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 인문계 고등학생에게는 여름방학이 며칠 안 된다. 기존의 반강제적인 방학 중 방과 후 수업은 사라진지 꽤 됐지만, 여전한 입시에 대한 중압감이 아이들을 학교에 묶어두고 있다. 공부가 되던 안 되던 교실에 앉아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우리 학교의 경우, 제대로 방학을 만끽하고 있는 아이들은 세 명 중 한 명이 채 안 된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집보다 교실이 시원하기 때문에 방과 후 수업을 신청했다는 경우도 많다. 공부를 할 수 있는 곳 중 하루 종일 에어컨을 틀어주는 곳은 공공도서관과 학교밖에 없다는 거다. 자리를 잡기도 힘든데다 이래저래 눈치가 보이는 공공도서관보다 익숙한 교실이 공부하기에 백 배 더 낫다며, 피서지 삼아 등교하는 친구들이 적지 않단다.

아이들은 등교하자마자 에어컨부터 틀어댄다. 창문이 닫혀 밤새 덥혀진 교실은 비스듬한 햇볕에도 열기를 뿜는다. 이른 아침부터 무더위와의 전쟁이 시작되고, 오전 10시면 연일 공식처럼 폭염을 알리는 긴급재난문자가 울린다. 폭염이 시작된 지난 6월 말부터 학교 운동장은 일찌감치 빈 공터가 됐고,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 대신 에어컨 실외기 돌아가는 소음만 요란하다.

요즘 같은 날씨에는 최신형 에어컨도 힘이 부치는 것 같다. 천정의 에어컨과 여러 대의 벽걸이 선풍기가 합세해도 더위에 지친 아이들의 짜증을 누그러뜨리지 못한다. 중앙제어식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연신 계기판에 다가가 온도 내림 단추를 습관처럼 눌러대는 아이들의 표정을 통해 올 여름 폭염의 기세를 짐작할 수 있다.

교실 에어컨은 여름철 실내 적정온도인 26℃로 고정되어 있다. 에너지 절감 차원에서 임의로 더 낮출 수 없도록 학교마다 대개 중앙제어식으로 운용된다. 일반 가정이라면 더위로 인한 불쾌감을 너끈히 피할 수 있는 온도지만, 수십 명이 함께 생활하는 교실은 사정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에어컨을 켠 상태로 실내 온도를 측정해보면 거의 30℃에 육박한다.

36.5℃의 열을 발산하는 '인간 난로'가 수십 대인데다 쉬는 시간마다 들락거리는 통에 찬 기운이 교실에 비축될 겨를이 없는 탓이다. 그나마 아이들은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라 견딜 만할지는 몰라도, 긴 바지 차림에 내내 서서 수업해야 하는 교사는 더위에 무방비 상태다. 목덜미에서 시작된 땀이 등골을 타고 내려가 엉덩이로 흘러드는 찝찝함이란, 설명하려니 민망하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하염없이 적정온도를 낮출 수도 없다. 당장 교육적으로 온당치 못하다. 줄곧 '에너지 보존의 법칙' 운운하며, 온도를 낮춰 우리가 시원해지는 만큼 에어컨이 없는 이웃 누군가는 꼭 그만큼 더운 여름을 감내해야 한다고 강조해온 터다. 더욱이 미래세대를 위해 원전을 폐쇄하자며 서명운동까지 참여한 마당에, 명색이 교사인데 아이들 앞에서 모순되는 행동을 보일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선생님도 반바지를 입으세요. 얼마나 시원한지 몰라요."

수업시간 한 아이가 장난치듯 건넨 이 말을 듣기 전까지는 교사가 반바지를 입고 출근하는 모습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다. 전가의 보도처럼 교사가 반바지 차림으로 교단에 선다는 건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리는 일로 막연히 여겨왔던 것이다. 교생 실습 때는 물론이고, 초임 시절 매일 정장 차림으로 출근해야 한다는 것이 선배 교사들의 일성이었으니, 소풍날에도 정장을 입었던 '웃픈' 기억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TV에서 반바지는커녕 반팔 티셔츠를 입은 공무원들의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심지어 폭염 대책을 논의하는 회의석상에서도 꼬박꼬박 긴 팔 와이셔츠에 정장 차림을 하고 있는 마당이니 반바지는 파격을 넘어 '불경스러운' 복장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권장'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된 여름철 복장은 기껏해야 꽁꽁 동여맨 넥타이를 푸는 정도에 불과하다.

적어도 아이들은 교사들이 반바지를 입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전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교사들의 복장에 별 관심이 없고, 기껏해야 '핏감'이 좋다는 식으로 교사들의 옷차림을 평가할 뿐이다. 참고로 '핏감'이란 옷이 몸에 잘 맞는 느낌을 가리키는 그들만의 신조어다. 수업을 하다 말고, 반바지 차림에 대한 아이들의 생각을 물었더니 '천편일률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저희들이 입는 여름철 교복은 반바지로 하자며 학칙을 손수 개정해놓으시곤, 정작 선생님들은 반바지 차림이 왜 안 되는지 이해할 수 없어요."
"지금이 어디 복장으로 권위가 세워지는 시대인가요. 반바지 차림에도 '간지'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요즘엔 '간지'가 곧 권위라는 걸, 설마 모르세요?"
"여자 선생님들은 치마를 입는데, 왜 남자 선생님들은 반바지가 왜 안 되는 거죠? 그나저나 반바지를 입으면 안 된다는 규정이 있기는 한 건가요?"


내친 김에 교사들의 복장에 대한 규정을 들여다보았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20년 가까이 근무하면서도 단 한 번도 찾아볼 생각조차 못했다. '교원복무규정'이라는 게 있긴 하지만, 대개 근무 시간과 휴가, 정치적 중립 의무 등에 관련된 내용이 대부분일 뿐 복장에 대한 규정은 따로 마련돼 있지 않았다. 다만, 교원의 복무규정은 일반직 공무원에게 적용되는 사항과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규정이 있다.

공무원 복무규정 제8조에서 복장과 복제에 대한 규정을 찾아볼 수 있다. '근무 중 그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단정한 복장을 하여야 한다'고만 명시해 놓았을 뿐, 반바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예상했던 대로 '품위'와 '단정한 복장'이라는 두루뭉술한 문구가 지금껏 교사들의 반바지 차림을 막은 오랜 관행의 유일한 근거인 셈이다. 물론, 품위와 단정함에 대한 판단은 늘 그래왔듯 말단 교사들의 몫이 아니다.

폭염 경보를 알리는 긴급재난문자가 울리고, 더욱이 에어컨마저 순간 작동을 멈춘 며칠 전 수업이 끝나자마자 교무실에 달려와 내부 통신망으로 메신저를 띄웠다. 교사들의 반바지 차림을 허용해달라는 내용이었다. 대구와 광주에 바나나가 열리고, 원전의 불꽃이 드디어 꺼져가기 시작한 지금이 적기라는 말을 덧붙이며, 모든 교직원을 대상으로 오랜 관행에 대해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반바지 차림을 바라는 간절함의 차이였을까. 단 두 명의 동료교사만 지지하며 동참하겠다고 답장했을 뿐, 나머지는 가타부타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부러 찾아가 의사를 물어봐도 복무규정의 문구마냥 두루뭉술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논란에 휘말리고 싶지 않다는 듯, 다들 말 꺼내기 조심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입고 싶으면 입고, 내키지 않으면 안 입는 것"이라며 언뜻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유교적인 문화가 강한 학교에서 반바지 차림은 시기상조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또, 학교 내에서의 인식보다 학교를 찾아온 학부모들의 시선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었다. 학부모들이 반바지 차림으로 다리를 훤히 드러낸 교사들을 어떻게 보겠느냐는 거다.

심지어 무더위를 견디는 것도 교육의 일환이라며, 교사가 모범을 보일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며 반문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을 찾고, 또 조금만 추우면 히터 근처에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요즘 아이들의 나약함엔 교사의 책임도 없지 않다는 것이다. 여름철 잘 가르치자고 반바지 차림을 건의했다가 되레 아이들을 나약하게 만들 수 있다는 핀잔만 들은 셈이다. 

이러한 인식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은 놀랍게도 아이들이었다. 그들의 재기발랄함은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을 마구 조롱했다. 교사들 반바지를 못 입게 하는 것과 학생들 교복과 두발을 단속하는 논리가 똑같다며, 그저 통제를 위한 장치일 뿐 교육과는 무관하다며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했다. 또, 지금 반팔과 긴팔 옷에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익숙지 않아서 생기는 편견일 뿐, 반바지와 긴 바지의 차이 또한 오래지 않아 사라질 것이라는 아이도 있었다.

"교사의 품위 손상을 우려하는 이유는 그들의 교육 행위가 배우는 학생들에게 신뢰를 줄 수 없기 때문 아닌가요? 그렇다면 품위 손상을 판단하는 주체는 당연히 학생들이어야지, 그걸 왜 정부와 학교장이 정하고, 학부모들의 의사를 묻나요?"
"적어도 학교에서라면 에어컨 온도를 낮추는 것보다 차라리 반바지를 입자는 캠페인을 벌이는 게 훨씬 더 교육적이지 않나요? 대체 반바지가 뭐라고 그렇듯 백안시하는 걸까요?"

이러한 아이들의 일리 있는 주장들에 용기를 얻어 엊그제부터 반바지 차림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분주한 아침 느닷없는 옷차림에 아내는 적이 놀라워했지만, 정작 학교에서는 처음 큰 맘 먹고 메신저를 띄웠던 그때처럼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태풍의 눈'을 지나고 있는 듯해 두렵기는 하지만, 며칠 사이 대수롭지 않은 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여서 안심도 된다. 부디 학교에서 반바지를 입는다는 것이 정장이나 격식 있는 옷차림까지는 아니어도 품위를 손상시킨다는 편견 정도는 깰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