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영화 <불온한 당신>을 보러 가자는 권유를 했다가 칼같이 거절당한 일이 있다. 그는 그랬다. 좋은 것만 보고 살고 싶다고. 그 심정이 이해가 됐다. 서울시 인권헌장 선포 무산 사태와 2014년 퀴어문화축제 행진 방해 사건과 같이 성 소수자와 관련한 동시대의 굵직한 사건들을 담은 이 작품에는 혐오 세력이 자주 등장한다. 당시 그 현장에서 분노를 느낀 경험이 있거나 혹은 혐오 발화의 직접적 대상이 되는 당사자라면 영화의 관람이 망설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불온한 당신>을 보는 일이 그렇게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극장에서도 관객들이 다 같이 폭소를 터트리는 순간도 꽤 있었다. 그것도 무려 혐오 시위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말이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다들 그 웃음의 성격이 이러하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화도 나지 않아 터지는 실소. 조야한 혐오의 논리에 대한 위악적인 비웃음. 물론 그런 부분도 있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혐오 세력들이 보이는 모습들이 정말로 순수하게 웃겨서 폭소를 터트린 경우도 있었다. 생각해보라. 잔뜩 근엄한 표정으로 '동성애'의 유해성을 설파하던 목사가 갑자기 단말마처럼 '섹스!'라는 단어를 외친다. 왜 국민의례를 안 하냐고 누군가를 몰아붙이던 사람이 상대방이 자기는 했다고 말하자 '아니야, 안 했어!'라고 징징거린다. 동행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그런 말들을 골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하며 과잉된 제스쳐도 함께 수반된다. 이런 광경을 보면서 무표정을 유지하는 것은 극히 힘든 일이다.

왜 혐오의 언어는 단순할까?

 영화 <불온한 당신>의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 무브먼트MOVement


뜬금없는 선정적인 비난의 반복, 어린아이도 부리지 않을 것 같은 어깃장, 때로는 추임새만 반복되는 방언까지. 한창의 난장을 관람하고 난 뒤 그런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혐오의 언어는 왜 이토록 단순하고 우악스러울까. 사실 이건 운동의 관점(물론 나는 혐오 세력이 하는 일이 '사회 운동'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에서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저런 말들로 어떻게 사람들을 설득하고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관철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비교적 차분한 발언을 할 때조차 혐오 세력은 최소한의 논리적 일관성도 보여주지 못한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는 이제 그만할 때가 됐다고 하더니 퀴어문화축제 현장에 와서는 나라가 추모 분위기인데 뭐 하는 짓이냐는 식이다. 놀랍게도 같은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들었던 생각은 애초에 혐오 세력의 목적에 설득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들이 어느 현장에 어떤 목표를 가지고 등장했는지를 살펴보면 명확하다. 혐오 시위대는 성북구 주민인권선언 선포를 좌절시키기 위해 행사장에 난입하고 성 소수자들의 축제를 막기 위해 길거리에 주저앉는다. 서울시 인권헌장 선포 무산을 규탄하는 이들의 점거를 방해하기 위해 현장에 나타나기도 한다. 말하자면 영화 내내 이들은 무언가를 막거나 좌절시키거나 무산하게 만들려는 일을 반복한다. 목표가 단순히 반대에 있다 보니 언어도 그만큼 복잡할 필요가 없다. 단지 소리만 크면 된다. 자신이 억누르려는 존재와 목소리들이 충분히 묻히도록.

불온하다 지목된 이들이 드러내는 것

 영화 <불온한 당신>의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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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영화 속에서 혐오 세력들이 그토록 불온하게 여기던 존재들은 어떤 이들일까? 가령 작품 속에 등장하는 논과 텐 커플을 살펴보자. 레즈비언 부부이자 일본인인 이들은 동일본 대지진과 이후 덮쳐온 해일을 겪으며 커밍아웃과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너무도 사랑하는 사이였음에도 오직 가족인 사람만을 찾고 생사를 알려주는 방침 때문에 서로의 안전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재난이라는 사회적 위기 상황 속에서 성 소수자인 이들이 받던 차별이 더욱 극단적인 양태로 증폭되게 된 셈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만약 논과 텐이 살던 곳이 사랑하는 사람이 같은 성별이라는 이유로 파트너십을 제도적으로 인정 받는 게 아예 불가능한 사회였다면 어땠을까? 가령 한국처럼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영화의 제목이 '불온한 당신'인 것이 매우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불온. 말 그대로 온당하지 못한 것.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수자와 약자들이 정말로 그런 존재라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사회의 불온함을 매우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가 비추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생각해보자. 대규모 재난 앞에서 가족을 잃었지만, 적극적인 지원과 보호가 아니라 국가의 책임 회피와 방치를 경험했던 이들. 기본적이고 평등한 권리의 보장조차 받지 못하는 다른 소수자들처럼, 유가족들은 이 사회가 얼마나 끔찍할 정도로 엉망인지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당시 정부 여당을 지지했던 보수 세력들은 이들의 목소리도 존재도 지우고 감추고자 했다. 사회가 아니라 불온을 드러낸 사람이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면 아무것도 고칠 필요가 없어지므로. 그리고 그만큼 기득권은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으므로.

70대의 성 소수자가 우리에게 전달하는 것

 영화 <불온한 당신>의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 무브먼트MOVement


<불온한 당신>이 마침표를 찍은 시점 이후로 한국은 급격한 사회적 변화를 겪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부정이 드러났고 결국 탄핵당하기에 이르렀다. 정권은 바뀌었고 이전과 달리 정부는 정말로 일을 하는 모양새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하지만 성 소수자들의 삶은 여전히 갈림길에 서 있는 모양새다. 차별금지법 입법 추진은 100대 국정과제에서 빠졌다. 동성애자 군인의 색출과 처벌을 주도하고 한 무고한 대위가 유죄 판결을 받게 하였던 장준규 육군참모총장 역시 그대로 자리에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유감을 표하거나 해명을 하려는 이도 없다. 여전히 사회는 소수자의 말을 들어주지도 그들의 존재를 신경쓰지도 않는 것만 같다.

하지만 누군가 듣지 않고 보지 않는다고 해서 그런 삶을 살아가는 개인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라 할 70대 성 소수자 이묵이 이를 증명한다. 성 소수자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던 1970년대부터 '바지씨'의 삶을 살아온 이묵은 한국 퀴어 역사의 산증인이라 할만하다. 그리고 이묵의 말에 따르면 그 척박한 시대에도 성 소수자들은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었고 사랑을 나누었으며 같이 살기도 했다. 그런 세월을 거치고 카메라 앞에 앉은 이묵은 전한다. 이제는 후배들이 당당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우리는 어느 때보다 그런 삶이 가능할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이고 힘을 내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혐오에 사회가 먹혀가고 세상에서 고립된 것만 같은 때에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우리 하나하나가 살아가는 한 사라지지 않는 한 여전히 희망은 있다. 그러니 부디 계속해서 우리가 사는 이곳의 불온함을 드러내길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영화는 내게 그런 힘을 전했다.

 영화 <불온한 당신>의 포스터 및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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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당신 성소수자 퀴어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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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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