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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옛길을 넘어 강릉 선교장을 가다

문수성지 오대산 월정사에서 하룻밤 묵으며 오욕에 물든 세속의 찌꺼기를 조금이라도 씻어보려고 애를 써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고희를 살아오는 동안 쌓아온 두터운 업장을 어찌 일순간에 씻을 수 있겠는가?

오히려 고요한 산사에 가부좌를 틀고 있으니 번뇌만 더욱 죽 끓듯이 이글거린다. 우매한 중생은 소음으로 가득 찬 속세에 한 점으로 남아 있음이 오히려 도심 속의 한 점 티끌 섬이 되어 더 자유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번뇌가 죽 끓듯이 무진할 바에야 속세에 머리를 처박고 있음이 오히려 약이 되지 않을까? 가부좌를 풀고 대관령이나 넘어가 바닷바람이나 쏘이자. 나는 다음 날 이른 아침 서둘러 대관령 옛길로 차를 몰았다. 고속도로를 타면 시간이야 빠르겠지만 어두운 땅굴을 지나가는 것이 답답할 것 같아서였다.

와우! 대관령(832m) 고개 마루턱에 다다르니 시야가 탁 트이고 운무에 싸인 동해바다가 한 폭의 산수화처럼 펼쳐진다. 오랜만에 넘어보는 대관령 옛길이다. "오길 잘했어. 가부좌 틀고 앉아있는 것보다 훨씬 좋아!" 역시 나는 색(色)을 좇는 속물인가 보다.

대관령(해발 832m) 옛길에서 내려다 본 강릉 시가지와 동해바다. 99고개에 이르는 대관령은 영동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관문역할을 해왔다.
 대관령(해발 832m) 옛길에서 내려다 본 강릉 시가지와 동해바다. 99고개에 이르는 대관령은 영동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관문역할을 해왔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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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은 예나 지금이나 서울로 가는 강릉과 영동의 관문이다. "장백산에서 산맥이 구불구불 비틀비틀 남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동해가를 차지한 것이 몇 곳인지 모르나, 이 영(嶺)이 가장 높다. 산허리에 뻗은 길이 아흔 아홉 구비인데, 서쪽으로 통하는 큰 길이 있다." 신증동곡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조선시대 인문지리서)에 나오는 이 내용은 고개의 규모가 크고, 영동~영서를 잇는 주요 관문이라는 데서 '대관령(大關嶺)'이라는 지명이 유래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일찍이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이 "울고 왔다가 울고 떠난다"고 읊었던 대관령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 험준한 대관령을 울며 넘어왔다가 떠날 때에는 강릉의 따뜻한 인심에 이별을 안타까이 하며 울며 떠나가곤 했다는 고개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435~1493)과 율곡 이이(李珥, 1536~1584)가 넘어 다녔고,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관동팔경과 금강산을 유람하기 위해 넘나들었다.

강릉에는 율곡이 탄생한 오죽헌을 비롯하여, 관동제일루 경포대,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방해정, 금란정, 취영정 등 명승지가 수두룩하다. 그런데 유독 조선시대 고택인 선교장이 마음에 꽂힌 것은 열화당 뒤뜰에 핀 배롱나무 꽃의 유혹 때문일까?

비단 그뿐 만은 아닐 것이다. 이 고택이 필자와 한 직장에서 근무를 했던 지인(선교장 집주인 이강륭:전 조흥은행장)이 살았던 집이기도 했기에 연줄을 따라 선교장이 불현 듯 떠올랐는지도 모른다. 오래전 우연히 선교장에 들렀을 때 열화당 뒤뜰 거대한 배롱나무에 핀 그 붉은 꽃의 유혹을 잊을 수가 없다.

배롱나무 꽃은 온천지가 녹색일변도인 한여름에 화려하게 피어나 100일 동안 붉은 꽃 잔치를 벌여준다. 나는 선교장 뒤뜰에 핀 붉은 배롱나무 꽃의 유혹에 못 이겨, 아흔 아홉 구비를 한 달음에 내려와 곧장 선교장에 도착했다.

족제비가 점지해준 천하명당

선교장에 도착하여 가장 눈에 띠는 것은 역시 활래정 연못 주변에 화사하게 피어있는 배롱나무 꽃이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푸른 노송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아름다운 자태를 유감없이 뽐내고 있는 붉은 연지를 찍듯 피어있는 배롱나무 꽃은 요염하기까지 하다. 더욱이 활래정을 가득 채운 푸른 연잎에서 터져 나오는 연꽃과 어울려 여름 선교장의 모습을 더욱 환상적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족제비가 점지해준 천하명당 강릉 선교장 전경, 푸른 노송이 우거지고 배롱나무 꽃과 연꽃, 상사화가 피는 강릉 선교장은 여름이 아름답다.
▲ 강릉 선교장 전경 족제비가 점지해준 천하명당 강릉 선교장 전경, 푸른 노송이 우거지고 배롱나무 꽃과 연꽃, 상사화가 피는 강릉 선교장은 여름이 아름답다.
ⓒ 최오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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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장은 전주 이씨가(李氏家) 효령대군(1396~1486, 태종 이방언의 둘째아들) 11세손인 무경(茂卿) 이내번(李乃蕃, 1703~1781년)이 처음 자리를 잡은 조선시대 양반 고택이다. 무경은 충주에 살다가 강릉으로 옮겨와 저동(苧洞:경포대 주변)에 살았는데, 가산이 일기시작하자 좀 더 너른 터를 찾아다니던 중 지금의 터를 발견했다고 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어느 날 무경의 집 앞에 족제비 몇 마리가 나타나더니 나중엔 한 떼를 이루어 서서히 서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신기하게 여긴 무경은 그 뒤를 좇았다. 족제비들은 서북쪽으로 약 1km 떨어진 어느 야산의 울창한 송림 속으로 사라더니 그 많던 족제비 무리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신기한 생각에 한동안 망연히 서 있던 그는 정신을 가다듬어 주위를 살피고는 이곳이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명당이라고 무릎을 쳤다.

무경이 전후좌우로 터를 자세히 살펴보니 시루봉에서 뻗어 내린 낮은 산줄기와 송림이 평온하게 둘러쳐져 바람을 막고, 남으로 향해 서면 어깨와도 같은 부드러운 곡선이 좌우로 뻗어있었다. 왼쪽으로는 살아 있는 용의 형상으로 재화가 증식할 만하고, 오른쪽으로는 약진하려는 듯 내달린 언덕이 자손의 번창을 보여주고 있었다. 앞으로는 얕은 내가 흐르고, 그 바른편에는 안산과 조산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 천하의 명당 터였다.

하늘이 족제비를 통하여 이렇게 훌륭한 터를 이씨가에 내린 것이라고 믿은 무경은 그 해에 지금의 선교장으로 터를 잡고 이사를 하였다. 동물들은 인간보다 본능과 감각이 뛰어나다. 그러므로 동물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잠을 자는 장소는 명당 터가 많다. 족제비에 대한 이야기가 전승되어 오면서 최근까지 이씨가에서는 족제비를 영물로 보호하면서 뒷산에다가 족제비의 먹이를 가져다 놓은 풍습이 전해 오고 있다.

노송과 배롱나무 꽃에 둘러싸인 강릉 선교장은 효령대군 11세손 무경 이내번이 족제비를 따라 터를 잡은 명당이다.
▲ 강릉 선교장 노송과 배롱나무 꽃에 둘러싸인 강릉 선교장은 효령대군 11세손 무경 이내번이 족제비를 따라 터를 잡은 명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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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택

선교장의 터는 율곡 이이(李珥)가 탄생한 오죽헌으로부터 1.5km, 허균(許筠, 1569~1618)이 나서 자란 초당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2km 떨어져 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을 때 배를 타고 건너 다녔다 하여 '배다리(船橋里:선교리)'라는 이름을 가진 곳인데, 이 이름에서 비롯한 선교장은 지금은 논으로 변했지만 1981년까지만 해도 경포호였던 호수로 배를 타고 드나들었다고 한다.

무경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이씨가의 가세가 크게 번창하였다. 이씨가의 중흥기는 무경의 아들 자영(子榮) 이시춘(李時春, 1736~1785)과 손자 오은(鰲隱) 이후(李垕, 1773~1832) 때였다. 주위에서는 좋은 터를 잡은 덕분이라고 했다. 영동은 물론 강원도 일대의 상당 부분이 이씨가의 소유여서 '만석꾼'이란 칭호를 들었다. 당시 농사지을 만한 평야가 좁고 척박한 이곳에서 '만석꾼'이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만석꾼의 토지를 소유한 선교장은 당시 지역을 나누어 주문진 북쪽에서 생산되는 수확은 북촌에서 저장했고, 강릉 남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수확은 남촌에서 저장토록 했다. 다만 정동(경포면 일대)을 중심으로 한 강릉 지역에서 생산되는 수확만을 본가에서 수납 저장했다.

강릉 선교장은 전문가들의 설문조사에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꼽히고 있다.
▲ 강릉 선교장 강릉 선교장은 전문가들의 설문조사에서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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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 선교장은 여러 대에 걸쳐 많은 집들이 지어졌다. 선교장은 대지 3만평의 규모에 건물들이 '한일(一)'자 형태로 중세의 한옥 고성처럼 길게 늘어서 있다. 대문이 달린 행랑채와 안채, 사랑채, 동별당, 서별당, 연지당, 외별당, 사당과 정자까지 갖춘 완벽한 99칸짜리 조선 사대부가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큰 대문을 비롯한 열 두 대문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고, 지난 300여 년 동안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민간주택으로는 처음으로 국가지정 문화재(국가 중요민속문화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있다.

몇백 년 된 푸른 노송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붉은 배롱나무 꽃과 연꽃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선교장은 한국인들이 가장 선망하는 명당이다. 이 분야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선교장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꼽히고 있다.

전통문화체험관으로 거듭나는 선교장

선교장은 주인의 넉넉한 인심에다 뛰어난 풍광 덕분에 시인묵객과 유명인사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던 명소다. 조선시대 선교장은 관동팔경과 금강산을 구경하기 위해 수많은 시인묵객이 드나들며 교류의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어 선교장 행랑채에는 서화를 표구하는 장인이 상주하고, 환자를 돌보는 의원까지 둘 정도였다고 한다.

시인묵객 중에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 1820~1898),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같은 유명인사도 있었다. 추사는 삼십 세 전후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선교장에 들어 '홍엽산거(紅葉山居:붉은 잎으로 산에 깃들어 살겠다는 뜻)'라는 편액을 남겼다. 흥선 대원군은 이회숙(李會淑, 1823~1876)과 친하게 지냈는데, 선교장을 찾아 대련(對聯:문과 집 입구 기둥에 거는 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 작품들은 현재 선교장 민속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추사가 남긴 '홍엽산거(紅葉山居)' 현판. 원본은 선교장 민속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다.
▲ 강릉 선교장 추사가 남긴 '홍엽산거(紅葉山居)' 현판. 원본은 선교장 민속박물관에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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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많은 시인묵객과 유명인사들의 무전 사랑방이 되었던 강릉 선교장은 그들이 남긴 글과 그림등으로 가득 차 있다(강릉 선교장 민속박물관).
 조선시대 수많은 시인묵객과 유명인사들의 무전 사랑방이 되었던 강릉 선교장은 그들이 남긴 글과 그림등으로 가득 차 있다(강릉 선교장 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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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선교장을 자주 찾았다. 백범 선생은 광복 후 73세 되던 1948년 당시 선교장의 주인이었던 이돈의(李燉儀, 1897~1961) 선생에게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을 남몰래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것을 치하하는 뜻으로 '天君泰然(천군태연)'이란 휘호를 써서 기증을 했다.

이 휘호는 1962년 도난을 당했다가 52년 만인 2014년 1월 27일 한 수집가의 기증으로 선교장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당시 백범 선생은 또 다른 글씨 '天下爲公(천하위공)'이란 글도 써 보냈는데, 이 작품도 1962년에 없어져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최지 선정을 위해 내한한 IOC위원들을 위한 차회(茶會)가 활래정에서 열리기도 했다. 연간 20여만 명이 찾는 선교장은 이제 과거와 현재의 문화를 잇는 우리문화의 가교역할을 하며 전통문화체험관으로 거듭나고 있다.

연꽃 위에 둥둥 떠 있는 활래정

정문을 지나니 길 양편에 배롱나무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고, 미끈한 배롱나무 수피 밑에는 연분홍 상사화가 물결을 이루고 있다. 오른쪽으로 돌아서니 마치 연꽃 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정자가 눈에 확 들어온다. 시인묵객들의 교류 장소였던 활래정(活來亭)이다. 활래정 앞에는 인공호수를 파서 연꽃을 심고, 연못 주변으로는 배롱나무를 심어서 한껏 운치를 더하고 있다. 그래서 선교장은 활래정을 중심으로 붉은 배롱나무 꽃이 피어나고 연꽃이 곱게 솟아오르는 여름이 가장 아름답다!

붉은 배롱나무 꽃과 연분홍 상사화가 한창 피어있는 강릉 선교장 여름풍경
▲ 강릉 선교장 붉은 배롱나무 꽃과 연분홍 상사화가 한창 피어있는 강릉 선교장 여름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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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진 연 못 안에는 작은 섬을 만들고 그 섬에는 소나무를 심었다. 'ㄱ'자형의 활래정은 긴 돌기둥으로 받혔는데, 네 개의 돌기둥이 마치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선비가 발을 씻는 모습이랄까? 그러나 연잎이 무성한 여름은 소나무도 돌기둥도 연잎에 푹 파묻혀 연꽃 위에 정자와 소나무가 둥둥 떠 있는 느낌이 든다.

활래정은 1816년(순조 16년)에 오은(鰲隱) 이후(李厚)가 건립한 정자다. 오은거사는 과거에 응시를 했다가 낙방을 한 뒤 중앙정계 출입을 끊고 초야에 묻혀 은일지사로 지냈다.  중국 남송의 주자(朱子, 1130~1200)를 흠모했던 그는 활래정의 현판도 주자의 시 '관서유감(觀書有感)'에서 가져와 붙였다.

연꽃 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활래정은 1816녀넹 오은거사 이후가 건립한 정자로 주자의 관서유감 '근원으로부터 내려오는 물이 있음일세(爲有源頭活水來)' 에서 活자와 來자를 가져와 이름을 지었다.
 연꽃 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은 활래정은 1816녀넹 오은거사 이후가 건립한 정자로 주자의 관서유감 '근원으로부터 내려오는 물이 있음일세(爲有源頭活水來)' 에서 活자와 來자를 가져와 이름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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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자의 관서유감 중 '근원으로부터 끊임없이 내려오는 물이 있음일세(爲有源頭活水來)'에서 '활(活)'자와 '래(來)'자를 뽑아서 정자이름을 활래정(活來亭)이라 하였다. 실제로 활래정 연못에는 태장봉(선교장에서 약 4km 떨어진 야산)으로부터 끊임없이 맑은 물이 흘러들어 온다.

활래정 처마 밑과 기둥에는 빈 공간이 없을 정도로 각각 다른 글씨체로 쓴 편액과 주련이 걸려 있어 눈길을 끈다. 처마 각 면에는 무려 6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그 중 흰 바탕에 초록색으로 쓴 예서체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의 글씨다. 해강은 한국 근대를 대표하는 서화가이다. 편액 하나하나가 모두 조선시대 명필 서예가들의 글씨다.

처마 각 면에는 무려 6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흰 바탕에 초록색으로 쓴 예서체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쓴 편액. 해강은 한국 근대를 대표하는 서화가이다. 편액 하나하나가 모두 조선시대 명필 서예가들의 글씨다.
▲ 강릉 선교장 처마 각 면에는 무려 6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흰 바탕에 초록색으로 쓴 예서체는 해강(海岡)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이 쓴 편액. 해강은 한국 근대를 대표하는 서화가이다. 편액 하나하나가 모두 조선시대 명필 서예가들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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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래정을 지나면  안채로 통하는 월하문(月下門)이 나온다. 월하문 양쪽 기둥에는 두 개의 주련이 걸려 있는데 당나라 시인 가도(賈島, 779~843)의 시 '제이응유거(題李凝幽居)'에서 따온 글이다. '새는 못가의 나무에서 잠자고(鳥宿池邊樹),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敲月下門)' 즉 달이 뜨는 늦은 밤이라도 이곳을 찾는 이는 월하문을 두드리라는 뜻이다.

월하문은 당나라 시인 가도의 시  '새는 못가의 나무에서 잠자고(鳥宿池邊樹),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敲月下門)'에서 따온 이름으로 즉 달이 뜨는 늦은 밤이라도 이곳을 찾는 이는 월하문을 두드리라는 뜻이다.
▲ 강릉 선교장 월하문 월하문은 당나라 시인 가도의 시 '새는 못가의 나무에서 잠자고(鳥宿池邊樹), 스님은 달 아래 문을 두드린다(僧敲月下門)'에서 따온 이름으로 즉 달이 뜨는 늦은 밤이라도 이곳을 찾는 이는 월하문을 두드리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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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하문을 지나니 안채로 통하는 평대문과 사랑채로 연결되는 솟을 대문이 나란히 나온다. 솟을대문에는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 1836∼1909)가 쓴 '선교유거(仙橋幽居:신선이 머무는 그윽한 집)'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소남은 대원군이 천재라고 부를 정도로 자질이 빼어났던 조선 말기의 서예가다. 솟을대문 기둥에는 선교장 주인의 명패도 작게 걸려있다. 안채는 지난 1월 화재로 수리 중에 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으로 들어갔다.

일가친척들이 화기애애하게 정담을 나누는 곳, 열화당

열화당(悅話堂)은 순조 15년(1815) 오은거사 이후가 건립한 사랑채로 친척들과 화기애애한 정담을 나누는 장소다. 열화당이라는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구절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으니(世與我而相遺)/다시 어찌 벼슬을 구할 것인가(復駕言兮焉求)/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 즐겨 나누고(悅親戚之情話)/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를 떨쳐버리리라(樂琴書以消憂)' 이 가운데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 즐겨 나누고'에서 '열(悅)'자와 '화(話)'자를 따서 일가친척이 열화당에 모여 정담을 나누고 거문고와 책을 즐겨 근심을 없앤다는 의미로 열화당이라는 당호를 정하였다고 한다.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 즐겨 나누고'에서 '열(悅)'자와 '화(話)'자를 따서 일가친척이 열화당에 모여 정담을 나누고 거문고와 책을 즐겨 근심을 없앤다는 의미로 열화당이라는 당호를 정하였다고 한다.
▲ 강릉 선교장 열화당은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 즐겨 나누고'에서 '열(悅)'자와 '화(話)'자를 따서 일가친척이 열화당에 모여 정담을 나누고 거문고와 책을 즐겨 근심을 없앤다는 의미로 열화당이라는 당호를 정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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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선교장 관장을 맡고 있는 이강백(70)선생은 선대의 뜻을 이어 받아 열화의 정신을 꽃피우기 위해 열화당 대청과 방에 '열화당 작은 도서관'을 개관(2009)하고, 열화당과 같은 이름으로 출판사 '열화당(대표 이기웅)'을 설립(1971)하여 가문의 문화와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작은도서관과 출판사를 열게 된 것은 선교장이 한국 최초의 석판 인쇄기를 제작하여 당시 시인묵객들의 시문을 인쇄하여 나누어 주고, 조상들의 행장을 기록하여 집안의 대소가들에게 배포하는 등 300년 동안 이어온 열화당 정신을 이어가자는 데 있다. 

열화당 후원으로 돌아가니 거대한 배롱나무 한 그루가 화사하게 꽃을 피우며 열화당 지붕위에 드리우고 있다. 배롱나무 위쪽 건너편에는 '노야원'이란 초정이 단아하게 자리 잡고 있다. 아침 일찍 손님들이 일어나면 열화당 후원으로 산책을 하고 노야원에 앉아 정담을 나누도록 한 장소다.

열화당 후원의 거대한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며 열화당 지붕위에 황홀하게 드리워지고 있다.
▲ 강릉 선교장 열화당 후원의 거대한 배롱나무가 꽃을 피우며 열화당 지붕위에 황홀하게 드리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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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야원에서 뒷산으로 올라가는 길옆에는 거대한 주엽나무 한 그루가 험상궂게 버티고 서 있다. 강릉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주엽나무는 수령이 570년에 달하고 수고 25m에 나무둘레가 3.8m에 달한다. 나무줄기에 굵은 가시가 붙어 있는 주엽나무는 선교장을 지키는 신장처럼 보인다.

주엽나무 뒤로는 '선교장둘레길'이 울창한 솔숲으로 고즈넉이 나 있다. 소나무들이 어찌나 큰지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 중에는 수령이 500년 넘은 금강송(강릉시 지정 보호수)이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용틀임을 하며 선교장을 굽어보고 있다. 선교장을 'U'자 형으로 에워싸고 있는 300~600년 된 금강송은 선교장의 품격을 더욱 격상시켜주고 있다. 

강릉 선교장 뒤 수령 300~600년 된 금강송. 노송이 선교장을 'U'자형으로 둘러싸고 있어 고택으 품격을 한껏 높여주고 있다.
▲ 강릉 선교장 강릉 선교장 뒤 수령 300~600년 된 금강송. 노송이 선교장을 'U'자형으로 둘러싸고 있어 고택으 품격을 한껏 높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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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선교장 수령 600년이 넘은 금강송
▲ 강릉 선교장 강릉 선교장 수령 600년이 넘은 금강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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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선교장이 이처럼 몇백 년 동안 파괴되지 않고 대를 이어 흥성하게 된 것은 선교장 주인들의 후한 인심에 있다. 조선시대 선교장은 고택을 찾아오는 다양한 손님들을 후하게 대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선교장 인심에 대한 사례는 '오온공유고집'에 규장각 직각 서만순(徐晩淳)이 쓴 묘갈명에 잘 나타나 있다.

"…전에 범려(笵蠡:중국 춘추시대 재상)가 재산을 세 번 이루어 세 번 흩었다 하였으니, 그 지혜는 따라갈 수 없거니와 무릇 사람들이 재산을 일으키는 데 있어 올바른 도리에 따르면 일어나고, 도리를 거스르면 망한다. 사람이 나눠서 흩어주지 않는다면 하늘이 반드시 흩어버릴 것이고, 하늘이 만약 흩어버린다면 먼저 화를 내릴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이는 오온거사가 죽기 전 두 자식들에게 내린 유지다. 자손들은 오온의 유지에 따라 수천금을 가난한 친족과 친구에게 나누어 주어 구휼(救恤)하였다. 또 오은거사는 두 아들에게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소강절(邵康節, 1011~1077, 송나라 유학자) 선생의 "평생에 눈썹 찌푸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응당 이빨을 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平生不作皺眉事 世間應無切齒人)"란 구를 걸어두고 두 아들에게 훈계한 대목에서도 남을 위해 베풀고 배려하는 삶을 살라는 기미를 읽을 수 있다.

'강릉 인심이 좋더라'는 말이 선교장에서 유래되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선교장에서 무전취식을 하였다. 당시 선교장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명부를 기록한 방명록인 활래간첩이 24권이나 된다고 하니 선교장의 인심을 짐작할 수 있다.

역대 선교장 주인들은 경작지를 남과 북으로 나누어 북쪽에서 생산되는 수확은 북촌에, 남쪽으로부터 들어오는 수확은 남촌에 저장하여 소작인들이 기근이 와도 굶지 않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소작인들이 나라에 내야 하는 세금역시도 저장고에서 내주는 등 미덕을 쌓는데 망설이지 않았다.

늦은 밤에 찾아오더라도 월하문(月下門)을 두드리라는 선교장의 후한 인심과  '타인능해(他人能解)'라 써 붙인 구례 운조루가 쌀뒤주에 쌀을 가득 채워 쌀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나 퍼가게 한 배려는 조선시대 부자 고택을 오랫동안 존재하게 하는 좋은 본보기가 되고 있다.

명품고택 만들기에 앞장서고 있는 이강백 관장

솔숲에서 내려와 잠시 더위를 식히기 위해 선교장 쉼터 '리몽(李夢)'에 들렸다. 실내에는 에어컨이 작동되어 시원하다. 오른 쪽에는 열화당 출판 도서들이 서가에 꽂혀 있고, 왼쪽 창가로는 활래장이 시원스럽게 내다보인다.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서가에 꽂혀 있는 책 중 '강릉 선교장'이란 책을 뒤적이고 있는데 사전에 전화통화로 잠시 만나기로 약속을 했던 선교장 관장 이강백(李康白, 70) 선생이 땀을 흘리며 들어왔다. 그는 효령대군 19대손으로 오늘날의 선교장을 존재하게 한 장본인이다.

강릉 선교장 이강백 관장
▲ 강릉 선교장 강릉 선교장 이강백 관장
ⓒ 이강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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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하세요? 이 무더위에 이렇게 넓은 고택을 관리하시느라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국가 중요문화재로 선정된 문화유산을 관리 보호하는 데는 세심한 주의와 많은 노력이 필요할텐데요?
"어떡합니까? 그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데요… 허지만 일이 끝이 없어요. 최근에는 정부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로 지원을 많이 해주고 있어 종전보다는 좀 더 수월해 지고 있지요."

대화 중에도 그는 자꾸만 울리는 핸드폰을 받느라 바빴다. 그런 와중에도 소탈해 보이는 그는 시원시원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 요즈음 외국인들의 한옥체험이 부쩍 늘어나고 있는 추세던데요. 평창 동계올림픽을 맞이하여 외국인들이 이곳 선교장을 찾아 한옥체험이 늘어나지 않을까요?
"글쎄요… 문화재로 지정이 안 된 한옥들은 자유스럽게 편익시설을 개조하거나 만들어 외국인들이 이용하는데 불편이 없게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은 한계가 있어요. 전보다는 많이 완화는 되었지만 특히 건물을 개조하여 방에 화장실을 만든다든지 원상복구 할 수 없는 것들은 손을 댈 수가 없어요. 원상복구를 할 수 없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또 본래의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선교장도 한옥을 체험할 수 있는 방이 60여 개가 있지만 화장실이 없는 방은 공동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불편함이 있어 외국인들이 이용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선교장은 명품고택체험관으로 서별당과 연지당이 있고, 전통문화체험관 8실(남여단체 수용인원 30명), 중사랑채 2실, 행랑채5실 등이 있다. 이는 문화재지정 건물로 외부 공동 화장실을 이용해야 한다. 한편, 선교장 부속건물로 홍예헌 1관, 2관, 그리고 2개의 초가가 있는데 이는 내부에 화장실과 욕실이 달려있다. 초가를 제외한 모든 건물은 안전을 위하여 취사가 불가능하다.

- 들어오다 보니 전통문화 무료체험이라는 프로그램은 있던 것 같던데 어떤 것들이 있나요?
"네, 금년부터 '생생문화재사업'으로 한국전통문화 무료체험이 열리고 있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선교장 교육관에서 오색다식, 전통차체험, 매듭만들기, 탁본체험, 뒤주조립해체하기 등 다양한 체험이 있는데요, 요즈음 하루에 400~500명이 체험을 하고 있어요. 지난 보름 동안 5500여 명이 다녀갔는데요, 앞으로 전통무화체험은 점점 더 늘어날 것 같습니다." 

- 청소년과 어린이들에게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케 하는 것은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바쁘신 중에도 선교장에서 음악회 등 각종 이벤트도 열리는 것 같은데요?
"네, 작년에는 평창대관령국제음악제를 선교장 야외 공연장에서 열었지요. 금년 추석에는 국악연주회를 개최할 예정입니다. 관련기관의 후원을 받고 있지만 우리가 직접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어 무척 바쁩니다. 직원들이 20여 명 있는데 이런 일 때문에 눈코 들새 없이 너무 바빠요. 힘들기는 하지만 여러 사람들에게 잊혀져가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무료로 체험하게 하여 우리 고유문화를 알리고 또 이어나가게 한다는 데 작은 보람을 느끼고 있지요."

- 선교장을 이끌어나가시는데 가장 큰 애로사항이라면 어떤 것을 들 수 있나요?
"뭐, 지금까지 오랫동안 해 왔던 일이라 큰 애로사항은 없습니다. 다만 정원과 나무를 가꾸는 일이 결코 쉽지가 않군요. 근처에 화재나 산불이 나면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강풍에 불똥이 날아들어 언제 불이 붙을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불이나면 문화재도 문제지만 집 뒤의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이 더 문제입니다. 송진에 불이 붙어 한 번 불타면 영원히 복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교장 같은 고택은 주로 목재로 지어져 화재에 취약한데다 노송이 우거져 화재위험이 가장 문제다. 2000년도에 강원도 동해안지역에 대규모 산불이 발생했을 때는 강풍에 선교장 전후방 1km까지 불이 붙어 선교장도 일촉즉발의 위기에 직면했지만 다행히 강풍이 수그러져서 변을 면할 수 있었다. 또 금년 1월에는 전기누전으로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초기 진압으로 대형피해를 막았지만 외별당 행랑채가 거의 소실되었다.

- 앞으로 강릉 선교장에 대한 바람과 계획이 있으시다면?
"뭐 특별한 바람이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보존되어온 문화재를 대를 이어 잘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이지요."

이강백 관장은 선교장에 직접 거주하면서 선교장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품고택으로 조성하고, 전통문화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는데 온 정성을 쏟아왔다. 그는 명품고택 만들기를 선교장에만 국한하지 않고 (사)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회장 이강백)를 만들어 전국의 고택을 명품화 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현재 한국고택문화재소유자협의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는 문화유산 보호에 힘쓴 공을 인정받아 문화재청으로부터 은관문화훈장(2013년 12월 10일)을 받기도 했다.


태그:#강릉 선교장, #열화당, #활래정, #선교장 배롱나무, #선교장 노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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