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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주먹을 휘두르며 '으리!'를 외치는 사나이, 탈모가 진행 중인 퇴물 헤비메탈을 생각나게 하는 사나이, 특히나 큰 머리만큼 긴 머리카락을 가진 사나이, 바로 김보성이다. 그는 언젠가부터 기약 없이 머리카락을 기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체중감량과 격투기 수련을 병행하고 있었다. 김보성에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뉴스를 보니 그는 소아암 환자의 가발제작에 기부할 머리카락을 기르고 있던 것이었다. 말로만 의리를 외치지 않고 몸소 실천하는 그는 내 인생에 쑥, 들어와 버렸다.

무더위가 시작된 작년 7월, 눈을 가릴 듯 말듯 한 머리카락들을 더 이상 자르지 않기로 했다. 숱 많고 굵은 머리카락을 묶고 다닐 정도가 되었다. 그러자 지인들은 땅콩 같은 뇌가 만개할 만한 표현들로 내 장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선배들은 탈모를 가리기 위해 머리를 기르는 거 아니냐고 묻기도 했고, 친구들은 그 산적 같은 머리를 보고도 애인이 뭐라 안 하냐고 물었고, 친형은 '주진우 기자'를 따라서 머리 기르는 거 같은데, '현실은 김어준'이라는 등의 코멘트를 남겼다.

평가와 질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연락이 없던 친구들이 SNS를 통해 "미용실 예약해줄게"라고 말하는가 하면, 엄마는 줄곧 "꼭 사는 것 포기한 애 같아, 너!"라며 머리 자르기를 간곡히 부탁했다. 치과에서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 꼬마가 내 머리를 빤히 쳐다보면서 엄마에게 "엄마, 저 아저씨는 남자야? 여자야?"라고 묻기도 했다. 아빠는 어느 날부터 나를 '잘생긴 이외수'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남자 화장실에서 머리를 묶다 본의 아니게 남자들을 쫓아낸 적도 있었다. 그래도 '장발 남성'의 장점도 있었다. "남자는 여자처럼 머리를 기르면 안 돼" 같은 '성역할 강요'를 겪다 보니 소수자성을 피부로 느껴볼 수 있었다. 글과 말로만 배워온 페미니즘 같은 소수자에 관한 학문과 운동을 더 깊게 배울 수 있는 경험이 되기도 했다. 수많은 '정상인'들과 대화하고 설득하는 과정이나, 설득할 기회조차 없는 무수한 행인들의 '시선'을 감내해야하는 순간들이 그러했다.

소아암 환자 기부금 모금을 위한 종합격투기 행사에서 '파이터 김보성'은 '1라운드 TKO패'했다. 동시에 남성으로서 35cm를 기른 3년, 50대의 나이에 격투기를 위해 13kg를 감량한 과정, 6급의 시각장애를 안고서 2분 35초를 버틴 링 위의 사투에서 그는 '완승'했다. 나 또한 계획한 2년을 채우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잘랐다. 하지만 30cm를 만들어 '한국백혈병소아암협회'에 머리카락을 기부했고, '머리 긴 남자'에 대한 편견을 가진 이들과 꾸준히 대화하고 설득해나가고 있다. 머리카락을 기르는 것처럼 소수자 운동도 조금씩 자라는 일일 테다. 매번 큰 노력을 쏟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쑥, 자라날 것이다. 이런 믿음이 오늘도 머리를 기르게 만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서진석 씨는 인권연대 회원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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