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영화나 소설, 만화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음식들. 군침이 절로 나오는 이야기 속 음식 레시피와 그에 얽힌 잡담을 전한다. 한 술 뜨는 순간 장면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음식 이야기를 '씨네밥상'을 통해 풀어낼 예정이다. - 기자 말

하루 하루 정신없이 해치울 뿐인 삶, 눈 앞에 쌓인 일들을 처리하느라 더 큰 것은 생각조차 못하고 아니 나중으로 미뤄두는 매일매일. 이에 염증을 느낀 이들은 '슬로우 라이프'를 꿈꾸지만 이 역시 온갖 '힐링물'을 소비하는 것으로 끝날 뿐, 이게 별다른 대안이 되는 것 같지는 않다.

때문에 대표적인 슬로우 라이프 지향의 힐링 영화로 꼽히는 <안경>을 지금에 와서 진지하게 감동하며 보는 것은 다소 바보같다. 이미 우리는 <안경>이나 <카모메 식당> 등 오기가미 나오코 표 영화를 모티브로 한 카페와 식당이 홍대와 망원동과 제주도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을, 그 열화 버전의 콘텐츠를 수없이 목격하고 소비했다.

그런데도 최근의 한국 예능이 상당 부분 이런 '힐링 리얼리티'에 기대고 있으며 이것이 대중들의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슬로우라이프 지향의 힐링물을 대체할 별 다른 대안도 없어보인다. 이러한 삶의 방식을 제안하는 것은 다소 안일하지만, 나에게도 별 다른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영화 <안경>도 따지고 보면 대책없이 낙관적인 힐링물은 아니다. 이 영화는 어딘지 염세주의적인 기운을 풍기며 힘이 빠져 있어 나른한 맛이 있다. "에-?"로 대표되는 얼빠진 반응으로 엉뚱한 리듬을 확보하는 캐릭터 등 일본 힐링물 특유의 전형성을 대충 넘어가기만 하면 편안하게 보기 좋다.

무엇보다도 모래 사장을 하릴없이 파는 귀여운 시바견과 맛있는 음식과 카세 료와 바다와 바다와 바다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으니, 이게 이 영화의 진정한 미덕이라 할 만하다.

"사쿠라상의 맛있는 빙수가 있습니다"... 평화로운 바다와 빙수

영화 <안경>에서 메르시 체조를 하고 있는 모습
 영화 <안경>에서 메르시 체조를 하고 있는 모습
ⓒ 영화 <안경>

관련사진보기


"빙수 있어요."

한적한 바닷가에 홀로 캐리어를 끌고 온 타에코, 그런 그녀를 향해 빙수를 권하는 할머니 사쿠라. 바닷가의 작은 목제 가건물에서 오직 빙수만 판매하는 사쿠라 또한 타에코가 묵을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 섬에서 나고 자란 제철 재료로 아침, 점심, 저녁을 제공하는 한적한 숙소 '하마다'.

"뭐하는 중이에요?"
"메르시 체조입니다."
"메르시?"
"같이 하시지 않겠습니까?"
"아 저는 괜찮아요."

아침에 일어나 숙소 앞의 해변에 간 타에코는 사쿠라 상과 마을 주민들이 다 함께 율동을 맞춘 체조를 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이 마을은 도대체 어떤 마을이지?' 의아한 마음을 품고 아침 식탁에 앉은 타에코.

"그것 직접 제가 만든 겁니다, 매해 담그죠. 올해는 작년보다 맛있게 된 것 같은데 말이죠."
"음 소금 간이 절묘하네요."
"매실은 그날의 화를 면해준다고 해서 아침에 먹은 매실 장아찌가 하루의 화를 피하게 해준다는 말이있지요."
"매실 장아찌와 친구는 오래 묵을 수록 좋다고 하지만 글쎄요... 저는 그렇게 오래된 친구가 없어서."

우메보시를 앞에 두고 싱거운 대화를 나누는 숙소 주인 하마다와 사쿠라, 타에코는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저 오늘 관광을 하려고 하는데 추천해줄 만한 데 없을까요?"
"관광?!"
"네."
"이 근처를요...? 이 근처는 관광을 할 만한 데가 없는데요..."
"그럼 여기 놀러온 사람들은 대체 뭐하는 거죠?"
"... 사색...?"

휴식 겸 관광을 하러 섬을 찾은 타에코지만, "무슨 관광을 하냐"며 의아해 하는 사람들. 사실 많은 여행 중 상당수가 유명하다는 곳, 미리 찾아본 핫 플레이스에 가는 루트로 가득차 있을 뿐, 비움과 휴식과는 거리가 멀지 않던가. 우리는 여행에 가서도 '최소의 자원으로 최대의 경험과 만족'을 느끼려고 아둥바둥한다.

여유로운 '분위기'의 장소에 가서 그 여유로움을 소비하고 '여유로움을 즐기는 나'를 의식한다. '#힐링'이라는 해시태그는 세상에서 제일 힐링과 거리가 멀다. 모든 여행이 비움과 휴식으로 차 있을 필요는 없다. 빡빡하게 일정을 채워둔 여행도 미덕이 있다. 하지만 힐링물의 대표 영화로서 <안경>은 "모름지기 '힐링'이라면 이 정도로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지!!"라고 말하는 듯하다.

"사색이라는 게 이 동네의 풍습같은 건가요?"
"그런 거창한 건 아니고 습관같은 걸까나...? 사색을 특별히 잘 하는 사람들이 모였있달까요."
"그럼 여기엔 사색 말고 뭐가 있죠?"
"다른 거라..."
"그럼 타에코씨는 사색이 아니면 도대체 여긴 뭐하러 오신 거죠?"
"에?... 뭐 여러가지..."
"뭐 아무것도 없지만 여기엔 맛있는 고기와 빙수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쿠라상의 맛있는 빙수가 있고..."
"저는 빙수는 좋아하지 않아서..."

결국 타에코는 도통 이 숙소와 이곳의 사람들이 못미더워 다른 숙소로 옮기려 길을 떠난다. 하지만 그녀가 맞닥뜨린 곳은 숙박업소의 탈을 썼지만 대안적 삶을 제시하느라 다 같이 모여 농사를 짓고 일을 해야하는 공동체, 좌절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숙소로 돌아온다.

그리고 숙소에 살며 메르시 체조를 고안하고 빙수를 파는 의문의 할머니 사쿠라에게 호감을 느끼고, 사색 빼고는 별 다른 할 일이 없는 그곳의 삶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타에코를 찾는 제자 요모기군(카세료 분)이 와 합류를 하고 바다를 앞에 두고 낮맥을 하고 뜨개질을 하고 이웃이 준 랍스터를 쪄 모두 함께 나눠 먹고, 더 이상 평화로울 것 없는 매일매일이다.

영화 <안경> 속 타에코는 점점 이곳에서의 시간에 빠져든다.
 영화 <안경> 속 타에코는 점점 이곳에서의 시간에 빠져든다.
ⓒ 영화 <안경>

관련사진보기


"이거 얼마죠? 빙수."
"좀 전의 얼음 아저씨한테는 얼음을 받았습니다."
"에?"
"소녀에게는 종이접기."
"그렇군요... 저는 어떻게..."

그렇게 빙수가 싫다던 타에코도 결국 사쿠라의 빙수를 먹게 된다. 직접 쑤운 팥을 그릇 바닥에 깔고 알갱이가 살아있도록 얼음을 사각사각 갈아 시럽을 뿌리는 것이 다지만 무엇보다 맛있는 빙수. 파란 바다 앞에 앉아 봄바람 맞으면 먹는 차가운 빙수라니, 맛없을 리가 없잖아! 싶달까.

"팥을 삶을 때 중요한 것은 조용히 지켜보는 것, 조급해하지 않는 것."

현자처럼 보이는 사쿠라 할머니는 여름의 기척이 시작된 어느날 아침, 빙수집 문을 닫고 홀연히 사라진다. 그녀도 타에코처럼 이곳을 방문한 사람일 뿐, 해마다 봄이 되면 왔다가 봄과 함께 떠난다. 타에코 역시 봄이 되면 이 조용한 마을에 와 사색 빼고는 할 일 없는 일상을 보내다 갈 양인가보다. 다음 해 봄, 사쿠라와 타에코 요모기는 약속한 듯 마을 어귀에서 인사를 나눈다.

[씨네밥상 레시피 - 번외 편] 오키나와식 빙수 젠자이를 찾아서

카페 겸 레스토랑 산스시의 호지차 젠자이
 카페 겸 레스토랑 산스시의 호지차 젠자이
ⓒ 강윤희

관련사진보기


영화 <안경>의 촬영지는 오키나와에서 또 한 번 배를 타고 들어가는 '요론섬'. 여름 휴가를 맞아 영화 <안경>에 나오는 일본식 빙수 '카키고리'를 바닷가 앞에서 먹겠다는 일념으로 오키나와로 향했다.

일본식 빙수인 카키고리는 요즘 유행하는 우유얼음이나 눈꽃 얼음과는 다른 물얼음에 시럽을  뿌린 심플한 버전으로 이것저것 부재료가 많이 들어가는 우리나라의 팥빙수와는 조금 다른다. 영화 <안경>에 나오는 카키고리에는 사쿠라가 직접 쑤운 팥을 까는데 이는 오키나와식 빙수 '젠자이'로 다른 지방에서 '젠자이'라고 하면 보통 팥죽을 가르키지만 오키나와에서만은 '젠자이'가 팥을 넣은 빙수를 말한다. 가게에 따라 우유얼음을 쓰는 곳도, 그냥 얼음을 쓰는 곳도 있고 경단과 아이스크림, 다양한 과일맛 시럽 등이 더해지기도 한다.

처음 방문한 곳은 산 속에 위치한 레스토랑 겸 카페 '산스시', 카레우동과 덮밥 등의 식사 메뉴와 함께 젠자이로 유명한 곳이다. 여기서 시킨 것은 호지차 젠자이, 얼음에 호지차 시럽을 듬뿍 뿌리고 경단과 아이스크림, 팥을 추가한 버전이다. 바닥에는 강낭콩을 달게 쑨 것이 깔려 있는데 하나도 뭉그러지지 않을 정도로 알알이 살려 뭉근하게 익힌 것이 특징으로 오키나와의 젠자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호지차의 개운한 맛이 만족스러웠던 곳이다.

하지만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바닷가의 카키고리, 혹은 오키나와식 젠자이. 태풍으로 항구가 폐쇄되어 다른 섬으로 못 가는 상황이라 요론섬이나 민나섬 등을 포기하고 들른 오키나와의 아무 해변, 오키나와 현지인들도 수영을 하러 오는 유원지인 듯한 곳에 갔다. 그곳에서 만난 것은 간 얼음에 멜론 시럽만 뿌린 250엔짜리 싸구려 카키고리, 수영 후 물기를 대충 닦고 수건을 두른 채 먹는 그 카키고리의 맛은 어린 시절의 여름을 떠올리게 했다.

코우리비치의 멜론 카키고리
 코우리비치의 멜론 카키고리
ⓒ 강윤희

관련사진보기


유원지의 들뜨고도 쓸쓸한 분위기, 입 안에 남아있는 바닷물의 소금기과 뒷통수를 찌르르 하게 하는 차가운 빙수의 맛. 예정에도 없었고 오키나와식 젠자이도 아니지만 그 합성착향료의 카키고리 맛이 내가 원하던 여름 방학의 맛이었다.

가장 맛있는 젠자이를 만난 곳은 작고 서민적인 '히가시 식당'에서였다. 동네의 어귀에 위치한 식당, 주변 중학생들이 학교가 끝나면 배를 채우려 몰려들고 동네 할아버지가, 아빠와 딸이, 식구가 단골로 드나드는 곳. 관광객들에게는 '젠자이 맛집'으로 알려졌지만, 동네 주민들에겐 밥집으로도 유명하다. 체육복을 입은 여중생 무리 옆에 앉아 오키나와 소바와 찬프루동을 시켜 먹으니 과연 동네 맛집이라 할 만했다.

별 달리 특별할 것 없지만 잘 만든 맛있는 맛, 소바는 슴슴한 듯 간간하고 찬프루동의 달걀은 오버쿡 되지 않고 촉촉한 것이 젓가락질을 재촉했다. 밥을 다 먹었으니 젠자이를 먹을 차례, 가게 벽면에 붙은 일본 잡지에서는 이곳의 젠자이가 소개되어 있었고 옆 테이블의 여중생들도 밥을 다 먹고 어느새 한 사람 앞에 하나씩, 1인 1빙을 하고 있었다. 크기가 꽤나 큰데도, 아빠와 함께 온 10살 남짓한 꼬마 아이도 제 몫의 젠자이를 따로 시켜 차가움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한 그릇을 다 비워냈다.

우유얼음에 다양한 과일맛 시럽과 팥, 아이스크림의 유무를 고를 수 있었고 욕심을 부려 세 가지 맛 시럽에 팥이 더해진 '버라이어티 버전'을 골랐다. 달콤한 우유 얼음, 그와 완벽하게 어우러진 유치한 맛의 세 가지 시럽(딸기, 바나나, 멜론)은 각각의 맛을 냈고 그릇 바닥엔 큼직하고 달콤한 강낭콩과 매끄러운 경단이 채워져 있었다. "아아-맛있어-" 한 입 먹을 때마다 찌르르 기뻤고, 밑의 강낭콩까지 먹자니 배가 심각하게 불렀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젠자이를 다 먹을 즈음에는 가게의 천장에 달린 작은 TV에서 누군가가 '심경 폭로 인터뷰'같은 것을 하고 있었는데 가게 안의 사람들의 시선이 거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일본어를 몰라 무슨 말인지도 모르지만 덩달아 같이 TV 속에서 울고 있는 여자를 보았다. 나한테는 완벽했던, 오키나와의 한 순간.

히가시 식당의 삼색 젠자이
 히가시 식당의 삼색 젠자이
ⓒ 강윤희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강윤희는 음식잡지에서 기자로 일하다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푸드라이터. 음식에 관련된 콘텐츠라면 에세이부터 영화, 레시피 북까지 모든 것을 즐긴다. 영화를 보다가 호기심을 잡아끄는 음식이 나오면 바로 실행.



태그:#영화 안경, #오키나와, #빙수, #젠자이, #카키고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