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문무일 검찰총장이 검찰개혁을 언급했다. 지난 1일 국회에서 이혜훈 바른정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무엇보다 저희들이 해야 할 첫 번째가 정치적 중립성"이라면서 "검찰개혁에 국민들이 바라시는 게 많으시다. 국민들께서 바라는 바를 받들어서 저희들도 많이 변하고 국민들 눈높이에 맞게 업무를 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달 15일이면 대한민국 정부수립 69주년이 된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건만, 검찰개혁 필요성이 계속해서 제기되는 것은 검찰이 막강한 권력을 가진 데다가 그 권력을 올바로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검찰이 막강한 힘을 갖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검사가 있었다. 나쁜 검사는 아니었다. 아주 좋고 훌륭한 검사였다.

정부 수립 2개월 뒤인 1948년 10월 19일, 여순 사건(여수·순천 사건, 여순반란)이 발생했다. 여수에 주둔한 14연대 2천여 병사가 남로당 군인들을 중심으로 궐기했다. 제주 4·3항쟁을 진압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훗날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 소령은 남로당 군사부장으로 이 사건에 연루됐다.

이때 사건 가담자로 몰려 총을 맞고 죽은 사람이 있었다. 실제로는 박정희만큼도 연루되지 않았지만, 반란 가담자로 몰려 총살을 당한 이 사람은 박찬길 검사였다. 위에서 언급한 그 검사다. 박찬길의 검사의 죽음은 제1공화국에서 검찰이 강한 힘을 갖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검사의 죽음이 역설적으로 검찰의 강화에 이바지했던 것이다.

 여순사건의 경찰측 희생자들.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여순사건의 경찰측 희생자들.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의 경찰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박찬길은 국권 침탈 1년 뒤인 1911년 황해도에서 출생했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교회 장학금을 받아 일본 유학을 갔다. 거기서 주오대학(중앙대학) 법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해방 뒤 미군정 하에서 시험에 합격해 검사 발령을 받았다.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에는 광주지검 순천지청 차석 검사로 재직했다.

박찬길은 소신파 검사였다. 보수세력이 미군정과 이승만을 등에 업고 반대파를 공산당으로 몰아 죽이던 시절이었다. 이런데도 박찬길은 정치적 중립을 지켰다. 문무일 검찰총장의 말처럼 박찬길한테는 '무엇보다 해야 할 첫 번째는 정치 중립'이었다.

박찬길은 경찰이 체포한 이른바 좌익 혐의자들을 무혐의로 풀어주거나 아니면 선처했다. 개인적 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증거가 부족해서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어느 경찰관이 자기를 보자마자 달아나는 남자를 뒤쫓아 갔다. 남자는 산 위로 달아났다. 경찰관은 총을 발사했고 남자의 다리에서 피가 흘렀다. 남자는 쓰러졌고 경찰관은 확인 사살을 했다. 그제야 남자는 숨이 끊어졌다.

경찰 측은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했지만, 박찬길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조사 결과, 피살자는 산에서 무허가로 나무를 베던 사람이었다. 무허가 벌채가 탄로날까봐 경찰관을 보자마자 달아났던 것이다. 그런데도 경찰은 실적을 올리고자 그를 쏘아죽이고는 좌익으로 몰아세운 것이다.

박찬길은 가해 경찰관의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했다. 아무 혐의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처음 본 남자를 뒤따라가 총을 쏘고, 그것도 모자라 확인 사살까지 했기 때문이다. 박찬길은 가해 경찰관에게 징역 10년을 구형했다.

이 사건은 경찰이 박찬길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계기가 됐다. 경찰은 그를 적구(赤狗) 검사로 지목했다. 좋게 표현하면 '빨간 강아지', 나쁘게 표현하면 '빨갱이 개'로 지목한 것이다. 이 당시는 내무부 치안국이 지금의 경찰청이었다. 치안국뿐 아니라 내무부 차원에서도 박찬길을 적구로 인식했다.

얼마 뒤였다. 여순 사건이 발생했다. 박찬길 관할권에서 군사 충돌이 터진 것이다. 이때 지역 일선 경찰들에게 비밀 지령이 하달됐다. 혼란스런 틈을 타서 박찬길을 총살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국군과 함께 순천에 진입한 경찰토벌대가 박찬길을 찾아내 살해했다.

지령의 장본인으로 지목된 것은 윤치영 내무장관이었다. 윤치영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1949년 10월 6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여순사건 1년 뒤인 1949년 10월 5일 대정부 질문 도중에 김봉조 의원(경북 청송 출신)이 "여순사건 당시 윤치영 내무장관이 박찬길과 같은 사람은 죽여야 한다고 일선 관리에게 지시하여 죄 없는 사람을 죽여 놓고"라고 말한 바 있다. 박찬길 살해에 경찰이 조직적으로 움직였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경찰은 박찬길이 여순사건 당시 인민재판에 관여했기 때문에 현장에서 사살했다고 둘러댔다. 순천읍장도 증인으로 나섰다. 1948년 10월 30일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순천읍장은 "박찬길이 인민재판소에서 검사 역할을 했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박찬길은 중립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그런 일이 없었다.

당시의 검찰은 힘이 없었다. 숫자도 많을 뿐 아니라 무기까지 들고 있는 경찰을 상대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박찬길의 무고를 주장하지 못했다. 자신들마저 적구로 몰릴까봐 스스로 침묵을 선택했다. 다행히 유족들의 항의가 법무장관에게 받아들여져 군·경·검 합동수사본부에 의해 오래지 않아 진상이 규명됐다. 

박찬길 사건은 박 검사의 용감한 소신과 억울한 죽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의 경찰이 얼마나 막강하고 무시무시했는지를 보여준다. 지금의 경찰은 취객 응대에 여념이 없지만, 당시의 경찰은 이승만 반대파 색출에 여념이 없었다. 좌파 색출을 명분으로 여차 하면 민간인한테 총을 드는 게 당시의 경찰이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해방 직후의 혼란을 이유로 그런 상황을 방치했다. 그래서 경찰이 법적 근거도 없이 무고한 검사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었다.

그런데 권력자들은 경찰이나 군대 같은 무력기구를 활용하면서도 그런 기구가 너무 강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물리적 파워만 놓고 보면 장관을 능가하고도 남을 경찰청장을 차관급으로 묶어두는 것도 그런 이유다. 군대 장교의 경우에도, 보유한 물리력에 비해 직급은 훨씬 낮다. 이 역시 그런 이유다.

박찬길 사건 이전에도 경찰은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에 편승해 민간인들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이런 상황은 정권의 눈에 두 가지 의미로 비쳐졌다. 경찰이 우리 말을 잘 듣고 있구나, 경찰이 우리한테도 저런 짓을 할 수 있겠구나.

그래서 해방 3년 뒤인 1948년 들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경찰에 대한 견제에 본격 착수했다. 경찰은 '경무부'라는 독자 조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48년 7월, 경무부는 내무부 치안국으로 격하됐다. 경찰은 본래 독자적인 수사권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48년 8월, 미군정 검찰청법에 의해 경찰은 검찰의 수사지휘를 받게 됐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1948년 10월 박찬길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정권은 박찬길 사건을 계기로 경찰에 대한 통제를 한층 강화했다. 1949년 12월 제정된 대한민국 검찰청법을 통해 검찰이 계속해서 수사지휘권을 갖도록 하는 한편, 경감 이하의 경찰관에 대한 체임 요구권까지 갖도록 했다. 

 내부무 치안국이 제작한 포스터.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내부무 치안국이 제작한 포스터.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한국민간경비학회보> 제15권 제1호에 실린 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황문규 교수의 논문 '자치경찰제 도입과 수사권 조정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이승만 정권 시대의 경찰·검찰 관계에 대한 언급이다.

"이 시기에는 그러한 환경의 당연한 요청으로서 정부는 강력한 경찰을 원했고, 그래서 경찰에 과도한 힘을 실어주었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경찰권의 오·남용으로 이어졌다. 이는 다른 국가기관들은 물론 국민들로부터 강력한 경찰권에 대한 우려와 경계를 초래했다. 이것은 수사에 있어서 검찰의 수사권 독점 및, 경찰 수사에 대한 통제 차원에서 검찰의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을 부여하는 형사사법체계를 형성하도록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검찰은 실제로는 경찰보다 약하다. 인력·무기·정보력에서 그렇다. 그런 검찰을 경찰보다 강하게 만들어준 것은, 강력한 경찰을 견제해야 한다는 정부수립 직후의 정치적 필요성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경찰은 그때 경찰과 판이하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때 경찰 수뇌부가 정치적 중립성을 상당 부분 상실하긴 했지만, 그것은 시대적 조류에서 잠시 일탈한 결과였다. 박찬길 검사를 무지막지하게 다뤘던 경찰은 오늘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검찰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여할 이유가 없다. 강력한 경찰을 견제할 필요성에서, 강력한 힘을 검찰에 실어주는 것이다. 지금은 강력한 경찰이 없으니, 검찰에 강력한 힘을 실어줄 이유도 없는 것이다. 문무일 총장의 말처럼 검찰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www.kimjongsung.com.FM101.9 (목)11시25분. (저서) 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번역) 2판,나는 세종이다,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 여자 등.

돌고 돌고 돌아, 또 다시 숨어있기 좋은 방을 물색합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