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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하시겠어요?"
"네, 계란말이요."


계란말이 주문이 들어왔다. 그럼 난 속으로 '아싸~계란말이'하고 흐뭇해 하며 주방으로 향한다. "언니, 계란말이요" 그러면 언니는 넉넉히 계란물을 풀어 손님들에게 드릴 폭신폭신 두툼한 계란말이를 만들고, 남은 계란물로는 내가 먹을 계란말이를 해주신다.

저녁에 일하려면 잘 먹어야 한다며 이것저것 먹을 것을 권하시는 사장님과, 저녁에 먹으면 속이 더부룩하다며 매번 잘 안 먹는 나. 그런데 유독 계란말이라면 눈빛을 반짝이며 잘 먹는 걸 본 사장님은 주문이 들어오면 항상 내가 먹을 양까지 함께 준비해 주신다. 나를 아는 지인들이라면 내가 얼마나 계란말이를 애정하는지 다 알고 있을 정도로 나는 계란말이 덕후다.

뭐, 양파며 당근까지 들어갈 필요도 없다. 짜도 괜찮고, 싱거워도 괜찮다. 그냥 계란말이 모양만 하고 있어도 이미 그걸 보는 순간 행복해지니 나의 계란말이 사랑이야 말해 무엇하리오(그래서 예전 애인은 음식점에 갔다가 메뉴에 계란말이가 없으면 따로 돈을 드릴 테니 계란말이를 해달라고 하곤 했더랬다. 그 사장님이야 어이없었겠지만, 나는 매번 감동).

아마 각자에게 생각만 해도 몽글몽글 기분이 좋아지는 힐링푸드는 하나쯤 있을 거다. 그런 건 대개 거창하고 비싼 메뉴가 아닌 경우가 많다. 재료는 감자뿐인 데다 기름을 잔뜩 먹었지만 고소하기만 했던, 어릴 적 할머니가 해주신 감자전이나 학창시절 학교 끝나고 친구들이랑 같이 나눠 먹던 00분식집의 대형 돈가스 같은 음식들.

그리고 계란말이, 코다리조림, 소고기 무국,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힐링 푸드들 (메뉴를 쓰는 것 자체로도 미소가 배시시 감돌고야 마는). 써놓고 보니 이 메뉴들 모두 우리 엄마가 제일 잘하시는 음식들이다.

어쩌다 보니 '엄마'가 된 그녀

별거 아닌 음식이라도, 누구에겐 소울푸드일 수 있다.
 별거 아닌 음식이라도, 누구에겐 소울푸드일 수 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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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 아빠는 신안의 작은 섬에 살고 계신다. '섬'이라고 하면 고운 모래가 있는 해수욕장, 배 타고 나가 손쉽게 잡아 오는 온갖 해산물 등 낭만 넘치는 상상이 먼저 떠오를 테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저 서른 가구 안팎의 할매, 할배들이 고추며 마늘, 양파 농사를 짓는 아주 작고 조용한 섬이다. 즐길 거리, 놀 거리가 없으니 다른 큰 섬들처럼 찾는 이들도 없어 고요하기 그지없는 그런 곳이다.

하루에 두 차례 육지와 섬을 연결하는 배가 다니다 보니 아무래도 엄마 아빠에게 찾아가는 건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내야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자주 찾아가질 못하는 편인데 가끔 시골집에 가면 엄마는 아침 내내 먹을 걸 준비하신다. 선착장에 마중나온 아빠의 차를 타고 집 앞에 도착하면 엄마는 앞치마 바람으로 나와 나를 맞이하고, 집에 들어서면 이미 한 상이 떡하니 차려져 있다.

코다리 조림, 소고기뭇국, 오징어가 들어간 미나리 초무침... 그럼, 난 신나게 고 녀석들을 먹느라 바쁘고 엄마 아빠는 그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신다. 내가 시골에 도착해서 가장 처음으로 맞는 우리 집의 풍경이다.

그런데 잠깐, 여기서 중요한 게 있다. 앞에 써놓은 메뉴들이 엄마가 유일하게 잘 하시고 즐겨하시는 음식들이라는 거다(엄마, 죄송해요 ^^). 나는 육개장이라는 음식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대학 식당에서 처음 알았고, 집에서 닭볶음탕을 해 먹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들었다.

대학가 식당에서 팔던, MSG가 들어간 달달한 부대찌개는 얼마나 맛있었던지... 대학 시절, 집에선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을 먹으며 맛의 신세계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 같은 음식만 해주셨던 걸까'.

압해도라는 작은 섬. 사람 좋고 놀기 좋아해서 경제적으론 무능했던 아버지와 그런 남편 덕에 생활력 하나는 누구보다 강했던, 아마도 요즘 태어났다면 무엇이든 하나는 야무지게 해냈을 어머니 사이에서 막내 딸로 자란 우리 엄마.

어렸을 때부터 농사일이며 집안일을 해야 했던 다른 이모들과 다르게 엄마는 막내딸인 이유 하나로 그런 일을 하지 않고 자랐단다. 세상 모르게 이쁨받고 자란 엄마는 여러 번 선을 보다가 아빠를 만났고, 절절한 구애에 넘어가셨다. 아빠가 살던 동네와 엄마가 살던 동네가 꽤 떨어진 곳이었는데, 엄마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몇 시간 동안 자전거를 굴려 찾아왔다고. 엄마는 그 날, 그 모습을 '감동'으로 기억하기보다 '아빠가 신고 온 고무신이 그렇게나 촌스러웠다'고 이야기하셨지만 말이다.

답장 한번 없는 엄마를 향해 수십 통의 러브레터를 쓰신 이야기도 있다. 나름 문학소년이었던 아빠는 어린왕자 책을 필사해서 보내는 로맨틱함을 발휘하셨더랬다. 엄마가 그 편지에 감동했을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엄마는 그렇게 문학소년 같이 순수하고 수더분한 모습에 끌려 아빠와 결혼을 선택했다. 성실한 교인이었던 엄마를 만난 아빠는 그때부터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게 되었고 당시 다니던 교회 목사님의 권유로 늦깎이 신학생이 되었다. 내가 엄마의 배 속에 있을 때 일이다.

시골에서 농사짓던 시절이니 모아놓은 돈도 없고, 큰딸은 3살, 둘째 딸은 아내의 배 속에 있던 때. 아빠는 그래도 시골에서 쌀이며 반찬거리를 싸 들고 가 동기들과 함께 밥 해 먹으며 다녔던 신학대 시절이 지금 생각하면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절이었노라고 추억하시곤 했다. 뭐, 물론 시집살이하랴, 아이 돌보랴 홀로 고군분투했을 엄마와는 별개로 말이다. 그렇게 늦깎이 전도사가 된 아빠와 갑작스레 섬마을 교회의 목회자 아내가 된 엄마.

"난 그때 교회 사모는 화려한 옷도 입으면 안 되고, 무조건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옷도 검은 색, 치마도 롱 치마만 입고 다녔어."

그 시절 엄마의 회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다른 이들이 보기에 미숙하기 이를 데 없는 엄마였다. 몇 가지 반찬도 할 줄 몰라 딸내미 도시락 반찬은 항상 고정적이었고(매일 도시락을 열면 계란말이와 김치뿐이었다. 내가 계란말이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듯) 딸이 중학생 즈음 되면 생리를 하게 될 거란 걸 미리 이야기할 줄도 몰랐다(그래서 언니는 처음 생리하던 날, 자신의 몸에서 피가 나오는 걸 보곤 죽을 병이 걸린 건 아닐까 혼자 엄청 고민했단다. 나야 물론 언니가 미리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줘서 그런 어처구니없는 고민을 하진 않았지만).

사춘기 시절, 매주 일요일 집으로 찾아오는 남성 집사님들이 꼴도 보기 싫어 문 걸어 잠그고 있는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기보다는 매번 '나와서 인사해라', '차 가져다 드려라' 하는 이야기로 예민하기 이를 데 없었던 나와 계속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 여성주의를 만나고 우리 사회 여성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조금씩 공부하며 그녀를 이해하게 됐다. 내 주변의 지인들이 초보 엄마가 되어 좌충우돌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 시절, 나보다 더 어렸을 엄마를 떠올렸다. 아무리 작은 시골 교회라지만 집사님들에게 욕 안 먹는 사모가 되려 아등바등, 이런저런 눈치를 보고 또 봤을 20대의 우리 엄마.

아이가 열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라나는 딸들에겐 무슨 이야길 해줘야 하는지, 성질이 고약한 사춘기 딸들에겐 어떻게 반응해주는 게 좋은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을 우리 엄마. 그래, 그때 엄마도 모든 게 낯설었을 테고 두려웠을 거다. 이걸 알게 된 후로 나는 그 시절의 엄마가 짠해졌고, 또 고마워졌더랬다.

이제부턴 오롯이 당신의 인생을 살길

완경파티 현장.
 완경파티 현장.
ⓒ 김미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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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우리 단체에서 완경기(폐경이라는 말이 주는 부정적 느낌 때문에 '완경'이라는 대안어를 쓰고 있다) 여성분들을 모시고 파티를 연 적이 있었다. 여성들의 생애주기에 맞춘 월경의 경험을 연극으로 공연하고, 완경을 지난 여성 두 분을 모시고 토크 콘서트 형식으로 이야기를 나눴던 자리다.

그 날, 객석에 앉아 연극 공연을 보는데 옆자리에 앉은 대학생 딸과 엄마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는 걸 보았다. 그러다 연극의 클라이맥스 즈음, 우는 엄마를 토닥토닥하는 딸을 보며 몇 해 전 나의 엄마가 떠올랐다.

엄마에게 완경이 찾아오고 갱년기를 지나며 엄마가 무척 힘들어한다는 이야길 들었었다.

"느그 엄마, 요새 좀 이상해야. 신경질도 늘고, 아주 나를 잡는다 잡아."

웬만하면 이야길 잘 안하시는 아빠도 그 시절 나랑 통화할 때면 한참이나 하소연했다. 그 때는 뭐가 그리 바빴던지 나 사는 것에만 집중해 있던 터라 그냥 "엄마 갱년기니까 이해해"라고 말하곤 지나갔다.

그날, 완경파티 내내 그런 엄마에게 무심하기 이를 데 없던 것이 너무나 미안해졌다. 지금의 나였다면 엄마의 완경도 함께 축하하고, 소소하게 둘만의 여행도 가고 했을 텐데 말이다.

"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엄마는 아니었다. 이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대체로 잊어버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엄마를 착취하기가 편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 이다혜 에세이집 <어른이 되면서 더 큰 혼란이 시작되었다>

며칠 전, 에세이집을 읽다 "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엄마는 아니었다"는 문구에서 잠시 멈춰섰다. 이 당연한 사실 앞에서 무릎이 꺾이는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을 키우며 고군분투하고 있는 내 친구이자 누군가의 '엄마'인 그녀들에게, 그리고 며칠 전, 매일 아이들을 야단치고야 마는 자신은 '나쁜' 엄마인 것 같다는 글을 SNS에 올려 내 마음을 좀 아프게 했던 언니에게, 그리고 '엄마'에게 이 문장을 읽어주고 싶다.

이번 추석, 엄마에게 드릴 예쁜 꽃다발을 하나 사서 가야겠다. 그리곤 이야기해야지.

"엄마, 그동안 낯설고 어색했을 엄마 노릇 하느라 애 많이 쓰셨어요. 이제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가 아닌 엄마의 인생을 사세요. 아 참, 나 엄마표 계란말이 먹고 싶어요. 예전 사시사철 도시락에 들어가 있던 그  폭신폭신, 도톰한 계란말이요^^"



태그:#계란말이, #엄마, #완경, #갱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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