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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당시 전주 경기전 내 '전주 사고'에 보관되었던 실록만 불에 타지 않았다. 서울, 충주, 성주 사고의 실록은 불에 타서 없어졌다.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세계기록유산이다. 전주 사고의 실록이 임란 때 잘 지켜낸 분들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아니 인류사회는 세계기록유산 하나를 잃었을 것이다. 사진은 전주 사고를 복원하여 실록 관련 전시물들을 보여주는 경기전 내 '실록전' 건물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주 경기전 내 '전주 사고'에 보관되었던 실록만 불에 타지 않았다. 서울, 충주, 성주 사고의 실록은 불에 타서 없어졌다. <조선왕조실록>은 현재 세계기록유산이다. 전주 사고의 실록이 임란 때 잘 지켜낸 분들이 없었다면 우리나라, 아니 인류사회는 세계기록유산 하나를 잃었을 것이다. 사진은 전주 사고를 복원하여 실록 관련 전시물들을 보여주는 경기전 내 '실록전' 건물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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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史閣)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사고(史庫)는 고려·조선 시대에 실록을 보관했던 건물이다. 실록(實錄)은 각 임금의 재위 기간에 일어났던 일들을 날짜 순서대로 기록한 역사서다.

조선 시대의 실록 전체는 『조선왕조실록』, 한 임금의 실록은 『선조실록』 식으로 부른다. 다만 왕위에서 쫓겨난 연산군과 광해군 시기의 실록은 예외로 분류돼 『연산군일기』와 『광해군일기』로 격하된다. 왕이 아닌 군(君, 왕자)의 시대를 담고 있는 까닭에 '실록'이라 할 수 없으므로 '일기'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고려 시대의 실록은 외적의 침입을 당하는 동안 모두 없어졌고, 『조선왕조실록』은 유네스코(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가 선정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돼 있다.

등재 숫자로 볼 때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문화 국가다. 일본은 하나도 없고 중국은 다섯 가지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1위, 세계 6위에 올라 있다.

중국도 명나라와 청나라의 실록을 가지고 있지만 세계기록유산으로는 등재되지 못했다. 중국의 실록은 황제가 개입하여 내용을 마구 고치기도 했고, 붓으로 쓴 수준인 탓에 알아볼 수 없는 부분도 많다.

우리나라의 세계기록유산

우리나라는 아홉 가지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1. 조선왕조실록

2. 조선 시대 임금의 명령을 관리하던 승정원이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날마다 기록한 승정원일기

3. 1443년(세종 25) 창제된 세계 최고의 과학적 문자 훈민정음(한글)의 원리에 대해 1446년(세종 28) 한문으로 해설한 훈민정음 해례본

4. 조선 시대 왕실의 중요한 행사와 나라의 건축 사업 등을 그림과 글로 기록한 조선왕조의궤

5. 허준이 1610년(광해군 2)에 완성한 의학 서적 동의보감

6. 1760년(영조 36)부터 1910년(순종 4)까지 임금의 동정과 나랏일을 기록한 일성록

7. 고려 시대의 불교 서적 직지심체요절 : 직지심체요절은 1377년(고려 우왕 3)에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 1455년에 인쇄된 서양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인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에 견줘 78년이나 앞선다. 게다가 우리나라에서 금속활자가 발명된 때는 1377년보다도 훨씬 앞선다. 책은 전해지지 않지만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전해지는 상정고금예문은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200년 이상 앞선 1234년(고려 고종 21)에 간행되었다.

8. 불교 경전을 집대성하여 한문으로 번역 · 출간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수준 높은 판각 고려대장경

9. 1980년 5월 전두환 등 군부의 집권 음모에 저항하여 싸운 광주 일원 시민들의 투쟁을 담은 「5 .18 민주화운동 기록물」


세계적으로도 특이한 조선 실록

 실록을 지켰던 사찰들 : (왼쪽부터) 강화도 전등사, 무주 적상산 안국사, 경북 봉화 태백산 각화사, 오대산 월정사 영감난야
 실록을 지켰던 사찰들 : (왼쪽부터) 강화도 전등사, 무주 적상산 안국사, 경북 봉화 태백산 각화사, 오대산 월정사 영감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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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해 조선의 실록은 임금이 열람할 수 없었고, 4부를 만들면서도 아름다운 활자로 인쇄까지 했다. 게다가 472년에 이르는 오랜 세월의 역사를 꼼꼼하게 기록한 세계 유일의 왕조 실록이다(다만 고종과 순종 시기의 실록은 일제의 감시를 받으면서 기술됐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실록으로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4부 인쇄된 실록은 내사고인 서울 춘추관과 세 곳 외사고인 충주 동량면 하천리 정토사, 경북 성주, 전주 경기전 사고에 보관되었다. 전주 경기전을 제외한 세 곳의 사고는 모두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면서 실록을 잃어버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내장산에 숨겨져 화를 피했던 전주 사고의 실록은 그 후 바닷길을 거쳐 묘향산 보현사로 옮겨졌다. 전쟁이 끝난 뒤 실록은 1603년(선조 36) 강화도로 다시 옮겨져 1606년(선조 39)까지 4부를 더 인쇄했다. 다섯 부는 춘추관, 강화도,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에 각 1질씩 보관됐다.

내사고인 춘추관 사고는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일부 소멸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완전히 없어졌다. 강화 사고는 본래 관아 내부에 있다가 1606년(선조 39) 마니산으로, 1678년(숙종 4) 정족산성으로 옮겨졌다. 묘향산 사고는 1633년(인조 11) 무주 적상산으로 옮겨졌다.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깊은 산속으로 옮겨 다닌 사고를 지키기 위해 수호 사찰들이 임명됐다. 정족산 사고는 전등사, 적상산 사고는 안국사, 태백산 사고는 각화사, 오대산 사고는 월정사의 승려들이 밤낮으로 보초를 서서 실록이 보관된 사각과 왕실의 족보 선원보가 보관된 선원각을 지켰다. 사각과 선원각은 모두 누각 형태의 2층 기와 건물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에 실록들은 조선총독부 등으로 옮겨졌다. 특히 일본 동경제국대학으로 반출됐던 오대산 사고의 실록은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불에 타서 없어졌다.

금산까지 왜적 밀려오자 실록부터 피란시킨 선비들

 경기전 정자각 : 丁(정자)를 닮은 건물이라 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정자각은 임금에 대한 제사를 준비하는 집이다. 한복을 빌려 입은 관광객들이 정자각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경기전 정자각 : 丁(정자)를 닮은 건물이라 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 정자각은 임금에 대한 제사를 준비하는 집이다. 한복을 빌려 입은 관광객들이 정자각 앞에서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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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보유하고 있는 세계기록유산 중 한 가지인 실록 관련 유적을 답사하려 한다. 최고의 답사지는 말할 것도 없이 전주 경기전(慶基殿)이다.

경기전은 이성계 집안 조상들이 살았던 본관지(本貫地) 전주에 설립된 조선 태조의 어용전(御容殿, 임금의 초상화를 모신 집)이다. 어용전은 전주 외에 경주와 평양 두 곳에 더 지어졌다. 1410년(태종 3) 건축된 세 어용전에 세종은 1442년(세종 24) 각각 경기전, 집경전(集慶殿), 영숭전(永崇殿)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1592년 6월 22일, 왜적이 금산까지 몰려왔다는 급보를 들은 손홍록, 안의, 오희길, 유신 등 전주의 선비들은 경기전 경내의 실록과 태조 초상을 급히 내장산 용굴암에 숨겼다.

이들은 그 후 1년 이상 실록과 어용을 내장산 이곳저곳으로 옮겨가며 지켜내었다. 이들이 없었으면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은 지구상에 남아 있지 못했을 터, 그 위대한 업적과 함께 꽃다운 이름도 역사에 아로새겨져야 할 것이다.

 경기전 어진(왕의 얼굴) 박물관
 경기전 어진(왕의 얼굴)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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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이 세 분들에 대해 너무 지나친 찬사를 바치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는 독자가 계신다면 문화재청 누리집의 다음 문장을 근거 자료로 보여드릴 수 있을 것이다.

'조병희 선생(1880년 출생해 1925년 타계한 유학자)은 (전주 사고의 실록을 지켜낸) 이들의 노력을 10만 대군을 물리친 공에 버금가는 행동이었다고 평가했다.'

전쟁 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침략에 동원한 군대는 모두 15만 9천여 명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5만 2500여 명만 조선 전선에 투입되고 나머지는 이키와 쓰시마에 남겨두었다(이이화 『조선과 일본의 7년 전쟁』). 손홍록 등의 업적이 10만 대군을 물리친 공에 버금간다는 조병희의 평가는 전주 사고의 실록을 지켜낸 일이 얼마나 대단한 공로인가를 단적으로 비교·설명해주는 표현이다.

 손홍락, 안의 등을 모시는 남천사,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844에 있다.
 손홍락, 안의 등을 모시는 남천사,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844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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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희 선생의 평가는 문화재청 누리집의 남천사(藍川祠)에 대한 '문화유산 정보' 중 일부다. 전북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844에 있는 문화재자료 제154호 남천사는 손홍록, 안의, 김후진 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김후진은 이귀와 함께 전남 장성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의주에 머물고 있는 선조의 행재소와 고경명 부대에 양곡을 조달하기도 한 임진왜란 의병장이다. 누리집의 설명을 조금 더 읽어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0일 만에 평양, 서울, 경주가 함락되는 등 위태로운 상황이 계속됐다. 이때 손홍록, 안의 두 분은 머뭇거리던 관아 사람들을 설득해 당시 전주사고에서 보관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과 경기전에 모시고 있던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내장산의 동굴로 옮겨 놓았다.                                                        

그 후 강화를 거쳐 묘향산까지 옮겨가며 전쟁 기간인 7년 동안 이것들을 지켰다. 후대 조병희 선생은 이들의 이런 노력은 10만 대군을 물리친 공에 버금가는 행동이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실록은 서울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 4곳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3곳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유일하게 남은 전주사고의 실록은 역사의 단절을 막고 조선 전기 방대한 역사의 맥을 다시 이어나갈 수 있게 했다.'

남천사에 관한 문화재청 누리집 '문화유산 정보'의 마지막 문단도 말하고 있지만, 전주 사고의 실록이 지켜지지 못했으면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은 소멸됐을 것이다. 지금도 경북 성주 사고의 경우에는 그 터조차 찾지 못하는 지경이다. 그만큼 손홍록, 안의, 오희길, 유신 등은 우리나라의 '문화 영웅'이다.

실록 관련 다양한 전시물들로 꾸며진 실록각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방법(경기전 실록각 내 게시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방법(경기전 실록각 내 게시물)
ⓒ 경기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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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사고의 실록은 1592년 6월 22일 이래 신속히 피란을 갔지만 '실록각'은 1597년 정유재란 때 불탔다. 오늘날 경기전 경내에 복원돼 있는 건물은 1991년에 지어진 것이다. 조선 시대의 사고답게 2층 누각 형태의 기와집으로 다시 세워졌다.

실록각 앞에 갔을 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朝鮮王朝實錄(조선왕조실록)保全(보전)紀績碑(기적비)'를 지나 실록각 정면에서 건물 사진만 찍고 돌아서는 답사자가 종종 있다. 문화재로 등록된 누각은 흔히 출입 금지이므로 이곳도 그러려니 예단은 한 탓이다. 하지만 전주 사고 실록각은 그렇지 않다.

실록각 2층은 전시실로 꾸며져 있다. 「사고의 변천사」, 「전주 사고의 역사」, 「세계기록유산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의 과학적 보관 방법」, 「실록 제작의 전 과정을 기록한 책, 실록청의궤와 실록형지안」, 「사관과 사초」 등 다양하고 충실한 게시물들을 갖추어 답사자를 흐뭇하게 해주는 공간이다.

 왼쪽 뒤에 실록각을 두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보전 기적비'
 왼쪽 뒤에 실록각을 두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보전 기적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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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각지의 사고와 관련되는 사진들도 있고, 실록의 실물 모습을 재현해주는 전시물도 있다. 이 2층을 놓치고 돌아선다면 멀리서 발걸음을 한 자신의 노고가 반쯤은 물거품이 되지 않겠는가.

손홍록, 안의, 오희길, 유신 등은 무거운 실록을 짊어지고 내장산 깊은 골짜기까지 올라갔다. 거기서 1년 이상 머물러 살면서 실록을 지켰다. 어찌 조선왕조실록 보전 기적비에서 답사를 멈출 것인가. 20m만 더 나아갈 일이다. 그곳에 역사가 있다.

<조선왕조실록> 지켜낸 영웅, 대우가 소홀하다

글 끝에 한 가지를 덧붙이고자 한다. 남천사에 대한 합당한 대우가 필요하다. 중언부언하지만, 손홍록, 안의 같은 분들이 없었으면 실록은 남아 있지 못했다. 합당하게 기리는 것은 당연하다.

남천사 주변을 이른바 '정화'해야 한다고 본다. 정화는 박정희, 전두환 군사 정권이 즐겨 사용했던 어휘다. 충무공 이순신에서 동학혁명 우금치 전적지에 이르기까지 '정화'를 하고 '정화 기념비'도 빠짐없이 세운 그들이 왜 남천사는 외면했을까. 역사의 기록이 무서워서였을까. 남천사 옆에 실록을 안내하는 전시관을 세울 것을 제안한다.

 주위는 페허, 비각은 흉물로 방치된 '임진 창의 원모당 김공 후진 유허비'의 모습
 주위는 페허, 비각은 흉물로 방치된 '임진 창의 원모당 김공 후진 유허비'의 모습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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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사의 허술한 면모를 상징해주는 유적이 있다. 남천사 뒤로 마을 끝까지 가면 만날 수 있는 '임진 창의 원모당 김공 후진 유허비'가 그것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김후진은 남천사에 모셔진 분들 중 한 분이다. 실록 관련 유공자는 아니지만 왜란 당시 창의했던 의병장이다. 그런데 유허비의 비각은 허물어지기 직전으로 거미줄과 잡초가 무성하고, 주변은 폐가와 황무지로 뒤범벅이 돼 있다. 안내판도 없다. 이런 정도라면 현창을 아니함만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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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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