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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하기보다 한성판윤 내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성판윤은
 낙점 받기 힘든 자리였다.
▲ 한성부 청사와 관리들 '영의정 하기보다 한성판윤 내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성판윤은 낙점 받기 힘든 자리였다.
ⓒ 서울역사편찬원 <시민을위한서울역사2천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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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판윤은 낙점받기 힘든 자리였다. 임금이 가장 신임하는 인물로 친가는 물론 외가 쪽 3대까지 지체를 살펴 임명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의정 하기보다 한성판윤 내기가 더 어렵다"는 말이 생겨났다. 지금의 도지사와 광역시장에 해당하는 조선 8도의 관찰사와 부윤이 종2품의 외관직인데 비해 한성판윤은 정2품이었다. 한성부(漢城府)의 수장을 부윤(府尹)이라 하지 않고 판윤(判尹)이라 칭한 것은 한성판윤의 정치적 의미가 컸기 때문이다.

한성판윤은 어전회의에 참석해 3정승 6판서와 함께 국정을 논했고, 국가의 주요 행사에도 참여하는 등 재상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다. 한성판윤은 한성부의 일상적인 행정 업무, 죄인을 문초하고 판결하는 소송 업무, 조정을 대표하여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외교 업무를 담당하였다. 임금이 행차할 때는 어가를 안내하였고, 선위사(宣慰使)의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기도 했다.

초대 판한성부사 성석린(태조4년 1395년) 이후 한성판윤은 1450명으로 평균 재임 기간은 5개월 남짓했다. 하루살이 판윤이 5명이나 될 정도로 인사이동이 잦았음에도 광해군 때 한성판윤을 지낸 오억령은 13년 4개월 동안이나 자리를 지켰다. 한성판윤을 지낸 다음에는 대부분 판서로 승차했다. 한성판윤을 지낸 인물 중에는 황희, 맹사성, 서거정, 권율, 이덕형, 박문수, 박세당, 박규수, 지석영, 민영환 등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토목공사는 눈에 띄는 치적사업이다. 한성판윤의 업적 또한 도시계획과 건설 분야에서 두드러졌다. 초대 한성판윤을 지낸 성석린은 경복궁 신축, 도성 축조, 개천(청계천) 준설 등 수도 건설의 기반을 다지는 공을 세웠다. 영조 때 한성판윤을 지낸 홍계희는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을 통해 배수 기능을 회복시켰다.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듬해인 1898년 한성판윤에 임명된 이채연은 도로 확장과 거리정비사업을 펼쳐 근대적 도시 건설의 기초를 닦았다.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의 등장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김현옥 시장은 도로를 사람의 혈관에 비유, 도로가 막힘없이 잘 뚫리면 국가와 도시가 부강해지고 선진화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믿음 하에 재임 기간 내내 도로를 뚫고 육교와 지하도, 입체교차로의 건설에 주력했다. 서울시청 8층 간담회실에 걸린 초상화를 촬영했다.
▲ 제14대 김현옥 서울시장 불도저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김현옥 시장은 도로를 사람의 혈관에 비유, 도로가 막힘없이 잘 뚫리면 국가와 도시가 부강해지고 선진화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믿음 하에 재임 기간 내내 도로를 뚫고 육교와 지하도, 입체교차로의 건설에 주력했다. 서울시청 8층 간담회실에 걸린 초상화를 촬영했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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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좋은 도시로 만들지 말아야 농촌 인구가 몰려오지 않는다."

서울시장 윤치영은 1963년 서울시 국정감사에서 이렇게 답변했다. 도시계획을 전혀 하지 않아도 매년 20~30만 명의 인구가 몰려드는데, 만약 도시계획을 잘한다면 서울의 인구는 더욱 늘어날 것이라는 게 그의 인식이었다.

1966년 3월 서울시장 윤치영이 해임되고, 김현옥이 새로운 시장에 임명되었다. 김현옥은 부산시장으로 재직하면서 부산역전 부두지구 구획정리 사업과 각종 도로 건설에 능력을 발휘하였다. 대통령 박정희가 제6대 대선(1967. 5. 3)을 1년 앞두고 김현옥을 서울시장에 임명한 이유는 서울 도심 정비와 재개발을 통해 가시적인 치적을 쌓아야했기 때문이다.

국군수송사령부의 모태인 제3항만사령부 사령관을 역임한 김현옥은 곧잘 도로를 사람의 혈관에 비유했다. 피가 잘 통하면 사람이 건강하듯이 도로가 막힘없이 잘 뚫리면 국가와 도시가 부강해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시장에 부임하자마자 불도저라는 별명에 걸맞게 김현옥은 '돌격'이라 쓰인 헬멧을 쓰고 현장을 누볐다.

김현옥 시장은 1966년 세종로와 명동 지하도 공사를 비롯하여 수많은 보도육교를 건설하고, 불광동길, 미아리길, 광나무길 등을 확장했다. 1967년에는 세운상가와 낙원상가 등 도심부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여 이듬해인 1968년 사창가의 상징과도 같던 '종삼(종로3가 유곽)'을 철거하였다. 또한 1968년에는 여의도 윤중제 공사를 중심으로 하는 한강개발사업을 추진하였다. 1969년에는 서울요새화계획의 일환으로 남산 1·2호 터널을 뚫고 도심의 주요 간선도로를 확장하는 한편, 도심과 외곽을 연결하는 방사형도로, 외곽과 외곽을 연결하는 순환도로를 개설하였다. 1969년 12월에는 제3한강교(한남대교)를 준공하여 강남 개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김현옥 시장이 시민아파트 건설에 착수한 것은 1969년이다. 1971년까지 3개년 계획으로 240억 원을 투입하여 시민아파트 2천동(10만호)을 짓는 계획이었다. 판자촌이 헐리고 서울 곳곳이 공사판으로 변했다. 1970년까지 금화, 청운, 와우지구 등 32개 지구에 434동(1만7402호)의 시민아파트가 건설됐다. 전쟁을 치르듯 속도전으로 건설한 날림공사의 후과는 컸다. 1970년 4월 8일 지은 지 4개월이 되지 않은 와우아파트가 붕괴하여 33명이 목숨을 잃었다.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 직후 김현옥은 서울시장에서 물러났다.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서울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바꾼 인물"이라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임면권자의 정치적 목적과 전시 효과를 위해 군대식으로 속도전을 펼쳤다"는 비판도 있다. 찬반을 떠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추진한 각종 건설사업으로 서울의 골격이 갖춰졌다는 사실이다.

1970년 4월 16일 제15대 서울시장으로 양택식이 부임했다. 양택식 시장은 새벽부터 저녁까지, 밤낮과 주말도 없이 일에만 몰두했다. 그는 서울시의 어려운 재정 여건 속에서도 전임 시장이 추진한 여의도 사업을 마무리 짓고, 영동지구 개발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부임 직후인 1970년 6월 9일에는 철도청장으로 일한 경험을 살려 서울지하철건설본부를 설치했다. 그런 다음 1971년 4월 12일 "지하철을 건설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경제부총리 김학렬의 반대를 물리치고 지하철 1호선 공사를 시작했다. 양택식 시장의 최대 공적으로 평가받는 지하철 1호선은 1974년 8월 15일 개통됐다. 얄궂게도 이날 양택식 시장이 사퇴해야 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서울시 주관으로 국립극장에서 개최된 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 저격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3핵 도시 구상

포병 대대장 신분으로 5.16쿠데타에 가담한 구자춘 시장은 김현옥, 양택식 시장의 뒤를 이어 3핵 도시 구상에 입각하여 강남개발에 주력했다. 서울시청 8층 간담회실에 걸린 초상화를 촬영했다.
▲ 제16대 구자춘 서울시장 포병 대대장 신분으로 5.16쿠데타에 가담한 구자춘 시장은 김현옥, 양택식 시장의 뒤를 이어 3핵 도시 구상에 입각하여 강남개발에 주력했다. 서울시청 8층 간담회실에 걸린 초상화를 촬영했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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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9월 2일 제16대 서울시장으로 구자춘이 임명됐다. 포병 대대장 신분으로 5.16쿠데타에 가담한 구자춘은 충남경찰국장, 전남경찰국장을 역임하고, 대령으로 예편한 다음 제주도지사와 경상북도지사를 지냈다. 김현옥, 양택식 시장의 뒤를 이어 박정희 개발독재시대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서울시장 구자춘은 3핵 도시 구상에 입각하여 강남개발에 주력했다.

구자춘 시장이 추진한 3핵 도시 구상은 홍익대 교수 김형만이 입안했다. 3핵 도시 구상은 서울이 광화문과 시청을 중심으로 형성된 단핵도시이기 때문에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기능이 이곳에 집중되어 강북 도심은 날로 혼잡해지고, 외곽은 공간적으로 너무 멀어 도시기능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문제의식에 기초한다.

3핵 도시 구상 이전에도 서울 도심 기능을 분산하자는 주장은 제기되었다. 1966년 서울시가 발표한 서울도시기본계획의 골자는 남서울(지금의 강남구와 서초구)에 입법부를 설치하고, 영등포에는 사법부를, 용산에는 행정부를, 세종로일대에는 대통령 직속기관을 배치한다는 것이었다. 1968년 건축가 김수근이 구상한 선형의 대도시서울계획 또한 서울 도심과 여의도, 영등포, 인천을 잇는 계획과 함께 강남 개발을 염두에 두었다.

3핵 도시 구상은 1977년 4월 서울도시기본구상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서울의 인구를 960만 명으로 산정하고 수립된 서울도시기본구상은 강북권에 480만 명, 영등포권에 276만 명, 영동권에 204만 명이 거주하도록 설계되었다.

서울도시기본구상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3핵도시구상은 서울 인구를 960만명으로 산정하고 강북권에 480만명, 영등포권에 276만명, 영동권에 204만명이 거주하도록 설계되었다.
▲ 3핵도시개념도 서울도시기본구상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3핵도시구상은 서울 인구를 960만명으로 산정하고 강북권에 480만명, 영등포권에 276만명, 영동권에 204만명이 거주하도록 설계되었다.
ⓒ 강남구청 <강남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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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도시기본구상에 따르면 강북권(광화문과 시청일대)은 국가의 중심지역으로 중추적인 중앙행정 기능을 담당한다. 이곳에 밀집된 도심기능의 일부를 영등포권과 영동권으로 분산한 다음 광화문과 서울시청을 중심으로 하는 강북권을 재구성한다는 계획이다. 도심내부의 중요 지점에 대규모의 다원적인 이용이 가능한 복합건물을 건설하고 보행도로를 만드는 등 강북권 도심을 쾌적한 업무공간과 생활공간으로 바꾼다.

영등포권(영등포와 여의도)은 서울과 인천, 서울과 수원 간의 산업지대를 잇는 도심으로 기능하도록 육성한다는 계획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산업지구였던 영등포와 구로공단에는 강북도심의 산업기능을 이전하여 생산 공간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영동권(영동지구와 잠실지구)에는 기존 강북도심에 집중된 행정, 금융 기능을 이곳으로 이전, 도심으로 육성하는 계획이다. 서울시청을 비롯하여 국세청, 관세청, 조달청 등 14개의 2차 정부기관과 한국은행, 산업은행, 외환은행 등 8개 금융기관, 한전 등 정부출자기업 등을 이곳으로 이전하여 도심으로 육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남부서울역과 영동-수원, 영동-성남-수원을 잇는 철도를 건설하고 문화시설단지, 무역센터, 국제스포츠센터를 짓는 계획이 포함되었다.

지하철 2호선

지하철 2호선은 1978년 3월 9일 착공되어 1984년 5월 22일 서울대입구역에서 을지로입구역 구간이 개통되면서 전구간이 완공되었다. 사진은 순환선으로 건설된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출발역인 시청역 모습이다.
▲ 지하철 2호선 시청역 지하철 2호선은 1978년 3월 9일 착공되어 1984년 5월 22일 서울대입구역에서 을지로입구역 구간이 개통되면서 전구간이 완공되었다. 사진은 순환선으로 건설된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출발역인 시청역 모습이다.
ⓒ 전상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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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건설 계획은 윤치영 시장이 재임하던 1964년 12월 2일 처음 발표되었다. 당시 서울시가 발표한 4개의 지하철 노선은 다음과 같다. 1호선은 서울역-동대문-청량리 구간, 2호선은 서소문-을지로6가-성동역 구간, 3호선은 돈암동-충무로4가-장충동 구간, 4호선은 영천-중앙청-종로2가-퇴계로-광희동 구간이다.

1971년 지하철 1호선이 착공될 무렵 서울시는 지하철 1~4호선 노선을 다음과 같이 계획하였다. 1호선은 청량리-종로-서울역-영등포, 2호선은 왕십리-을지로-마포-여의도-영등포, 3호선은 미아리-퇴계로-불광동, 4호선은 강남 포이동-율곡로-대림동을 연결하는 방사선의 노선이었다.

그러나 구자춘 시장은 3핵 도시론에 골몰한 나머지 방사선으로 설계된 지하철 2호선의 노선을 면밀한 검토 없이 순환선으로 바꿔 버렸다. 1975년 2월 구자춘 시장이 20분 만에 즉흥적으로 지하철 2호선 노선을 그리던 장면을 당시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이던 손정목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구 시장은 미리 준비해둔 서울시 지도를 펴놓고 그들이(손정목 등 입회한 서울시 공무원) 서서 보는 앞에서 지하철 2호선의 선을 그었다. 검은색 연필이었다. 종전에 정해져 있던 제2호선은 왕십리-을지로-마포-여의도-영등포였다. 그런데 구 시장은 마포-여의도를 피하여 신촌-제2한강교(양화대교)-당산으로 이었고, 그것을 더 연장하여 구로공업단지-신림동-관악구청앞-사당동-서초-강남-삼성동-잠실-성수-뚝섬을 거쳐 왕십리로 이었다. 구도심(을지로)-영등포-영동을 잇는 3핵의 연결이었다." - 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3, 273~274쪽

서울의 교통난을 완화하려면 방사선의 지하철 건설이 선행되어야 했다. 해외의 사례를 보더라도 도심을 통과하는 몇 개의 지하철 노선을 먼저 건설한 다음 순환선으로 연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구자춘 시장의 안중에는 오로지 3핵 도심을 연결하는 순환선뿐이었다.

지하철 2호선 공사는 1978년 3월 9일 착공되었다. 네 개 구간으로 분할하여 건설된 지하철 2호선은 1980년 10월 31일 신설동역-종합운동장역 구간 14.3㎞가 처음 개통되었다. 1982년 12월 23일에는 종합운동장역-교대역 구간 5.5km가 개통되었고, 1983년 9월 16일에는 을지로입구역-성수역 구간이 완공되었다. 1983년 12월 17일에는 교대역-서울대입구역 구간 6.7km가 개통되었고, 1984년 5월 22일에는 서울대입구역-을지로입구역 구간 19.8km가 개통되어 2호선 전 구간이 완공되었다.

지하철 2호선의 파급효과는 컸다. 강북 인구의 강남 이주가 눈에 띄게 늘었다. 2호선이 착공되기 전인 1977년 말 서울의 인구는 752만명으로 강북 9개구 인구는 489만 명, 강남 4개구 인구는 263만 명(강북과 강남의 인구 비율 65대 35)이었다. 그런데 2호선이 완전 개통된 다음해인 1985년 서울의 인구 964만6천명 가운데 강북 10개구의 인구는 522만 명, 강남 7개구의 인구는 442만6천 명(강북과 강남의 인구 비율 54대 46)인 것으로 나타났다.

지하철 2호선 주변의 고층화도 눈에 띄는 변화였다. 강변역 주변에는 동서울터미널이 이전하였고, 테크노마트(39층)와 고층 아파트가 건설되었다. 올림픽공원이 조성된 잠실역 주변에는 롯데월드가 자리를 잡으면서 재벌 롯데의 본거지가 되었다. 강남역에서 삼성역에 이르는 테헤란로 주변은 마천루의 숲이 되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한국전력 사옥(22층), 무역회관(코엑스 56층), 인터콘티넨탈호텔(33층), 라마다르네상스호텔(22층) 등 고층 건물이 속속 건설되었다.

역세권 개발이 본격화한 것도 이때부터다. 2호선이 부도심권을 연결하게 되면서 지하철역을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2호선 2단계 구간(종합운동장역-교대역)이 개통된 1982년 12월 삼성역-선릉역-역삼역-강남역 주변은 허허벌판 같았다. 그러나 2호선이 완공되자 이 일대는 순식간에 강남 제일의 번화가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김현옥, #3핵도시구상, #한성판윤, #서울도시기본구상, #지하철2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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