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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의 꿈을 꾸고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했다. 수많은 언론사가 있지만 흔히 '언론고시'로 불리는 언론사 합격의 문턱은 높았다. 2014년 한 종교방송사 라디오PD 공채가 있었다. 채용 조건은 '정규직'. 그 방송사는 '지역 인재'를 선호한다고 밝혔다. 나는 스스로 적임자라는 생각에 설렜다.

열심히 준비했다. 이력서를 적는 내내 한 땀 한 땀 심혈을 기울였다. 33세 언론사 신입지원. 이것이 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그리고 합격전화가 왔다. 뛸 뜻 기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이번 공채에서 사장님께서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비정규직으로 근무를 하시되 1년 뒤 정규직 채용으로 계약 하면 좋겠습니다.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거절 한다면 차 순위 후보에게 입사 기회가 넘어 갑니다."

난감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합격의 기쁨을 누릴 시간적 여유도 없이 찾아온 벼락같은 통보였다.

'그래 받아들이자, 지금 아니면 늦은 나이에 어떻게 신입으로 언론사를 갈 수 있을까, 또 1년뒤 정규직을 시켜 준다니 믿어보자!'

1년 후 재계약 시점, 나는 또 계약직으로 한 해를 연명했다. 결국 2년의 문턱을 넘기지 못한 채 회사는 인턴을 대규모 채용하고 내겐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언론적폐청산' 신호가 들려왔다, MBC 채용공고 소식도 들려왔다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사옥앞에서 보도국 기자 81명이 공정보도 보장과 김장겸 사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제작 거부를 선언하고 있다.
▲ "MBC를 다시 국민 품으로!" 기자 81명 제작거부 선언 11일 오전 서울 마포구 상암동 MBC사옥앞에서 보도국 기자 81명이 공정보도 보장과 김장겸 사장 퇴진 등을 요구하며 제작 거부를 선언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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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잠시나마 계약직으로 2년간 전공에서 배운 걸 살려본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33세 때의 고민을 35세가 된 지금까지 하고 있다. 인생은 역시 고민의 연속이다.

2년이라는 세월 동안 언론 지형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땡전 뉴스' 시절을 겪었던 언론사는 '땡이 뉴스' '땡박 뉴스'를 거쳤고,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의 촛불을 들고 나왔다. 나 역시 그 촛불 중 하나였다.

그리고 새롭게 열린 시대, 지난날 적폐가 청산될 것이라는 희망을 안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요즘이다. 암울했던 지난 10년의 언론 탄압 문제가 새로운 방송통신위원장의 임명과 함께 나아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반대편에서는 최장 파업 170일의 기록에도 불구하고 뜻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던 MBC 구성원들의 제작거부와 함께 공지된 경력사원의 채용 소식이 들려왔다.

누구에겐 절망이지만 누구에겐 희망이다. 경력사원 채용이라는 소식에 지난 2년의 경력이 혹시 도움이 될까 생각돼 유심히 살폈다.

언론학도로서 멋진 언론인이 되겠다던 다짐에 부끄러워지는 행동이 아닐 수 없지만, 바늘구멍 뚫기보다 힘들다는 언론사 채용 공고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건 어쩔 수 없다.

비난 받을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공정언론을 위한 언론인들의 투쟁에 간신배처럼 무임승차 하려 한다고 욕 먹을 게 뻔했다.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언제 '메이저'라고 불리는 그 언론사에 들어갈 수 있을까.

부끄러움을 애써 합리화하며 혹시 라디오 PD도 채용하지 않을까 희망을 걸어봤다. 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라디오PD는 채용하지 않았다. 나의 지원 의사 역시 사그라들었다. 그 방송사에는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비평은 자유되 비난은 삼가자... 누군가에게는 '생명줄'이니까

MBC 경력 채용을 알리는 기사의 댓글엔 '부역자' '원서 쓰는 순간 언론에 먹칠하는 인간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제발 이번에 원서 넣지 맙시다' 등 다시 MBC가 국민의 신임을 얻는 방송사로 발돋움하길 응원하는 글들이 적혀 있었다.

나 역시도 저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력서를 쓸 때 가장 먼저, 방송의 공공성과 공정성에 대한 내 견해를 적던 사람이 나였다. <방송학개론> 1페이지를 내 사명과 같이 외우던 사람이 나였다. 짧게나마 무임승차하려고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럽다.

하지만, 경력사원 채용에 응시하려 하는 수많은 언시생(언론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비난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들 또한 직업인으로서의 언론사 입사가 아닌 참 언론인을 희망하는 사람들일 게다. 적게는 몇 년간 기회를 노리던, 많게는 몇십 년간 꿈을 꾸던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채용'이라는 소식은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생존이 걸린 문제니까 말이다. 비평은 하되 비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까지 함께하던 모 방송사 라디오 작가의 말이 떠오른다.

"요즘엔 라디오 PD 채용 하긴 힘들 거예요. 정년퇴직 한 사람들을 내부 계약직 채용으로 다시 채용하기 때문에 신입채용이나 경력 있는 외부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이 한정적 이예요."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언론인의 자세를 언시생들에게 강요하지만 정작 언론사들은 잠재적 후배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또한 언론에 헤게모니를 가진 거대 언론사의 구성원들은 군소 언론인의 처우에 대해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는가? MBC경력사원 채용에 관한 문제를 보면서 나는 언론을 공부한 한 사람으로서 딜레마에 빠지게 됐다.


태그:#MBC채용, #언론파업, #MBC파업, #언론고시, #공정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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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시민, 일반인, 평민, 대한민국 대표 흙수저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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