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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짜이 한 잔 마시는 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

따옴표부터 온점까지 내가 적어 내린 나의 문장이, 책 뒷면에 박혀있다. 그 아래에는 남편이 그린 그림이 이제 막 칠한 듯 생생한 색깔로 인쇄되어 있다. 내 손에는 책 출고 전 출판사에서 보내준 증정본이 들려있다.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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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쳐봤다. 막 책을 사서 펼쳤을 때 으레 나는 종이 냄새가 났다. 질감은 여느 책과 비슷한데, 그 안에 담긴 내용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게 달랐다. 제목, 프롤로그, 목차, 글, 사진, 그림. 쉼표 하나, 사진의 위치 하나, 줄 바꿈 하나, 나를 거치지 않고 간 게 없다. 이건 내 책이다.

'책, 완전 찾기 어려운 곳에 있네'

출고 예정일인 5월 20일. 낮에 서점에 갈 일이 있다던 선배가 문자를 보내왔다. 사진도 보내줬다. 책은 기대했던 신간 코너가 아니고, 심지어 아는 사람 아니면 찾기 힘든 책꽂이도 아닌, 소화전 아래 놓여있다고. 온라인 판매가 시작된 이틀 전부터 서점 웹사이트에 들어가 지점별 재고를 확인하던 터였다. 늘 '0'권이던 재고가 오늘에서야 드디어 '5'권이 되었는데, 소화전?

"있어?"

뒤에서 쫓아오던 남편이 물었다. 퇴근하고 남편과 종로 영풍문고에 들른 참이다. 검색대에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이라고 쳤다. 내 책이 떴다. 책의 위치는 GW56. 검색대에서 나온 작은 종이를 지도삼아 지하로 내려갔다. 화장품 코너를 지나, 문구 코너를 지나, 책이 잔뜩 꽂힌 서재로 통과하니 여행책 코너가 나왔다. G는 여긴데 GW는 어디야? 저기요, 혹시 GW가 어디 있나요. 직원에게 물었다. 저기 구석 가시면 벽 쪽이요.

벽 쪽. 좁다란 골목 같은 서재에 책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여기 어딘데... 한 줄에만 30권은 꽂혀있는 책들과 한참 눈싸움을 했다. 아무리 노려봐도 내 책은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책을 만들려고 몇 년을 지지고 볶은 당사자의 눈에도 안 들어오는 위치라니. 5분을 찾다 겨우 발견했다.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세 권이 나란히 꽂혀있다. 이렇게 표지도 보이지 않게 꽂힐 줄 알았으면 책 옆구리를 시뻘건 색으로 하는 건데.

"소화전 아래보단 훨 낫네. 그래도 얘는 위치보고 찾아올 수 있는 곳에 꽂혀 있잖아."

책장에서 책을 꺼내며 내가 말했다. 책장 아래는 표지를 보여줄 권리를 가진 몇 권의 책이 놓여 있었다. 모른 척 한 권만 내려놓을까. 아니, 이왕에 하는 거 베스트셀러 위치에 놓고 도망갈까.

"교보에 가보자."

남편이 어깨를 툭 치더니 말했다. 우리는 교보에 갔다. 검색대에 다시, 내 책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을 쳤다. '영업점 재고/위치'는 '직원에게 문의'하라고 나왔다. 여행책 코너로 가봤다. 선배가 말한 소화전을 찾아봤다. 소화전이...

소화전 아래 처량하게 쌓여있는 나의 책.
 소화전 아래 처량하게 쌓여있는 나의 책.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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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남편이 벽 쪽을 가리켰다. 소, 화, 전, 이라고 궁서체 글씨로 가지런하게 쓰인 작은 문 앞에, 책이 몇 권 쌓여 있었다. 익숙한 표지가 보였다. 내 책이다. 젤 위에 놓인 책은 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 먼지가 시커멓게 묻어있다.

"치..."

영풍문고 책꽂이 앞에서만 해도 애써 괜찮은 척 하던 내 입에서 '치'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내가 얼마나 고생해서 만든 책인데. 퇴근하고 맥주 마시고 싶은 것도 참고, 친구도 안 만나고, 주말도 반납하고, 한 글자라도 안 쓰고 잔 날에는 죄책감에 시달리고! 사람들은 내 책이 아닌 다른 책을 들춰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아! 내 책이라고 내 책! 얼마나 재밌다고! 표지라도 구경하라고!

서점에는 책이 참 많았다. 서점에야 책이 늘 많지만, 오늘은 유독 많은 것 같다. 이토록 많은 책이 있는데, 늘 새 책이 나오고, 어떤 책은 평대에 올라가고, 어떤 책은 책꽂이에 꽂히고, 어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평소엔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주던 서점이 오늘은 거대한 하나의 정글 같아 보였다. 이 정글에서 내 책은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먼지가 시커멓게 쌓인 채 소화전 아래로 쫓겨나고 말았다. 안 되겠다. 책 좀 팔자.

책, 평대로 승진하다

며칠 후, 하단 평대로 내려온 내 책. 팔려라!
 며칠 후, 하단 평대로 내려온 내 책. 팔려라!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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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너도 그렇다. (안되는 거 알지만 서점 직원 몰래 찍은 사진. 내 책은 맨 꼭대기 수풀 왼쪽에 숨어있다)
 자세히 보아야 보인다. 너도 그렇다. (안되는 거 알지만 서점 직원 몰래 찍은 사진. 내 책은 맨 꼭대기 수풀 왼쪽에 숨어있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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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니 책을 내게 됐어요. 한 권씩만 사주세요.'

지인들에게 문자와 책 구매 링크를 보냈다. 영 쑥스러운 일이었다. 단체 카톡을 보내놓고 핸드폰을 내려놨다. 5분만 꾹 참고 기다리기로 했다. 5분은 못 참겠고 4분 후 카톡을 확인했다. 열 몇 개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완전 대박!'
'????? 대박! 작가 슨생님!'
'사인회 열어주세요!'
'한 40명한테 뿌렸어. 나도 샀다.'


책 홍보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건 친오빠였다. 별로 안 친한 사람들한테까지 '겁나' '뿌렸'단다. 회사에서도 하도 책 홍보를 하고 다녀서 그만 좀 홍보하라고 핀잔까지 들었다고. 평소 한 달에 한 번 문자 보내면 잦은 축에 속하는 게 오빠와 나다. 부탁한 것도 아닌데 오빠가 책 홍보에 이토록 열과 성을 다하는 게 이상했다.

내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지인 하나는 책을 냈다고 하니 '모든 걸 이뤘네요'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뭘 다 이뤘다는 거지? 이제 책이 나를 먹여 살릴 거라고, 노후는 문제없다고 말하는 지인도 있었다. 뭐가 문제없다는 거지? 책 한 권 내봐야 한 달 월급의 반도 못 버는 것을.

'새로나온 책'

떴다! 책 출고 이틀 후, 교보문고 '영업점 재고/위치' 광화문 점을 확인했다. 4권의 재고가 '새로나온 책' 평대에 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퇴근하자마자 교보문고에 갔다. 여행책 코너. 신간 코너 평대. 음... 어디에 있다는 거지?

한참을 찾았다. 혹시 평대 아래 책장에 꽂혀있나 아래까지 꼼꼼히 살폈다. 어디 있다는 거야. 책아, 괜찮은 거니? 설마 아직 소화전 아래 쭈그려 있는 거니? 평대를 한 바퀴 빙빙 돌았다. 어. 저기 있다. 평대 가장 꼭대기. 예전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초록색 작은 나무 모형. 그 이파리에 수줍게 가려져 있는 내 책. 책도 제 위치를 찾았겠다, 여기저기서 리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솔직하다. 유머러스하다. 문장이 좋다.'
'책 읽고 지금 인도에 와 있습니다.'
'여행기 너무 재밌습니다. 파리에 오면 밥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결혼도 하고 애도 낳은 내가 이 책을 읽고 부부란 이런 거였지 깨닫는다.'


반면 이런 리뷰도 있었다.

'반 정도 읽었는데 참 신선하구나. 제목과 내용이 딱 맞아 떨어진달까? 보통 여행책 보면 자랑 일색에 허세투성이라 어쩌라는 거냐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불만투성이인 여행책은 처음 봐.'
'제가 선배 좋아하잖아요. 독립적이고 시크해서. 근데 책을 읽어보니까 이미지가 좀 다르더라고요.'


쿨하지 않은 내 모습을 너무 적나라하게 적었나.

'남편이랑 엄청 싸워. 싸우고 일기 쓴 것 같아.'

엄청 싸우긴 하지. 그래도 일기라니 너무한 거 아냐? 그래 뭐 일기라 치자.

'재밌긴 한데, 네 책을 읽으니 인도에 가고 싶지가 않아. 어휴, 쥐라니? 나 엄청 깔끔한 거 알지?'

그건 좀 곤란한데. 너무 솔직하게 써버렸나.

책에 담긴 그림. 책 표지와 사이사이의 그림은 남편이 그렸다.
 책에 담긴 그림. 책 표지와 사이사이의 그림은 남편이 그렸다.
ⓒ 이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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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의 노력 덕인지, 내 책은 오래도록 평대에 놓여 있다. 서점 홈페이지의 '영업점 재고' 수량은 이따금 줄어들어 있고, 서점에 가 보면 쌓여있던 책의 몇 권이 줄어들었을 때도 있다.

내 책을 산 독자들을 만나면 붙잡고 묻고 싶다. 이 책 왜 사셨어요? 표지 때문에? 인도에 관심 있어서? 제목이 끌려서?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책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팔뚝에 닭살이 돋는다. 부디, 재미있게 읽어줬으면.

일주일 만에 2쇄가 나온다거나 엄청난 호평을 받는 일은 없었다. 인터뷰 문의도 없었고 그 흔한 블로그 리뷰도 별로 없었다. 삶에도 큰 변화가 없었다. 나는 단지 책을 한 권 냈을 뿐이었다. 그뿐, 나는 여전히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해 가끔 맥주를 마시는 회사원이다. 인세? 책 나왔다고 기념 주 몇 번 사 마시면 끝날 돈이다. 이 책 한 권을 위해 몇 년간 쏟아부은 시간을 생각하면 세상 비효율적인 짓이다.

그럼 이 짓을 왜 하나?

출판사와 처음 계약했을 때, 먼저 책을 냈던 선배가 해준 말이 있다. 출판사가 어떤 조건을 내걸건, 네가 뭘 원하는지,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먼저 생각해보라고. 선배의 질문을 다시 떠올려본다. 돈이 안 돼도, 시간만 잔뜩 뺏겨도, 퇴근하고 마음 편히 놀 수 없어도, 댓글로 욕만 잔뜩 먹어도, 둔감한 지인으로부터 은근슬쩍 비평 아닌 비평을 들어도, 쿨한 척 하느라 따지지는 못하고 혼자 마음이 상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쓰고 싶다. 물론 이따금 초조하다. 고치고 또 고친 글이 누구의 마음에도 닿지 못할까 봐. 편집자와 디자이너와 내가 신경 써서 기획하고 작업하고 수정한 책이 어둠 속으로 사라질까 봐. 그럴 땐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고. 그저, 매일 매일 글을 쓰고, 조금씩 나아지는 방법뿐이라고.

힘이 빠질 땐 다시 떠올려본다. 누군가는 내 글을 보고 밤잠을 설쳤고, 누군가는 내 글을 보고 인도로 날아갔다. 나의 글은 누군가의 마음과 몸을 움직였다. 그 짜릿함은, 세상 어떤 것으로도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그 마음을 기억하면서, 그만두지 않고, 계속해보려고 한다.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 - 불량한 부부의 150일 인도 방랑

이수지 지음, 더스틴 버넷 그림, 위즈플래닛(2017)


태그:#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출판, #출간기, #시민기자 , #인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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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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