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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탄핵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역행하던 민주주의가 순행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런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민주주의가 역행과 순행을 오락가락한다면, 그것은 정상국가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민주주의가 흔들리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현재의 이른바 '87년 체제'를 출범시킨 것은 '6월 항쟁'입니다.

그리고 6월 항쟁을 위해 자기 삶을 바친 많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열혈투사들이 모였던 곳이 '민주화운동청년연합'(약칭 민청련)이었습니다. 이글은 민청련에 젊음을 바친 수많은 – 일부는 정치인으로서 유명인사가 됐고, 다수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투사로 남은 – 청년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입니다.   

오늘 우리 민청련동지회가 민청련의 역사를 쓰고자 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했던 지난 시기의 노력들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기억하고 공유하는 일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다시는 후퇴하지 못하도록 하는 중요한 버팀목이 된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 기자 말

[야비]와 [전망]

1980년에서 1983년 사이 학생운동이 전두환 정권의 살벌한 탄압 속에서도 조직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70년대 유신독재 하에서 헌신적으로 투쟁했던 이른바 '빵잽이'(감옥살이 한 사람) 선배들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이들 선배그룹은 1980년 5월 '서울의 봄' 당시에 복학생으로서 민주화투쟁의 한 축을 이루었다. 그러나  5.17 쿠데타 이후 이들은 안기부 등 정보기관의 24시간 감시대상이 되어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그중 상당수는 구속, 강제징집, 취직 등으로 운동 일선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부 활동가들은 대학 서클 후배들과 연결해 학생운동의 흐름을 관찰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학생운동을 지원했다. 그중 하나가 당시 대학가에 은밀히 회람되었던 지하 팸플릿이었다.

1980년대 전반기 학생운동가들 사이에 떠돌던 지하 '팜', [전망]과 [야비]. 모두 타자자기로 친 뒤 등사기로 인쇄했다.
 1980년대 전반기 학생운동가들 사이에 떠돌던 지하 '팜', [전망]과 [야비]. 모두 타자자기로 친 뒤 등사기로 인쇄했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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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맨 처음 학생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며 영향을 주었던 팸플릿이 [야학비판(약칭 야비)]이었다. 당시 운동권에 널리 퍼져 있던 노동현장론에 근거해서 쓴 [야비]는 학생운동의 한계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했다. 학생운동이 무모하게 시위만을 강조하면서 학생대중으로부터 고립되고, 연이은 구속으로 운동역량의 손실을 초래했으며, 그러면서도 독재정권에 직접적인 타격을 가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학생운동만으로 한국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으므로 노동현장에서 노동대중을 의식화 조직화하는 작업을 수행할 것을 강조했다. 이 주장은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투쟁을 강조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학생시위를 자제하고 노동현장에 투신하여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는 준비론으로 받아들여질 소지가 있었다.

이 팸플릿에 이어 [학생운동의 전망(약칭 전망)]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이 대학가에 돌아 의식있는 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전망]은 [야비]에 대한 비판의 성격이 강했다. [전망]에서 필자는 학생운동의 가장 큰 임무는 선도적 정치투쟁을 통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당시 학생운동의 반독재 시위투쟁을 적극적으로 엄호했다. 이것은 당시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들 사이에서 퍼져 있던 이른바 '준비론'을 경계하고, 학생운동의 전투적 역할을 강조한 것이다.

이 당시에는 [전망]의 집필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나중에 유기홍(서울대 77학번), 오세중(서울대 77학번), 소준섭(외대 78학번) 등이 쓴 것으로 밝혀진다. 이들은 이후에 모두 민청련 창립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 팸플릿도 민청련 창립을 준비하는 이범영(서울대 73학번, 1994년 작고) 등과 일정한 교감 하에서 작성된 것으로 알려졌다. 

[전망] 필자들의 최근 모습. 왼쪽부터 오세중, 유기홍, 소준섭.
 [전망] 필자들의 최근 모습. 왼쪽부터 오세중, 유기홍, 소준섭.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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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운동의 싹

1970년대에 학생운동으로 학교에서 제적되거나 옥고를 치른 학생이 1000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 대다수가 '민중지향적' 사회변혁을 꿈꾸는 지식청년들이었다. 이들은 민중들, 즉 억압받는 가난한 노동 대중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고락을 같이 하고, 언젠가 '각성된' 민중들과 함께 불의한 권력을 타파하여 민중이 주인되는 사회 변혁을 이루어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대개 중산층 출신이었던 지식 청년들이 노동 대중들 속에 들어가 일생을 함께하는 결단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이들 중 일부만이 노동자, 농민의 생활 현장에 투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청년들이 생계를 위해 직장을 구했는데, 감옥에 갔다 온 전력 때문에 공직이나 대기업 취직은 어려웠다.

그들은 대부분 일반 중소기업에 취직하거나 영세한 출판사에 다녔고, 아니면 번역 같은 자유업에 종사했다. 소규모 사회과학 출판사를 직접 경영하기도 했다. 이들은 박정희가 죽고 나서 1980년 3월에 대부분 복학하였고, 5월에 '서울의 봄'을 겪었고, 5.17 이후 다시 제적되어 학교에서 쫓겨났다. 1980년대 초 이들 중 일부는 노동 현장으로 들어갔고, 많은 사람들은 다시 직장을 구했고, 일부는 거리에 실업자로 남았다.

그들 중에는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전두환 정권에 대한 투쟁과정에서 독재정권의 수배령이 떨어져 도피생활을 해야 하는 도망자 그룹이 있었다. 이들은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해 신분을 숨기고 사는 긴장된 생활 속에서도 민주화를 향한 신념을 잃지 않고 군사정권의 타도를 위한 모색을 멈추지 않았다. 이들이야말로 어쩌면 직업적 운동가에 가장 근접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 속에서 새로운 청년운동의 싹이 텄다.

민청련 창립을 논의한 주요 인물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문국주, 심재권, 이명준, 박우섭, 박계동.
 민청련 창립을 논의한 주요 인물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문국주, 심재권, 이명준, 박우섭, 박계동.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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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 건설 논의의 진원지 - YB그룹과 OB그룹

민청련 같은 공개정치투쟁 단체의 필요성은 학생운동 출신자들 속에 상당히 광범하게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지만 구체적인 조직 건설 논의에는 대략 두 갈래가 있었다.

하나는 이범영, 박우섭(서울대 73학번, 현 인천 남구청장)을 중심으로 한 70년대 초중반 학번, 상대적으로 젊은 그룹이고, 또 하나는 조성우(고려대 68학번, 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최민화(연세대 69학번) 등 60년대 후반 학번들로 상대적으로 나이가 든 그룹이었는데, 당시 전자를 YB그룹, 후자를 OB그룹이라 불렀다.

YB쪽 논의의 시발은 광주항쟁 이후 수배 상태에 있던 도망자 그룹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981년 가을부터 인천 구월동 한 주공아파트에 일군의 도망자들이 모여 살았다. 여기에는 1980년 5.17 계엄확대조치 때부터 전두환 정권에 의해 내려진 포고령으로 수배 중이던 박우섭, 문국주(서울대 73학번), 소준섭과 청계노조 위원장으로 노동운동 관련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민종덕이 있었고, 여기에 공식수배는 아니었지만 정보기관의 요시찰 대상이었던 이범영, 박승옥(서울대 73학번) 등이 합류하여 함께 모여 살았다.

구월동 아파트 단지는 연탄을 때는 5층짜리 서민아파트였다. 그들이 살던 집은 보증금 50만 원에 월세 5만 원을 내는 방 2개짜리 아파트였다. 이 작은 아파트는 이집 저집 동가숙서가식하며 불안한 도피생활을 하던 도망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보금자리였다. 이들이 이렇게 모여 살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준 사람이 민주화운동의 전설적 인물 신동수였다. 신동수는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있던 이들 수배자들을 한 명씩 이 아파트로 데려왔다. 신동수는 구월동 아파트를 구하는 것에서부터 생활비 조달까지 세심하게 돌봐주었다.

광주항쟁 이후 전국에 배포된 수배자 벽보 중 민청련 관련자들. 왼쪽부터 문국주, 심재권, 이명준, 박우섭, 소준섭, 박계동.
 광주항쟁 이후 전국에 배포된 수배자 벽보 중 민청련 관련자들. 왼쪽부터 문국주, 심재권, 이명준, 박우섭, 소준섭, 박계동.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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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구월동 주공아파트 단지 안에 김근태가 살고 있었다. 당시 김근태는 수배상태에서 부인 인재근과 혼례를 올리지 않은 상태로 동거하면서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에서 비공식 실무자로 일할 때였다. 수배자 중 제일 나이가 어렸던 소준섭은 신동수의 소개로 김근태의 집에서 살다가 구월동 아파트 수배자들과 합류하였다. 신동수는 김근태의 경기고 동기동창이면서 오랜 민주화운동 동지였다. 그리고 주공아파트 단지 옆 한신아파트 단지에는 이명준(중앙대 68학번)이 살았고, 여기에는 또 수배상태의 심재권(서울대 66학번, 현 국회의원), 박계동(고려대 71학번)이 드나들었다.

김근태를 포함한 구월동 일곱 사람은 자주 만나 어울려 놀았고, 밤새 열띤 토론도 벌였다. 때로는 옆 단지의 이명준과 박계동이 함께 어울렸다. 이들은 틈나는 대로 정세를 논하고 군부독재에 맞서 저항운동을 조직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하여 논의했다. 생활비는 각자 아르바이트 등을 해서 조금씩 보탰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선배로부터 번역 일거리를 맡아서 하기도 하고, 풀무원의 무공해 두부와 콩나물 배달 일도 했다.

당시 원혜영(서울대 71학번, 현 국회의원)이 무공해 식품을 공급하는 풀무원이라는 회사를 막 창립하였는데 신동수가 이 회사에 관여하면서 도망자들의 일거리를 물어왔다. 수배자들은 모두 가난했지만 내 것 네 것 없이 공동체 생활을 했다.

1981년 말에 이곳에 드나들던 박계동이 마산에서 밀항을 시도하다가 실패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는데 그 여파로 구월동 수배자들도 몇 주간 다른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다시 모이는 해프닝이 있었다.

1982년 3월 부산미문화원 방화사건이 일어나고, 범인을 추적하던 경찰이 수배자의 소행으로 판단하고 수배자 9명을 공개 수배했다. 이때 박계동, 박우섭, 문국주, 소준섭의 얼굴이 한동안 TV 화면에 대문짝만하게 공개됐다. 결국 이때 강화된 경찰의 추적으로 박계동, 문국주는 체포되었다. 박계동은 마을 반상회에서 수배자의 얼굴을 확인한 집주인의 신고로 검거됐다. 그리고 비슷한 때 문국주도 신호등을 보지 않고 무심코 길을 건너다 어이없게도 교통경찰의 단속에 걸려 체포됐다.

그러나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도 구월동 아파트 합숙생활은 1983년 초까지 계속되었다. 비록 불안정하고 어둡던 시절이었지만, 모두들 미래를 낙관하였고 뜨거운 투지와 사명감에 불타 있었다. 휴일에는 근처 공원에서 농구도 했다. 나중에 김근태는 이 농구가 김근태와 구월동 식구들의 연대감을 높여주었고 이런 유대감이 나중에 민청련 창립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농구는 날렵한 김근태와 키가 큰 이범영이 잘했고, 박우섭은 몸은 날쌨지만 골 넣는 실력은 젬병이었다.

박우섭은 골은 잘 못 넣었지만 연애는 잘했다. 수배생활 중에도 대학 연극반 때부터 닦은 탈춤을 반도상사 노동조합 노동자들에게 가르쳤는데, 제자 중에서 눈망울이 초롱하고 수더분한 여성조합원 이미영이 마음에 들었다. 둘은 몰래 사귀기 시작했고, 급속히 가까워졌다. 박우섭은 1982년 어느 날 이미영을 구월동으로 데려와 방 두 개 중 한 개를 차지하고 동거를 시작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나머지 방 한 개로 밀려났다. 이 수배자들과 생활하는 속에서 부인 이미영은 1983년 1월에 첫 아이 기모를 출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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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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