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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원주, 80년 광주'

1980년대 민주화운동의 중심이 광주였다면, 1970년대에는 강원도 원주였다고 한다. 그만큼 원주는 70년대 운동의 구심점으로서 민주화에 큰 기여를 했다.

원주에 머물던 시인 김지하는, 정부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을 정도로 권력의 폐부를 신랄하게 비판했고, 지학순 주교는 유신헌법 무효 선언을 하는 등 가톨릭 저항운동의 서막을 열었다.<아침이슬>의 가수 김민기도 원주에서 활동했고, 학생운동가 손학규 역시 원주에 피신했다.

김지하, 지학순, 김민기, 손학규, 그 외에도 언론인 리영희, 국희의원을 지낸 이부영, 미술사학자 유홍준, 판화가 이철수, 목사 이현주, 녹색평론의 김종철 등이 스승으로, 혹은 동지로 믿고 의지했던 사람. 바로, 원주의 장일순이었다.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장일순   

 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1956년 대성학교 설립 당시 교비 옆에서 찍은 29세의 장일순 선생.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교육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동명의 학교를 세웠다. 이후 1965년 대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나서게 됨에 따라, 당국에 의해 이사장 직을 사임했다.
ⓒ 무위당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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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에 원주에서 태어난 장일순은, 조부로부터 유불도, 동학을 배웠다. 줄곧 원주에서 자란 그가 원주를 떠난 것은 1944년 경성공전(서울대 전신)에 입학해서다. 그때 몽양 여운형에게 배움을 받은 것 같다. 그러나 장일순은 미군 대령의 총장 취임을 반대하는 학생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제적되고 만다.

다시 원주로 돌아온 그는, 대성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을 하는 한편,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이때 원주 혁신계의 윤길중과 활동하면서, 죽산 조봉암과도 교류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조봉암의 영향을 받은 장일순은 중립평화통일론을 주장했는데, 이게 빌미가 돼 5.16 쿠테타 정권에 의해 3년간 옥고를 겪어야 했다.

출옥 후 장일순은 지학순 주교, 김지하 시인 등과 함께 본격적인 민주화운동을 전개한다. 이름을 알리는 걸 꺼려했던 그는 원주민주화운동의 조용한 버팀목이 됐다. 많은 운동가들이 그에게 배움을 청하고자, 도움을 얻고자 찾아왔는데, 이 때문에 당국은 장일순을 감시하기 위한 전담 파출소를 그의 집 옆에 세울 정도였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지역운동에 집중했는데, 1994년 타계하기 전까지 피폐해진 농촌을 살리기 위해 농업, 신협 운동을 이끌었다. 이는 지금의 협동조합과 환경운동의 모태가 되어, 한살림, 생협, 녹색평론 등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이러한 그를 일컬어 이현주 목사는, "부모 없는 집안의 맏형 같은 분"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장일순은 민주화운동과 지역운동의 든든한 맏형이었다.

장일순 생가를 찾아서

 장일순 선생 생가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친구들, 장일순 선생의 아드님, 필자.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아드님은 학생운동을 했다. 선생을 쏙 빼닮은 외모 덕에 마치 장일순 선생과 이야기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장일순 선생 생가에서 찍은 사진. (왼쪽부터) 친구들, 장일순 선생의 아드님, 필자.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아드님은 학생운동을 했다. 선생을 쏙 빼닮은 외모 덕에 마치 장일순 선생과 이야기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 신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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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순 선생이 살던 생가는, 지금도 부인 이인숙 선생이 살고 계시다. 생가가 봉산동에 있다는 정보만 갖고서 우리는 무작정 봉산동으로 향했다. 그곳 봉산동성당에 여쭈면 위치를 알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정작 젊은 신부님은 장일순 선생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았다.  

더운 날씨에 지친 우리는, 성당 건너편 카페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커피를 주문하면서, 주인 분께 혹시 장일순 생가의 위치를 아시냐고 물었다. 다행히 위치를 알고 계셨다. 잠시 더위를 식힌 우리는, 주인 분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생가를 찾아갔다. 도보로 5분 거리였다.
    
파란 대문의 오래된 집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한 부부 내외분이 나왔다. 한눈에 장일순 선생의 아드님임을 알 수 있는 외모였다. 장일순 선생을 존경하는 대학생들이라 말씀드리니 반갑게 맞아주셨다. 실제로 나는, 중학교 때 장일순 선생과 이현주 목사의 대화록 <노자 이야기>를 읽은 게 이후 대학 철학과에 진학한 계기일 만큼, 선생을 존경했다.

내외 분은 시원한 수박을 썰어 주셨다. 수박을 먹으며 우리는 선생의 둘째 아드님과 말씀을 나눌 수 있었다. 장일순 선생의 악력은 익히 아는 바, 책에서는 보지 못할 '아버지' 장일순에 대한 얘기를 여쭈었다.

훌륭한 어른들은 공정무사한 성격 탓에, 정작 집안에는 소홀한 경우가 많다. 혹시 장일순 선생도 '나쁜 아버지'는 아니었는지, 나는 다소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선생은 그런 분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자식들에게도 따뜻했고, 자식이 하고자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고 믿고 묵묵히 응원해주시는 분이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유명한 어른을 아버지로 둔 자식의 애환은 없었을까. '어른'을 아버지로 둔 부담감이 있었으리라 짐작했지만, 혹독했던 시절에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건 부담감보다는 위험한 일이었다고 했다. 오히려 감시가 매서웠는데, 군에 입대하자 장교가 이미 아버지에 대한 정보를 꿰고 있을 정도였다.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여쭙고 들을 수 있었다. 당시에 선생을 찾아 온 운동가들이 동네에 많이 기거했고, 이를 감시하기 위해 세운 파출소가 바로 조금 전에 우리에게 생가 위치를 알려 준 카페 자리였다는 것 등, 책으로는 접하지 못할 이야기들을 들었다. 원주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었다.

(※ 혹 이 기사를 보고 생가를 찾아가고자 한다면, 평일은 피하길 부탁드린다. 선생의 부인이신 이인숙 선생께서 몸이 편찮으신 탓에 이제는 방문객을 받기가 어렵다. 주말에 아드님 내외가 오신다고 하니, 가야한다면 주말을 권한다.)

'무위당사람들'을 만나다

 장일순 선생 생가 동네. 선생 생가를 제외한 나머지 집은 대부분 헐리고 신작로를 놓아서, 그 시절 동네의 정취를 느끼기는 어렵다.
 장일순 선생 생가 동네. 선생 생가를 제외한 나머지 집은 대부분 헐리고 신작로를 놓아서, 그 시절 동네의 정취를 느끼기는 어렵다.
ⓒ 신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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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 숙소에서 잠을 잔 우리는 다음날, 무위당기념관에 갔다. 무위당은 장일순 선생의 호다. 기념관에는 마침 교육을 받으러 온 중·고등학생들이 강의를 듣고 있었다. 기념관 옆에는 '무위당사람들' 사무실이었다.

무위당사람들이란 이름이 내게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회 명사의 유지를 잇는 단체들은 한결같이 '호+이름+선생기념사업회'라는 이름이었다. 예컨대, '무위당장일순선생기념사업회' 식이다. 그런데 '무위당사람들'이란 단체명은 겉치레를 싫어했던 선생과 매우 어울렸다.

실제 활동에 있어서도, 내가 아는 기념사업회들은 대부분이 이름 그대로 기념사업이 활동의 전부였다. 그런데 무위당사람들 활동가 분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무위당사람들은 교육활동, 협동조합활동, 지역운동 등 지금도 활발한 활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활동가 분으로부터 어떻게 장일순 선생의 정신을 계승한 활동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자세히 들었다. 그런데 활동가 분이 어딘가 낯이 익었다. 그분도 내가 낯이 익다고 했다. 알고 보니, 이전에 다른 단체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이였다.

낯선 곳 원주에서, 그것도 존경하는 장일순 선생의 유지를 잇는 단체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것도 하나의 기쁨이었다. 우리는 다음에 한 번 더 꼭 찾아오리라 약속했다. 그날을 기약하며 우리는 원주 여행을 마무리했다.

덧붙이는 글 |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주최한 민주화운동 대학생 탐방에 선정돼, 친구들과 함께 2박3일간 민주화운동 관련 현장을 탐방했습니다. 그중 몇 곳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대학에서 철학과 국문학을 공부했습니다. 보다 나은 삶과 더 정의로운 나라를 꿈꿉니다. 녹색당ㆍ이재명캠프에서 일했습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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