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케르크> 포스터

▲ <덩케르크> 포스터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화제작 <덩케르크>를 보는 두 가지 시선이 있다. 하나는 2차대전사에 획을 그은 유명한 작전을 거대한 재난의 현장으로 연출해 전쟁의 비인간성을 조명한 걸작이란 것이다. 영화 초반부 덩케르크 해안 잔교 위에 늘어선 연합군 병사들은 독일군의 폭격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폭탄이 떨어지고 어뢰가 들이받는 아비규환 가운데서 인물들은 저마다 비겁해지거나 용감해지는 선택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집어든다. 이름도 사연도 끝내 드러나지 않는 병사들을 영화가 묵묵히 뒤따른단 점에서 <덩케르크>가 이색적인 전쟁영화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다른 한 가지 시선은 <덩케르크>를 영국판 '국뽕'(애국심에 호소하며 감동을 주입하는 류의 영화를 우스갯소리로 가리키는 말) 영화쯤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영국인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덩케르크 작전을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감독이 영화화했다는 점과 영화 가운데 보여지는 여러 에피소드가 감동적이며 숭고하게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특히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인 중령(케네스 브래너 분)이 한스 짐머 특유의 장엄한 음악과 함께 "홈(Home)"이라는 대사를 읊는 장면 등은 이 영화가 영국인의 자기도취적 감상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돼 있는 건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덩케르크>를 두 차례 감상한 뒤 나는 이 영화가 두 가지 얼굴을 모두 간직한 독특한 작품이란 것을 알았다. 듣는 이의 신경을 곤두세우는 음향과 세 가지 시점을 적극적으로 오가는 시나리오 가운데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인물들의 드라마 만큼은 앙상하게 느껴질 만큼 담백하게 연출했다. 영화 내내 등장한 주인공의 이름은 엔딩 크레디트를 통해서야 처음 드러나고 아군과 적군의 교전은 사실상 보여지지 않는다. 연합군 소속 병사가 적을 향해 총을 겨누는 장면이 없지 않지만 탱크를 상대로 돌맹이를 주워 던지는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거대한 재난과 맞닥뜨린 소시민의 이야기를 보는 듯하다. 전쟁영화로선 이례적인 선택이다.

전쟁영화 속 익히 전해진 익숙함들이 배제된 가운데 두드러지는 건 인간과 선택에 대한 고찰이다. 이는 재난영화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방식으로 저항할 수 없는 재난의 한가운데서 드러나는 인간의 진면목을 비추는 게 이들 영화가 집중하는 바라고 하겠다. 누군가는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며 그 자신보다 더 큰 가치를 좇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그 자신의 삶을 위해 주변을 돌아보지 않기도 한다. 어찌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모습만 진면목이라 하겠느냐만, 좀처럼 찾기 힘든 어떤 진실이 어려움이 닥쳐서야 비로소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생각이 아니라 선택으로 표현된다

<덩케르크> 덩케르크 해변에 늘어선 영국 병사들. 영화는 끝까지 병사들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다.

▲ <덩케르크> 덩케르크 해변에 늘어선 영국 병사들. 영화는 끝까지 병사들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요컨대 인간은 선택으로 표현된다. 영화 속 인물들도 그렇다. 선택의 배경에는 여러 위험과 유혹, 욕망과 두려움이 따르지만 누군가는 훌륭하고 누군가는 비겁한 선택을 한다. 의무가 없음에도 위험한 전장으로 배를 몰아가는 도슨 선장이 있다. 그 곁에는 기꺼이 그를 따르기를 선택한 두 소년이 있다. 물에 빠진 병사들에게 밧줄을 던지고 침몰하는 배에서 잠긴 통로를 열어주는 병사가 있다. 귀환할 연료까지 소진해가며 적기를 격추시키는 조종사가 있다. 모두를 구하기까지, 혹은 그보다 오래 자리를 지키는 지휘관들이 있다.

그 반대편엔 누가 있는가. 배를 돌리라며 구원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구조된 군인이 있고 배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다른 병사를 향해 총구를 들이대는 병사도 있다. 어디 그들뿐이겠는가.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들 모두를 전쟁의 희생자라며 감싸고 돌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작정 옹호하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전쟁 가운데 선 인간들의 선택을 찬찬히 보여줄 뿐이다. 과연 무엇이 고귀함을 만드는가를, 무엇이 숭고함을 빚고 무엇이 열패감과 나약함, 비겁함을 빚어내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이 <덩케르크>의 가장 큰 미덕이다.

물론 영화가 관객의 감정을 과하게 북돋고 지나치게 영국군 중심으로 이야기를 써내려간 부분이 없지 않다. 바다 건너 자국 군인을 구하러 온 배들이 등장하는 장면에선 철저히 의도된 웅장한 음악을 깔고 수차례에 걸쳐 감격하는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잡아내 관객의 감정을 움직이려 한다. 이는 앞서 적은 영화의 장점과 크게 배치되는 것으로 영화가 한 가지 목적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관객 상당수가 영화 가운데서 괴리감을 느끼게 되는 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더욱 아쉬운 건 영화가 영국군의 훌륭함을 드러내기 위해 반드시 언급돼야 마땅한 일부 사실을 선택적으로 삭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작전에 참여한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노르웨이, 폴란드의 민간선박이 제대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극중 네덜란드 어선이 한 척 보이긴 하지만 선장의 진의를 확인할 수는 없다. 실제 이들 선박이 수송한 병력은 3만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선택적 삭제, 과연 이대로도 괜찮은 걸까

<덩케르크>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독일군 전투기와 생존을 건 전투를 벌이는 영국 공군 스핏파이어 편대. 여백이 크고 시원한 이 같은 장면이 아이맥스가 아닌 일반 상영관에선 좁고 답답하게 보여진다.

▲ <덩케르크>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독일군 전투기와 생존을 건 전투를 벌이는 영국 공군 스핏파이어 편대. 여백이 크고 시원한 이 같은 장면이 아이맥스가 아닌 일반 상영관에선 좁고 답답하게 보여진다.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잔교를 지키는 영국 해군 중령 볼튼 역시 위험 가운데서도 동측 방파제를 훌륭하게 통제한 캐나다 중령 잭 클로스톤의 변형된 캐릭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작전 내내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방파제를 지키고 이곳을 통해 병력을 승선시킨 그는 도버로 돌아가 철수와 관련한 협의를 한 뒤 돌아오던 중 어뢰공격으로 사망한다. 방파제에서 보낸 며칠 동안 과로로 탈진상태였던 클로스톤은 배가 가라앉은 뒤 구명정까지 헤엄을 치지 못해 익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캐나다가 영연방에 속해 있어 클로스톤은 영국 해군(Royal Navy) 장교로 복무했으나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은 엄연히 캐나다 퀘벡 지역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가 두 차례나 영국을 바라보며 "집(Home)"이라는 대사를 읊게끔 하고 이를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대목으로 활용한다. 심지어 캐나다를 비롯해 영국 본토 이외의 영연방 국가, 즉 캐나다나 호주 등지에서 온 군인들의 활약상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엔진이 꺼진 전투기가 날아간 궤적을 그대로 돌아와 적기를 격추시키는 신기야 영화적 허용쯤으로 여기고 넘어가더라도 앞에 언급한 부분에서만큼은 보다 사려 깊은 손길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오랫동안 약점으로 지적받아 온 캐릭터 묘사와 드라마를 최대한 배제하고 장기인 치밀한 구성과 유려한 편집, 적절한 음향 활용을 극대화한 영화를 찍어내는데 성공한 듯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부 장면에서 전체적인 분위기와 달리 극적 연출을 시도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마저도 매력적으로 이해하는 관객이 있을 만큼 전체적인 완성도가 있는 작품이라는 판단이다. 무엇보다 기존 전쟁영화와는 색깔을 달리한 시도가 영화팬들에게 크게 호소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非아이맥스 상영관에서 본 <덩케르크>는 <덩케르크>가 아니었음을

아이맥스 비율과 일반상영관 비율 차 아이맥스 1.43:1, 1.9:1 버전과 일반상영관 2.4:1 비율로 아이맥스 촬영 영화를 상영할 때 보이는 화면. 일반상영관 비율은 위아래 폭이 크게 잘려나가는 나머지 주요한 사건을 보지 못함은 물론 감독이 의도한 영화의 분위기까지 오독할 가능성이 크다. 과연 일반상영관에서 아이맥스 영화를 제 값을 받고 상영하는 게 옳은 일일까?

▲ 아이맥스 비율과 일반상영관 비율 차 아이맥스 1.43:1, 1.9:1 버전과 일반상영관 2.4:1 비율로 아이맥스 촬영 영화를 상영할 때 보이는 화면. 일반상영관 비율은 위아래 폭이 크게 잘려나가는 나머지 주요한 사건을 보지 못함은 물론 감독이 의도한 영화의 분위기까지 오독할 가능성이 크다. 과연 일반상영관에서 아이맥스 영화를 제 값을 받고 상영하는 게 옳은 일일까?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사족을 더하자면 <덩케르크>는 반드시 아이맥스로 보아야 한다. 화면의 비율이 크게 다르고 그에 따라 전해지는 장면의 감상 자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 극장에서 스크린 위에 설치된 커튼을 통해 하는 마스킹 작업만으로도 영화의 감상이 달라질 수 있는데 화면 자체가 크게 잘리는 아이맥스 영화의 일반관 상영의 문제는 공론화가 이뤄질 필요가 있어 보인다.

개인적으로 <덩케르크>의 경우 아이맥스 상영관이 아닌 곳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불완전판매로까지 생각될 만큼 그 격차가 큰 상황에서 극장과 배급사가 이에 대한 대안을 전혀 내놓지 않고 있다는 점이 몹시 당혹스럽게 느껴진다. 해외 명화를 수입해 전시를 열며 그림의 70%만을 보여주겠다고 한다면 과연 제 값을 주고 미술관을 찾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영화는 종합예술이지 오직 이야기의 예술이 아님을, 아이맥스 필름으로 찍은 영화를 제 값을 치러가며 잘린 화면으로 보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님을 관객들이 알아주었으면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덩케르크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크리스토퍼 놀런 핀 화이트헤드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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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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