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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지도 하늘공원에서 바라본 삼각산 연봉들. 구름과 어우러진 모습이 수도 서울의 진산답게 위풍당당하다.
▲ 삼각산 연봉의 위용 난지도 하늘공원에서 바라본 삼각산 연봉들. 구름과 어우러진 모습이 수도 서울의 진산답게 위풍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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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겸재 정선의 그림, <금성평사>의 배경이 된 난지도로 향합니다.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남쪽 한강변에 위치한 해발 98미터의 산, 본래는 산이 아니고 남쪽의 안양천과 북쪽의 홍제천, 불광천, 모래내가 합류하는 지점에 형성된 모래톱이었는데 지금은 흡사 오래된 산성(山城)인양 한강 북안에 우뚝 솟아있습니다.

본래 이곳 난지도가 위치한 곳은 여러 개의 물줄기가 만나 호수처럼 넓은 지대를 형성하였으므로 서호(西湖)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아름다운 경치로 인해 고관대작들의 뱃놀이 장소로도 이름이 높았습니다. 물론 스스로 현실정치에 등을 돌리거나 또는 소외된 선비들이 낚시로 소일하며 조용히 때를 기다리던 곳이기도 하지요.

단종의 왕위찬탈에 반대했던 인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추강 남효온 역시 이곳 난지도를 찾아 가슴에 맺힌 울분을 풀곤 했습니다. 남효온은 일찍이 소릉(昭陵)-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 능-을 복위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는데 소릉 복위는 세조 즉위와 그로 인해 배출된 공신의 명분을 직접 부정한 것으로 훈구파의 극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고 이로부터 그는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전국의 명승지를 두루 찾아다니는 유랑생활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추강집』에 실려 있는 그의 「시장(諡狀)」에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은 기질이 호매(豪邁)하고 지상(志尙)이 고고(高古)하였다. 겨우 약관의 나이에 소를 올려 소릉(昭陵)의 복위를 청하니, 도승지 임사홍(任士洪)은 '신하로서 감히 의논할 바가 아니다.'라는 이유로 맨 먼저 건의하여 힘껏 배척하였고, 영의정 정창손(鄭昌孫)은 일찍이 소릉을 폐하는 논의에 간여했기 때문에 또한 저지하였고, 당시 사람들은 미친 서생으로 지목하며 손창윤(孫昌胤)에 견주었다. 공이 물러나서 시를 짓기를,

북쪽 대궐에 일찍이 글 올리니(北闕曾上書)
여론이 자못 어지럽게 들끓었네(物論頗紛厖)
공연히 손창윤이란 이름만 얻어(謾得孫子號)
도롱이 걸치고 추강에 돌아왔네(短蓑來秋江)

이때부터 드디어 세상에 뜻을 끊었다. 종종 곧은 말과 격한 의논은 비록 기휘(忌諱)를 저촉하더라도 조금도 피하지 않았고, 간혹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고 돌아왔다. 몸소 행주(杏洲)에서 농사지었다. 겨를이 있으면 도롱이를 쓰고 낚싯대를 잡고서 남포(南浦)에서 고기 잡았고, 혹은 둔한 나귀를 채찍질하여 압도(鴨島)를 찾아 갈대꽃을 태워서 물고기와 게를 굽고 운자를 내어 시를 짓다가 밤을 새운 뒤에 돌아왔다. 나라 안의 모든 명승지는 발걸음이 거의 다 미쳤다.(한국고전번역원 | 박대현 (역) | 2007)

해발 98미터의 난지도 정상 하늘공원에 들어서면 광활한 갈대숲이 보는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옛날 난지도의 모습도 이처럼 아늑하고 평화로웠을까?
▲ 하늘공원 해발 98미터의 난지도 정상 하늘공원에 들어서면 광활한 갈대숲이 보는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옛날 난지도의 모습도 이처럼 아늑하고 평화로웠을까?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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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나오는 압도(鴨島)가 곧 오늘날의 난지도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양군(高陽郡) 조에는 "압도(鴨島)는 군 남쪽 15리 지점에 있는데, 둘레는 22리이다. 갈대가 생산되는데, 선공감(繕工監)에서 해마다 베어가서, 나라의 쓰임에 충당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지도가 예로부터 왕실소유였으며 갈대가 많이 생산되었던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14년 작성된 고양군면 폐합도. 이전의 지도와 다르게 난지도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다.
▲ 고양군면 폐합도 1914년 작성된 고양군면 폐합도. 이전의 지도와 다르게 난지도라는 지명이 사용되었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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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난지도는 강 가운데 있는 모래섬이기 때문에 한번 큰 홍수를 겪고 나면 그 지형이 크게 달라져서 비록 왕실 소유라고는 해도 그 경계가 모호한 지역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새로운 땅이 생겨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했을 것이므로 이를 이용하여 난지도의 땅을 편취하려는 이들도 있었으니 대표적인 인물이 곧, 광해군 때의 문신 이이첨입니다. 『승정원일기』에는 그가 "압도(鴨島)의 들을 개간하여 기름진 땅을 갈라 차지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일제강점기 때는 정미칠적 중 한 사람인 송병준이 난지도 일대의 땅을 대거 소유하였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십여 년 전에 그 후손들이 재산환수소송을 제기해서 세간의 이목이 쏠리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겸재 정선은 이곳 난지도 일대의 모습을 「금성평사(錦城平沙」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당시에 난지도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던지, 그림 속의 난지도는 그저 강가에 있는 평평한 모래톱에 불과합니다. 그 모래톱 뒤로 솟아있는 산이 금성산이어서 '금성산 아래 모래톱'이라는 뜻으로 제목을 「금성평사'라고 했다고 합니다.

역대 문헌 속에 등장하는 난지도는 대개 '압도(鴨島)'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고, 「경조오부도」를 비롯한 19세기 지도에는 '중초(中草)'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언제부터 난지도라는 이름을 썼는지 확실치 않으나 1893년에 발간된 『여재촬요(輿載撮要)』 「경성오부도」에 아직 '중초(中草)'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반해, 1911년 『조선지지자료』 「고양군면폐합도」에 '난지도(蘭芝島)'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난지도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토지조사사업이 시행되면서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해 봅니다.

성산대교와 63빌딩 너머로 멀리 관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 하늘공원에서 바라본 한강 성산대교와 63빌딩 너머로 멀리 관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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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인근에 선유도(仙遊島)도 있어서 신선들의 풀인 난초와 지초가 많은 섬이라는 뜻의  난지도(蘭芝島)는 주변 지명과도 잘 어울려 보입니다. 상암동월드컵경기장을 지나 하늘사다리라고 명명된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라서면 난지도 정상 하늘공원에 도달합니다.

북으로는 삼각산 연봉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고 강 건너 편으로는 관악산이 우뚝 솟아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서해 쪽으로는 검단산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산 정상부는 광활한 평원, 그야말로 일망무제의 갈대밭입니다. 추강 남효온은 이곳 난지도의 풍경을 너무나 사랑하여 여러 편의 시를 남겼는데, 그 중의 한 수를 읊조려봅니다.

꽃섬 십 리 밀물이 쓸고 간 자리(芳洲十里露潮痕)
손수 호미 잡고 풀뿌리를 캐내네(手自持鋤採艸根)
샘물 길어다 보리밥 지어먹으며(野水汲來澆麥飯)
정차 이 한 몸 강촌에 부쳐볼까 한다네(擬將身世付江村)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난지도는 과거 칠팔십 년대 서울시의 쓰레기 매립장으로 지정 고시되어 1993년 매립이 종료될 때까지 15년간 매일 덤프트럭 3000대 분량의 쓰레기가 이곳에 버려졌다고 합니다. 지금 난지도는 해발 98미터의 산 아닌 산이 되었는데 무려 9,200 만톤의 엄청난 쓰레기를 머리에 이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면서도 난지도는 사시사철 그 이름처럼 아름다운 꽃과 향기를 잃지 않고 있으니 사람으로 치면 참으로 훌륭한 덕성을 갖춘 군자 중의 군자라 할 것입니다. 수많은 새와 짐승들이 오늘도 난지도의 품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잠시 벤치에 앉아 발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내려다봅니다. 난지도가 한강의 기적을 일군, 대한민국의 위대한 기술 문명의 표상이 될지, 아니면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대재앙의 전조가 될지 강물은 그저 말이 없습니다. 2017. 7. 31. 현해당


태그:#현해당, #인문기행, #난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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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기행 작가. 콩나물신문 발행인. 저서에 <그리운 청산도>, <3인의 선비 청담동을 유람하다>, <느티나무와 미륵불>, <이별이 길면 그리움도 깊다> <주부토의 예술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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