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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에 야구장이 있다. 7월 4일 SK : 기아 경기를 보러 문학야구장에 갔다.
 집 근처에 야구장이 있다. 7월 4일 SK : 기아 경기를 보러 문학야구장에 갔다.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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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문학야구경기장까지 아주 가깝다. 현관문을 닫고 딱 10분만 걸으면 도착한다.

남편은 못 말리는 야구광이다. 성격이 급하고 예민한 나와 달리 남편은 흥분하는 일이 별로 없고 말수가 극단적으로 적다. 그의 열정에 찬 모습을 보고 싶거나 하도 말이 없어 혹시 목소리가 안 나오는 건 아닌지 확인하고 싶을 때면 슬쩍 야구 이야기를 꺼내면 된다.

응원하는 구단의 선수 프로필과 그들의 시즌 성적, 순위 정도는 맛보기다. 묻지도 않았는데 지난해, 지지난해, 심지어 8년 전 어느 경기에서의 극적인 역전의 순간까지 줄줄이 외며 감동에 젖는다. 이렇게 기억력 좋은 사람이 왜 내 휴대전화 번호와 집 주소는 자꾸 까먹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오랫동안 살던 지역을 떠나 이 동네로 오면서 남편이 위안 삼은 것도 이 야구장이었다. 초겨울에 결혼하고 이듬해 야구 시즌이 시작하길 남편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렇게 야구장에 드나들기를 4년째. 야구에 흥미가 없던 나도 슬슬 낯익은 선수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이젠 남편이 응원하는 구단을 덩달아 응원하게 되었다.

일반석 VS 응원석

7월 4일 에스케이와 기아 경기를 보러 갔다. 동네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포장하고 치킨을 주문했다. 이 정도 먹거리는 경기장 매점에 가면 다 살 수 있고 값도 크게 차이 나지 않지만 이렇게 주렁주렁 양손에 먹을 걸 매달고 가야 경기장 가는 맛이 난다.

저녁 7시 30분, 저만치 경기장이 보인다. 경기는 한 시간 전에 이미 시작했다. 관중들이 갑자기 환호성을 지른다. 홈런이라도 친 걸까? 궁금함에 가슴이 뛴다. 남편도 마음이 급한지 나를 앞질러 티켓 부스를 향해 빠르게 걸어간다.

일반석의 가격은 9000원, 응원석은 평일엔 1만 1000원, 주말엔 1만 3000원이다. 나는 응원석에서 신나게 응원을 하며 보고 싶은데 남편과 뜻이 엇갈린다. 선수 이름을 연호하는 것까진 괜찮지만 응원단장의 요구에 맞춰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게 번거롭단다. 나 참. '귀찮은데 그냥 편하게 집에서 보지 그래?' 한마디 하려다 참는다. 결국 선택은 늘 일반석이다. 대신 최대한 응원석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제 겨우 4회 초인데 기아가 10:3으로 한참 앞서고 있다. 오랜만에 팀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두 투수가 맞붙어 팽팽한 접전이 될 거라 예상했는데, 경기 초반부터 점수 차가 크게 벌어졌다. 남편은 싱글벙글. 사실 나는 이것도 불만이다. 남편이 에스케이를 응원하면 좋을 텐데 슬프게도 남편은 기아 골수팬이다.

인천에 살고 있으니 인천 팀을 응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 야구장이 에스케이 구단 전용 구장이라 경기 중 방송도, 이벤트도, 전광판 소식도 모두 에스케이 구단 중심으로 돌아간다. 에스케이 구단의 '고향'이니 그들이 열렬한 응원 속에 경기를 치르는 것이 당연하고 그들에겐 그럴 권리가 있다. 다만, 특별히 응원팀이 없던 내가 에스케이 대신 기아를 응원하게 된 게 남편 탓(덕?)인 것 같아 조금 억울할 뿐이다.

'부모님을 찾습니다'

자리를 잡았으니 배를 채우기로 한다. 비닐봉지를 뒤적이는데 목 뒤와 얼굴에 차가운 것이 튀었다. 뒷자리 중년 남성이 맥주캔을 따다가 내 쪽으로 쏟은 것이다. "어이쿠, 미안합니다." 아저씨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모른다. 내 목과 옷에 묻은 맥주를 털어주려던 건지 아저씨 손이 순간적으로 내 몸으로 뻗어왔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피했다. 아저씨도, 나도 서로 무안한 순간. '성범죄 왕국' 대한민국에 사는 평범한 여성의 일상이다. 나는 괜찮다는 눈인사를 하고 휴지로 맥주를 닦았다.

잠시 후 전광판에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 얼굴이 나왔다. '부모님을 찾습니다. 응원단상으로 와 주세요' 하는 자막이 떴다. 아이는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전광판에 나온 자신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얼마나 놀랐을까. 그래도 큼지막하게 얼굴이 나왔으니 금방 보호자를 찾을 수 있겠지 싶었다. 같은 내용이 전광판에 다시 나오지 않은 걸 보면 잘 해결된 게 분명하다.

보호자를 찾는 아이의 모습이 대형 스크린에 나오고 있다.
 보호자를 찾는 아이의 모습이 대형 스크린에 나오고 있다.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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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유아부터 초등학생들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보호자와 함께 야구장을 찾았다. 구단 유니폼까지 갖춰 입고 얼굴이 벌게지도록 응원도 한다. 심지어 포대기에 둘러싸인 아기도 있다. 초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는 글러브를 낀 채 자리에 앉지도 않고 통로를 지키고 서 있다. 파울볼을 기다리는 중이다. 안타깝게도 이날 아이는 파울볼을 잡지 못했다. 하지만 신나게 소리치며 응원하는 걸 보니 그리 실망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다음 경기에도 글러브를 들고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다.

누군가 자꾸 내 시야를 가린다

이 경기장은 주변에 산이 있어서 밤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진다. 장마 중이라 습하고 더웠지만 해가 넘어갈 무렵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탁 트인 서쪽하늘을 볼 수 있는 것도 야구장의 매력이다. 노을이 지고 바람이 부는 풍경을 마주하고 있으면 하루가 가는 게 그리 허무하지 않다. 이 순간 맥주 한 모금 넘기면... 무슨 말이 필요할까.

잠시 서쪽하늘에 정신을 놓고 있다가 다시 경기에 집중한다. 그런데 아까부터 자꾸 거슬리는 사람이 있다. 챙 있는 모자를 쓰고 타자석을 정면으로 가리고 있는 한 사람. 저 사람 때문에 타자가 공을 쳤는지 제대로 볼 수가 없어서 계속 몸을 앞으로 숙이게 된다. 경기 장면을 좀 찍고 싶은데 저 사람이 오른쪽 화면을 자꾸 가린다.

아르바이트생이 내 시야를 가리고 있다
 아르바이트생이 내 시야를 가리고 있다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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앳된 얼굴인 걸 보니 아르바이트생인 것 같다. 그는 응원석과 일반석 사이에 있는 쇠로 된 울타리를 지키고 서서 오가는 사람에게 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표를 보이며 좌석이 어딘지, 화장실은 어느 곳에 있는지 물었고 그는 성실히 답했다. 파울볼이 응원석을 향해 날아올라치면 호루라기를 불어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듯해도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서 있는 고통을 나는 안다

시간은 어느덧 8시 30분. 딱딱하고 좁은 플라스틱 의자에 구겨 앉은 몸이 찌뿌둥해지는 시간이다. 때맞춰 전광판에 치어리더가 나와 스트레칭 시범을 보인다. 사람들은 이때다 싶어 일어나 화장실도 가고 화면을 따라 팔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휴식시간에 치어리더가 스트레칭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휴식시간에 치어리더가 스트레칭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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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에겐 쉬는 시간이 주어졌지만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오가는 사람이 많아 그는 더욱 바빠졌다. 아마 경기 시작 30분 전부터 관객을 안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최소 2시간 30분 째 그 자리에 서 있는 중이다.

나는 가만히 서 있는 고통을 안다. 오래 전, 의자 없는 매장에서 밥 먹는 1시간을 제외하고 열 시간 동안 서서 일한 적이 있다. 발바닥과 무릎, 허벅지, 허리가 차례로 아파온다. 저리다 못해 나중엔 허벅지 아래로 감각이 사라진다. 차라리 간간히 걷거나 쪼그려 앉을 수 있으면 한결 나을 텐데 그럴 수 없어 몹시 괴롭고 힘들었다. 그 아르바이트를 할 때가 내 인생에서 시간이 가장 천천히 흐르던 때로 기억한다. 지금보다 훨씬 젊고 건강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아마 저 사람도 그때 내 상태와 비슷하겠지. 혹시 주변에 작은 의자가 놓여 있는지 살폈지만 보이지 않았다. 하긴, 통로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가는 통에 문을 열어주느라 앉을 새도 없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 조금 전 주먹으로 허리를 툭툭 치고 있었다. 내 허리가 다 뻐근해지는 것 같다.

8회가 시작할 때쯤 사람들이 슬슬 경기장을 나가기 시작했다. 승패는 진즉에 갈렸다. 기아의 완승이다. 경기가 끝나면 주변 도로가 무척 많이 막힌다. 차를 가지고 왔다면 지금쯤 일어서야 수월하게 경기장을 빠져나갈 수 있다.

경기 내내 서 있어야 하는 아르바이트생은 수시로 허리를 두드렸다.
 경기 내내 서 있어야 하는 아르바이트생은 수시로 허리를 두드렸다.
ⓒ 심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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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죽 한 방보다 싼 일당

경기가 모두 끝났다. 문학야구장에선 경기 후 불꽃놀이를 한다. 폭죽이 터지는 곳과 가까운 쪽에 앉은 관객들이 안전한 자리로 이동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야 한다. 처음 몇 번은 끝까지 남아 불꽃놀이에 환호했지만, 언제부턴가 그냥 집에 온다. 경기장 불꽃놀이는 집에서도 보인다. 우리 동네 사람들에겐 불꽃놀이가 일상이다. 이것 역시 호사라면 호사일까? 불시에 꽝꽝 터지는 폭죽소리나 폭죽이 터지면서 나오는 미세먼지와 유해성분이 거슬리지 않는다면 뭐 호사랄 수도 있겠지만 내겐 썩 달갑지 않다.

불꽃놀이를 뒤로 하고 집으로 걸어오는 길. 경기 내내 시야를 가린 그 아르바이트생 생각이 났다. 집에 도착해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임금을 얼마나 받는지, 추정할 수 있는 정보를 검색해봤다. 최저시급에 근무시간은 6~7시간, 휴게시간은 30분, 일당 4만 7000원. 추측해보면 대충 이런 그림 아닐까. 휴게시간 30분은 휴식을 취하기에도, 식사를 하기에도 빠듯한 시간일 것이다.

18년 전, 단 네 달 동안 하루 열 시간씩 서서 일한 흔적은 아직도 내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이제 마흔을 갓 넘긴 나는 한 시간도 제대로 서 있지 못한다. 오른쪽 골반이 저리고 다리가 붓고 무릎과 종아리에 통증이 온다. 걷는 건 괜찮은데 가만히 있는 건 견디기 힘들다. 내게 한 시간, 아니면 두 시간마다 10분 정도의 휴식이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생각도 가끔 한다.

야구장 만이 아니다. 식당에서, 영화관에서, 크고 작은 마트에서, 편의점에서, 무수한 나를 마주친다. 마음이 아프고 짠하다가 끝내는 화가 난다. 부속품으로 쓰이지 않을, 인간으로 존중받으며 살 권리가 우리에게 분명히 있을 텐데, 그런 삶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창밖에서 펑펑 푹죽 터지는 소리가 난다. 불꽃놀이가 끝나면 아까 그 아르바이트생은 마지막 관객이 나가기를 기다려 뒷정리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갈 것이다. 허겁지겁 대충 허기를 채운 뒤 퉁퉁 부운 다리를 주무르고 허리를 두드리다 쓰러져 잠을 자겠지. 폭죽 한 방 값보다 형편없이 싼 일당을 받아 들고서.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사인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야구장, #야구, #아르바이트, #최저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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