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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만의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현행 헌법의 한계가 개헌 동기는 민주적이었지만, 실제 개헌 내용에는 시민이 참여하지 못했다는 것이라면 이번 개헌은 어떻게 시민들이 직접 참여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시민 참여 개헌에 대한 시민사회단체의 의견을 '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에서 제작한 카드뉴스와 함께 연재한다. [편집자말]

새 헌법을 어떠한 내용으로 채우느냐 하는 것 이상으로 헌법 개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 내용을 누가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선거로 선출한 국회에 입법권을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정치 체제의 가장 근본이 되는, 그리고 가장 큰 사회계약인 헌법 개정에 있어서만큼은 주권자인 국민이 단순히 국민투표 방식이 아닌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제도가 요청된다.

바로 이 점에서 아일랜드의 시민주도형 개헌 사례를 살펴봄으로써 국회가 아닌 시민이 중심이 된 개헌의 방향에 대해 모색하고자 한다(분량 상, 기사에서는 아일랜드의 사례만 다루며, 아이슬란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시민주도형 개헌 사례는 아래 첨부한 파일을 참조하라).

아일랜드의 헌법회의(The Convention on the Constitution)

2008년 아일랜드를 휩쓸었던 최악의 경제위기는 '정치개혁'을 제1의 정치 어젠다로 만드는 데 기여했으며, 2011년 총선에서 주요 정당들은 헌법 개정에 시민 참여를 보장할 것을 약속했다. 2012년 2월 정부안이 발표됐고, 7월 양원은 헌법회의 설립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헌법회의는 의장을 포함하여 총 100명 규모로 구성되었다. 정부에 의해 임명된 1명의 의장, 66명의 일반 시민 그리고 33명의 의원으로 이루어지는데, 일반 시민은 선거인 명부를 기반으로 하여 선출하되 최대한의 대표성을 확보하기 위해 여론조사 회사가 선발 작업을 전담토록 하였다. 참고로 각종 부대비용은 헌법회의에서 지급하지만 시민 구성원이 된다고 해서 금전적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정당원 및 로비 단체 회원 여부, 사회·정치적 문제에 대한 관심도 등은 참가 배제의 사유가 되지 못하였다.

일반 대중의 참여가 중요함을 강조하며 홈페이지를 통해 컨벤션 활동을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홈페이지에는 각종 보고서 및 제안서가 업로드 될 뿐 아니라 전체회의를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정부는 총리실 공무원이 관리하는 사무국을 설립하여 업무를 보조하도록 지원하였다.

헌법회의는 총 10회 이상 소집되었으며, 주말을 이용하여 하루 반나절 동안 진행되었다. 각 회의는 미리 배포한 자료에 대한 전문가들의 발표, 이슈의 찬반 입장에 따라 나뉜 집단 간 토론, 조력자(facilitator)와 기록담당자(notetaker)가 배석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라운드테이블 논의로 구성되었다. 토요일의 심의가 끝난 후 일요일 오전, 구성원들은 전날의 논의에 대해 재고한 후, 표결에 참여하였다. 참고로 헌법 회의의 모든 결정은 다수결의 원칙을 기반으로 하는데, 동수일 경우 의장이 캐스팅 투표권을 행사했다.

안건 중 대통령 출마자격을 35살에서 21살로 낮추는 것(헌법회의는 대통령 임기 단축 의제를 자체 토론 결과 부결시키는 대신 후보 나이를 낮추는 방안 마련)과 동성결혼 허용 등 2건은 의회 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국민투표에 부쳤다. 대통령 출마 나이를 낮추는 것은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으나, 동성결혼은 통과했다.

톰 아널드 의장은 최종 보고서에서 헌법회의의 활동을 "아일랜드의 정치적 삶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 평가하였다. 공정한 방식으로 정보가 제공되고 질문할 기회가 주어지며 적절한 논의의 장이 형성된다면, 시민은 얼마든지 복잡하고 기술적인 이슈에 대해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합리적인 정책적 결정을 도출할 수 있음을 증명해 보였다.

시민들 중 추첨으로 선발한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

헌법회의 활동이 활발했지만 의회에서 보수파의 반발 등으로 그 성과가 충분하지 못하였고 의회의 이런 미온적인 태도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이와 함께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논쟁거리 중 하나인 낙태 문제가 헌법 개정 논의를 위한 시민의회 구성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아일랜드 수정헌법 제8조에서는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생명권을 인정함으로써 낙태를 전면 금지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2016년 총선 뒤 엔다 케니 총리 등 집권당은 시민의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시민의회가 다루게 될 안건은 낙태와 국민투표, 인구 고령화 대책, 기후 변화, 선거일 고정 문제 총 다섯 가지로 결정되었다.

정부는 7월 27일, 대법원 판사인 메리 러포이(Mary Laffoy)를 의장으로 임명한다. 곧이어 9~10월에 걸쳐 이루어진 99명의 시민 구성원은 무작위로 선출하되 인구조사에 반영된 인구통계학적 변인을 대표하도록 조정하였다. 대표성의 원리를 훼손하지 않기 위해 참여를 독려하는 금전적 인센티브는 주어지지 않았다. 헌법회의와는 달리, 시민의회가 숙고할 의제와 관련된 시민단체 혹은 이익집단의 회원으로 소속된 경우 참여할 수 없도록 하였다.

시민의회 활동의 초석은 다름 아닌 시민들의 '심의'이기 때문에, 각 회의 때마다 이를 촉진하기 위한 원탁회의(roundtable discussions) 세션을 여러 차례 제공한다. 원탁회의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전문가나 초청된 연사의 프레젠테이션 이후 구성원들이 들은 내용에 대해 토론하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할 수 있도록 마련된 비공개 세션이다. 다른 하나는 때때로 시민의회의 특정한 문제, 예컨대 권고안이 어떻게 형성되어야 하는가와 같은 문제에 대해 한층 더 상세히 고려할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원탁회의를 계획한다.

비공개 세션을 제외한 전체회의(plenary meeting)의 전 과정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생중계한다. 이는 시민의회의 주요 원칙 중 하나인 개방성을 위한 것으로, 완전한 투명성에 기반한 운영을 위해 회의 공개는 물론 홈페이지에 업로드되는 모든 문서는 무료로 열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서면 제안서(written submissions)는 일반 대중 뿐 아니라 이익단체로부터도 제출받았으며, 더 나아가 직접적으로 시민의회에 대변되지 않은 이주민(diaspora), 18세 미만의 청소년 등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부문으로부터 의견을 들을 수 있도록 완전히 개방되었다. 첫 회의 이후 약 9주간 제출받은 제안서는 우편을 통해 5000건 이상, 온라인으로 8000건 이상을 기록하였다. 이는 헌법회의에 제출된 모든 제안서의 수보다 다섯 배나 많은 것이다.

헌법의회의 후임자 격인 시민의회는 현재 진행 단계에 있지만, 몇 가지 측면에서 헌법회의의 활동에 제기되었던 냉소적 시각을 털어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첫째, 헌법회의와 달리 시민의회는 일반 시민에게만 참여 자격을 부여했다. 이러한 사실은 일반 시민에 대한 전에 없던 정치적 신뢰를 전제하고 있다. 둘째, 시민의회는 1년 동안 총 다섯 가지의 안건에 대해 숙고함으로써 논쟁적이고 복잡한 사안에 대한 학습에는 보다 긴 시간을 투자하는 등 심의의 속도를 스스로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시민의회에 대한 세 번째 기대의 근거는 시민의회가 다루는 안건의 현저성(saliency)에 있다. 시민의회를 촉발시킨 지점에는 수정헌법 제8조, 더 나아가 아일랜드를 지탱해온 습속에 대한 논쟁이 자리하고 있다. 즉 현저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써 구상된 시민의회는 단순한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라는 비판을 피해갈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국가적 분열을 초래해온 이슈에 대해 아일랜드 사회의 전 부문을 대변하는 '미니 공중(mini-public)'이 숙고하는 것에는 상징적이고 근본적인 중대성이 존재한다.

시민주도형 개헌, 우리는?

위에서 상세히 소개한 아일랜드 사례와 역시 시민주도형 개헌을 추진한 아이슬란드, 그리고 남아프카공화국 사례는 그 절차나 방식 등에서 상이하다. 그러나 공통된 것은 그 역할의 차이는 있었지만 바로 시민이 주체가 되었다는 점이다.

필자가 참여하는 추첨민회네트워크에서는 지난 2월 윤소하 의원(정의당)을 통해 법안을 입법청원한 바 있다. 의석수에 따른 헌법개정특위가 아니라 국회 차원에서 추첨을 통한 시민의회를 구성해 헌법 개정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성, 연령, 지역을 고려한 추첨 방식으로 진행하며 추첨을 통해 선발된 이들에게 참여 여부를 확인 후 거부할 경우 같은 사회경제적 배경을 가진 예비후보자 중에서 충원해나가는 방식을 취하면 될 것이다. 규모는 통계적 대표성 및 예산 등을 고려해 최대 500명을 넘지 않되 최소 300명은 되어야 할 것이다.

추첨시민의회에서 개정안 하나하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요구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무리가 있을 것이다. 아일랜드의 경우도 정해진 의제에 한두 가지 추가 의제를 자체적으로 선정해 심의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추첨시민의회가 완전히 새로운 개정안을 마련하기는 기대할 수 없다.

대안으로 국회 의석을 갖고 있는 정당들은 먼저 정당 차원에서 헌법개정안을 마련하여 시민의회에 제출하게 하고 일정 수 이상의 서명을 받아 시민단체가 헌법개정안을 제출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다. 이들 안을 갖고 분과별 위원회를 구성해 온라인에서 논의하고 한 달에 한두 번 오프라인에서 전체 회의를 개최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개정안을 제출한 정당 및 시민단체는 시민의회에 출석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전체 회의는 한 달에 한두 번 주말을 이용해 1박 2일 과정으로 운용하고 TV나 인터넷으로 생중계한다. 분과별 온라인 논의는 인터넷 전자공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일반 시민과 연계 역시 상시 유지된다. 시민의회 홈페이지에 게시판을 마련함으로써 의견 제시가 가능하도록 한다.

이와 함께 공청회를 개최함으로써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취합할 수 있다. 시민의회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한 개정안을 국회에 보내면 현행 헌법에 따라 국회에서 3분의 2 이상 동의를 얻어 국민투표에 회부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올 연말까지 개헌안을 마련하겠다고 하는 정치권이 시민참여 개헌 방식을 받아들일 것이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시민사회가 헌법개정 내용에 이것을 담아야 한다고 정치권을 상대로 운동을 하기 앞서 시민참여 개헌 방식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올 연말까지는 시민참여 개헌 방식을 정치권이 수용할 수 있도록 운동을 지속하면서 어떠한 방식의 시민참여기구를 만들지에 대한 논의 역시 전개함으로써 내년 초 시민참여 개헌기구를 국회 차원에서 출범시킬 수 있도록 목표를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사실상 내년 6.13 지방선거 때 국민투표 회부는 물 건너가게 된다. 예산과 투표율의 문제가 있겠지만 지방선거와 동시에 꼭 국민투표를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아니면 대통령이 명확한 약속을 표명한다면 2020년 국회의원선거 때 국민투표에 회부해도 될 것이다.

시민사회는 이와 함께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혁을 위한 시민의회 방식을 관철시키는 운동을 병행함으로써 2020년 총선 때는 현행 소선거구제가 아닌 국민의 의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선거제도 개혁을 가져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시민참여 개헌 플랫폼 바로가기 (http://bit.ly/시민개헌)

덧붙이는 글 | 이지문 기자는 추첨민회네트워크 집행위원장입니다. 본 기사는 지난 7월 19일 개최된 '시민참여 개헌, 어떻게 만들 것인가' 토론회 자료를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바꿈 홈페이지에 중복 게재됩니다.



태그:#개헌, #민주주의, #정치, #사회,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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