 생각날 때마다 잊지 않고 어머니께 감사함을 표현한다. 어머니 역시 당신이 살아온 시대의 며느리 모습은 당신의 대에서 끊고자 애쓰신다. 보상받으려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함께 있을 때 많이 대화한다. 다른 세대에 살아간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함께 살아간다. 평화를 지니며 살아가고 있다.


태그:#육아, #시어머니, #모유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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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도 순식간에 뒤집어 즐겁게 살 줄 아는 인생의 위트는 혹시 있으면 괜찮은 장식이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힘의 본질이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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