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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앞두면, 나는 책을 구해 펼친다. 제일 먼저 펼치는 페이지는 관광명소가 아니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 지역 고유의 음식들을 사진으로 구경하며 맛을 상상하고, 군침을 흘리기 시작한다.

여행 가방 싸는 거야 단 몇 분으로 끝. 무슨 음식을 먹을까, 내 상상과 같을까 다를까, 점 찍은 음식들을 다 먹으려면 간식을 빼고도 하루에 다섯끼는 먹어야겠다는 어처구니 없는 계산 등등 먹는 걸 공상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나는 내가 영원히 이렇게 살 수 있길 희망한다. 내 건강한 다리로 낯선 곳을 활보하고, 과식한 음식들을 무리없이 소화시키며, 죽을 때까지 건강한 욕구와 함께 살고 싶다. 내게 식탐은, 스스로 삶을 생기있게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행복했던 순간들의 음식이 맛있다. 어쩌면, 맛은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어린 날, 엄마 아빠 싸운 날의 저녁 식사는 맛이 없었고, 끔찍했던 옛 상사와의 식사라면, 그 어떤 산해진미라 해도 차라리 세 끼쯤 굶는 것을 택할 것이다. 어쩌면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맛있는 음식으로 행복을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마는가. 단지 행복하고 싶을 뿐인데. 그렇다. 음식을 즐기는 것은 나의 즐거움인 동시에, 잘라낼 수 없는 죄의식의 원천이기도 하다. 세상의 불평등을 알게 된 이후로.

<먹는 인간> 책표지.
 <먹는 인간> 책표지.
ⓒ 메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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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인간>을 보며 맛있는 음식의 향연이 펼쳐질 거라는 순진한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문에 앞서 실린 몇 장의 사진 중 단지 야위었다는 말로는 부족한 소말리아의 소녀를 마주하고, 나는 책장을 덮을까 잠시 고민하고 말았다. 아직도 채 소화시키지 못한 간밤의 야식을 떠올리고, 죄책감을 느꼈다. 죄책감은 곧 나를 도망치고 싶게 만들었다.

저자 헨미 요는 완전히 다른 길을 택한다. 그는 언론사의 외신부에서 일하며 오히려 "세계를 선명하게 실감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타자의 기쁨·괴로움·분노·신음"에 무감해져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고.

세계의 불행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지쳐 되려 무뎌지고 말았을 때, 그가 선택한 것은 여행이다. 세상의 행복을 보기 위한 여행? 노(No). 저자는 피하지 않고 오히려 다가갈 것을 택한다.

많은 사람들이 죄의식을 피해 아예 '모를 것'을 택하고 말 때, 그는 세계에 알려지지 않은 "마이크로의 슬픔"을 가까이서 바라보고자 한다. 그 여행의 시작으로도 이미 세계에 경종을 울린다. 스스로는 그런 거창한 생각 따윈 없었다고 덧붙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돌아본 세계는 어떠한가. 방글라데시에서는 말 그대로 '음식 찌꺼기'가 사람의 식사로 사고 팔린다. 이는 은밀하게 이뤄지는 비밀도 아니다. 원조 기관이 난민에게 식량을 제공하자, 지역 주민들의 난민을 향했던 동정은 질투와 원망으로 변한다.

독일에 퍼진 터키식 케밥으로 풀어가는 저자의 단상은 흥미롭다. 위험한 네오나치 청년들은, 주로 옛 동독의 빈곤 가정 출신에다가 실업자이며 사회적 약자라고 한다. 연대보다는 내 아래의 차별할 대상을 찾는 사람들은 인간의 본성을 생각하게 된다. 이는 결코 네오나치만의 문제가 아니다. 저자는 민족 배척주의를 경계하며 말한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하는 주관과 일어날 수 있는 객관은 별개다. 나도 그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존 그레이는 <하찮은 인간, 호모 라피엔스>에서 인간이 얼마나 제목 그대로 약탈적이고, 거룩하지 않은지 증명한 바 있다. 이런 통렬한 인식이 필요한 이유는, 인간 본성에 대해 비관하기 위함이 아니다. 최악을 막기 위한 예방책으로서, 우리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악한 근성을 돌아봐야만 한다.

소말리아를 "도우러" 간 사람과 "도움받는" 소말리아 사람의 음식 차이는, 저자가 말하듯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복잡한 심정을 불러 일으킨다. 또한 소말리아를 돕기 위해 참전한 방글라데시 군대도 인상 깊다.

"성실한 국제 공헌이라고 이해해야 할까? 또는 자신부터 도우라고 말해야 할까?"

에이즈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우간다. 수직 감염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선택의 여지가 없어 모유 수유를 할 수밖에 없는 그곳의 현실은 처참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체르노빌 사고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임을 알면서도 그곳에서 먹고, 자야만 하는 사람들은 어떠한가.

저널리스트로서의 사명감이 느껴지는 집요한 취재는 계속된다. 필리핀 산 속에 숨어든 일본인 패잔병들의 식인 행위를 좇고, 소말리아에서 벌어진 유엔 활동단의 만행을 이야기한다. 저자가 "마이크로의 슬픔"에 집중하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쓰레기를 뒤지는 굶주린 아이들을 보며 그는 말한다.

"음식을 남기는 것이 죄라면, 이 아이들이 그 죄를 씻고 있는 셈이다."

그는 위선으로 스스로를 포장하지 않는다. 방글라데시의 처참함을 목격하며, 언젠가 일본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쩌지 걱정하는 모습은 이상적이라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인간적이었다.

세계의 한 편에서는 과식과 음식물 쓰레기가 문제가 되고 있는데, 동시에 다른 한 편에서는 먹지 못해 죽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 이 통탄할 만한 세계의 불평등은 우리를 참담함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그 불편함을 피해 도망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마주해야만 한다. 우리 모두는 세계에 책임이 있으므로.

끝으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의 한 대목을 옮긴다.

"세계에 대한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비합리적인 행위이다. 하지만 결정에 대한 책임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감수하면서까지 세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이야말로 세계의 논리가 초래하는 맹목으로부터, 타자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결과로부터 세계의 논리를 구원할 마지막 기회다."


먹는 인간 - 식(食)과 생(生)의 숭고함에 관하여

헨미 요 지음, 박성민 옮김, 메멘토(2017)


태그:#먹는 인간, #헨미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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