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 <덩케르크>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오노 나나미는 '위안부'와 관련된 망언으로 질타를 받았지만, 그의 책이 베스트 셀러 순위를 점령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때는 <로마인 이야기> 정도는 읽어줘야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대중적 역사가는 우리나라에서 매우 '호소력 높은' 작가였다.

그런 그녀의 책 중에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있다. 1459년 비잔틴 제국의 수도에 오스만 제국의 10만 군대가 몰아닥쳤다. 새벽 1시 시작된 총공세는 날이 밝기도 전에 마무리되었다. 인류 역사의 중세가 마무리되던 역사의 한 장면이었다. 이 역사적 장면을 시오노 나나미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베트 2세와, 비잔틴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11세 못지않게, 그 역사의 한 획에 참여한 병사, 즉 일반 사람들의 모습을 조명했다.

총공세의 명령이 내려지자 병사들을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오르기 시작한다. 정예군답게 갖가지 도구와 수단들이 있었지만, 결국 그 철옹성을 넘은 건 사람들이다. 철옹의 성벽을 무너뜨린 건 결국 '인간의 목숨'이었다. 7000명 남짓한 방어군을 공격하는 10만 대군. 결국 역사에 기록된 건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는 사건이지만, 그 안에는 역사 속에는 목숨을 던져 성벽을 올랐던 사람들과 또 그 성벽 위에서 안간힘을 쓰며 수성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의 목숨을 던져 역사를 만들었던 사람들. 그 역사 속의 사람들의 모습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덩케르크>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역사에 던져진 인간들

 영화 <덩케르크> 스틸 사진.

영화 <덩케르크> 스틸 사진.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영화가 시작하면 아직 앳된 티가 채 벗겨지지 않은 소년이라고 해도 크게 범주에 벗어나지 않을 몇몇 군인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곧 총성이 들려온다. 젊은, 아니 어린 군인들은 허겁지겁 뛰기 시작하고, 그들이 골목을 돌고 지형지물을 피해 몸을 숨길 때마다 스러져간다. 결국, 마지막 아군의 진지를 가까스로 넘은 채 목숨을 구한 이는 단 한 명이다. 하지만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 전에 총성은 따라오고, 그를 구한 진지의 군인들도 쓰러져 간다. 그 진지를 지나 겨우 도달한 해변, 엄호해줄 그 무엇도 없는 겨울 해변에 수를 가늠하기조차 힘든 군인들이 '구출'에 생명을 내맡기고 있다. 그곳이 이제 유럽 대륙에서 밀리고 밀린 영국군의 마지막 배수진, 덩케르크다.

원래 배수진의 뜻이라면 자신들을 몰아친 상대로 물을 등지고 결사 항전의 의지를 다진다는 것이지만, 영화 속 <덩케르크>의 군인들은 이제 다가올 독일군의 총공세를 피해 본국의 구원을 기다리는 마지막 동아줄일 뿐이다. 우리가 기억하는 2차대전은 화려한 연합군의 승리로 기록되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그 승리의 역사 속, 한 장면 10만 군인들의 생명이 몸을 가릴 곳 하나 없이 생존을 갈구하는 덩케르크 해변에서 '전쟁의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엄호할 지형지물 하나 없는 해변, 그래서 그들을 공격하는 독일군 비행기의 포격을 그저 몸으로 받아내야 한다. 운 좋게 살아나면 다시 줄을 지어 탈출을 도모해야 하는 곳에서 미덕이란, 그저 살아남는 것. 그러기에 가까스로 독일군의 공격을 피한 토미가 죽은 영국군의 옷을 입은 깁슨과 죽어가는 병사를 의무병인 채 함께 들고 구출선을 향해 달리는 모습에 반감은커녕 절박한 응원에 동참하게 된다.

이런 덩케르크의 생존기는 우리나라의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을 떠올리도록 한다. 이제는 중견을 넘어 노년이 되고, 혹은 돌아가시기 하긴 한 작가들, 박완서, 이문열, 이문구,등 전쟁을 겪고, 그 전쟁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가들의 글에서는 <덩케르크>의 토미, 깁슨처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와 내 가족의 생존을 도모하기 위한 수난기가 빠짐없이 등장했고, 그 생존의 수난기는 전쟁 세대를 상징하는 세대적 특징으로 자리 잡았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생존을 도모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성'이라 정의한다. 덩케르크 해변에 뒤늦게 도착한 토미 역시 어떻게든 살아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 토미를 몇 번이나 도와 주었던 깁슨은 '영국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도움을 받았던 영국군들 사이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순간을 맞이 한다. 그 순간이, "다음 차례는 토미 너" 라며 울부짖듯 질타, 생존이 곧 정의라는 잔혹한 단호함이, 어쩌면 거대한 역사 속 인간 생존의 진솔한 목소리이겠다.

 영화 <덩케르크> 포스터.

영화 <덩케르크> 포스터.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이런 역사와 그 속에 던져진 인간에 대한 놀란 감독의 직관이 보다 긍정적으로 발현한 건 그의 전작 <인터스텔라(2014)>에서 였다. 역사적 숙명과 그 사이에 낀 자아의 고민은 그의 히어로 물의 주된 주제였다. 그리고 이런 놀란 감독의 생각은 뜻밖에도 최근 작년 우리나라에서 필독서가 되다시피 한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통해서 인문학적 정의에 도달하게 된다.

이 책에서 유발 하라리는 단언한다. 역사의 선택은 인류를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인류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동하지 않는다고. 심지어 인류가 자랑스레 펼쳐온 문화를 '정신적 기생충'이라 명명한다. 그 기생충은 인간을 숙주로 삼아 인간의 희생을 도구로 삼아, 자신을 전파한다. 이 인간을 도구화한 정의에 불쾌하지만, 그 승리의 2차 대전 전장에서, 덩케르크 해변에 줄을 지어 생명을 도모하는 숱한 인간의 대열을 보면, 어쩔 수 없이 탄식과 함께 유발 하라리의 정의가 떠올려진다.

거기엔 2차 대전의 승리 기록에 씌어있는 그 정의의 이데올로기란 없다. 그저 역사란 전장 속에 던져진 숱한 생명이 있을 뿐. 그렇게 인간을 자신의 도구로 전진하는 역사 속에서 살아남아 생존을 도모하는 것. 그게 인간으로서의 최선의 승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고향에 돌아온 알렉스의 부끄러움과 상관없이 살아 돌아온 그 자체가 '승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구르고 뜯기고 갖은 수모와 모욕을 당해도 '생존'의 승리자가 되어 기록을 남겼던 전쟁 후 소설가들처럼.

인류적 동지애, 혹은 그 이상

 영화 <덩케르크> 스틸 사진.

영화 <덩케르크> 스틸 사진.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하지만 감독은 그저 역사의 전파체 '밈'으로서의 도구적 존재 인간에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역사는 문명은 그들을 그렇게 수단화하게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거기서 빛난다. 그들이 그런 역사라는 전장에서 꿋꿋하게 포기하지 않고 생명을 도모하여 빛나지만, 또한, 그 생명의 도모를 넘어선, 존재 이상의 모습으로 빛난다.

겨우 도망쳐 나온 해변에서 구출의 희망을 잃은 채 망연자실한 토미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깁슨의 몇 번의 동료애가 그랬고, 영국 해협의 거친 파도를 작은 배 하나로 넘으며 덩케르크 해변에 남겨진 자국의 병사들을 구하러 가는 도슨(마크 라이언스 분)을 비롯 평범한 영국인들이 그랬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의 무사귀환 대신, 해변의 병사들을 마지막까지 엄호한 유일했던 영국의 전투기 조종사 파리어(톰 하디 분)가, 병사들을 보내고 뒤에 남은 볼튼(케네스 브래너 분)이 그랬다. 그리고 등장하지 않았지만, 해변의 병사들을 엄호하기 위해 덩케르크 해변을 사수했던 엄호병들이 그랬을 것이다.

<덩케르크> 개봉 초반, '영국의 국뽕 영화'란 평가처럼, 이들의 '헌신', '희생'이 조국을 위한 애국심이었을까? 아니 그보다는 이타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정의에서 그 본질을 찾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렇게 따지고 보면 인간의 정의 또한 생존을 위한 단위로서의 '이타적 본능'으로 귀결되는가 싶기도 한다.

<덩케르크>에서 토미 등의 생존기가 빚은 공감의 눈물을, 파리어 등의 존재를 초월하는 행동에 대한 감동의 눈물이 앞질러 가는 걸 보면, 어쩔 수 없이 인간은 '이타적 감성'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가 싶다. 그리고 그 '이타적 감성' 행위에 대한 감동이 곧 어쩌면 생존을 넘어선 인간의 진짜 '생존' 모듈이 아닌가란 질문에 도달하게 된다. 뭐 구구절절 이론을 들었지만, 결국 이타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주는 감동은 생존을 넘어선다.

 영화 <덩케르크> 스틸 사진.

영화 <덩케르크> 스틸 사진.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시간을 다룬 새로운 영화로만 알았는데, 존재의 형식에 대한 철학적 화두를 받아들인 영화였다. 히어로물인 줄 알았으나 사회적 존재와 자아의 문제라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잘 빠진 전쟁 영화라 해서 보러 갔는데, 마주한 건 역사와 인간에 대한 고민이었다. 영화로 인문학 하기. 이게 바로 <덩케르크>를 만든 놀란의 진짜 목적인가 보다. 그는 구구절절 우리 영화는 어떻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저 당대에 이런 감독과 함께 인간과 역사를 고민할 수 있어 감사할 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덩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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