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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주시 문평동 오룡리 소충사(나대용 사당) 앞의 거북선 모형
 나주시 문평동 오룡리 소충사(나대용 사당) 앞의 거북선 모형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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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의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았다. (어제 베돛을 가지고 왔던) 순찰사의 군관 남한(南僩)이 살펴보고 갔다. 정오에 동헌으로 옮겨 활 10순을 쏘았다. 관아에 올라갈 때 노둣돌을 보았다.'

1592년 4월 12일자 『난중일기』의 핵심은 거북선을 타고 화포 발사 훈련을 했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많은 이들은 이날 거북선이 완성됐다고 본다. 하루 지난 1592년 4월 13일에는 일본군이 부산 앞바다에 진을 쳤다. 하루 차이에 그토록 역사적 의미가 다른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거북선의 완성도를 최종 확인하고 있는 이순신의 모습이 어쩌면 처연하다. 

 나대용 사당 소충사
 나대용 사당 소충사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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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거북선 화포 훈련 사흘 뒤인 4월 15일에야 전쟁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날 일기에는 '해질 무렵에 영남(경상) 우수사 원균이 "왜선 90여 척이 부산 앞 절영도에 정박했다."라는 공문을 보내왔다. "왜적 350여 척이 이미 부산포 건너편에 도착했다."는 수사(경상 좌수사 박홍)의 공문도 왔다. 영남 관찰사(김수)의 공문도 왔는데 같은 내용'이라고 쓰여 있다.

 나대용 사당 소충사 안에서 볼 수 있는 나대용 영정의 일부(전시된 영정의 상부만 찍은 사진이므로 실물과는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나대용 사당 소충사 안에서 볼 수 있는 나대용 영정의 일부(전시된 영정의 상부만 찍은 사진이므로 실물과는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 소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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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인 4월 16일자 일기에는 '영남 우수사의 공문이 왔는데 "부산의 군영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내용이다. 분하고 원통함을 이길 수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4월 18일 일기에는 '순찰사(전라 감사 이광)의 공문이 왔는데 "발포 권관은 이미 파직되었으니 임시 장수를 정하여 보내라."고 하였다. 그래서 군관 나대용을 보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4월 18일자 일기에 등장하는 나대용은 거북선을 만든 바로 그 나대용이다. 나대용의 생가는 전라남도 나주시 문평면 오룡리 472에 있고, 그를 기려 세워진 사당 소충사는 오룡리 419에 있다. 사당 외삼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는 '나대용 장군상'과 거북선 모형이 건립되어 있다.

난중일기에 등장하는 나대용

4월 12일자 일기를 다시 꼼꼼하게 읽어본다. 이순신은 화살을 10순 쏘았다고 했다. 순은 화살을 쏘는 단위로 다섯 발을 1순이라 한다. 활 10순을 쏘았다는 것은 화살 50대를 날렸다는 뜻이다.

관아는 관청 건물이다. 관아는 수령이 공무를 보는 외아(外衙)와 수령의 가족이 거주하는 내아(內衙)로 구분된다. 외아는 일반적으로 내아의 동쪽에 위치하는 까닭에 동헌(東軒, 동쪽 집)이라 불렀다. 노둣돌은 말을 탈 때 밟고 올라가기 위해 건물 앞에 놓아둔 받침돌을 말한다.

 사당과 동상을 본 뒤 100미터 정도 서쪽으로 가면 오룡리가 나온다. 이 마을 거의 맨 안에 나대용 생가가 있다.
 사당과 동상을 본 뒤 100미터 정도 서쪽으로 가면 오룡리가 나온다. 이 마을 거의 맨 안에 나대용 생가가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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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 지자포, 현자포는 설명이 그리 간단하지 않다. 먼저 지자포와 현자포를 중심으로 조선의 화포를 알아본 다음 나대용 유적을 찾아온 답사자답게 거북선에 대해 공부하기로 한다. (화포에 대해서는 <말과 웃음이 적었던 이순신의 부하 사랑 방식>, 거북선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당시 왜 거북선을 몇 척만 만들었을까> 기사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나대용 유적지에 설치되어 있는 거북선, 너무 작아

나대용 유적지를 방문해 보면 '거북선 한 척을 띄워 놓았으면' 하는 생각이 난다. 지금의 거북선 모형은 너무 작아 실감을 주지 못한다. 장군상과 거북선 모형 둘레 사방을 깊게 파서 물을 담아둔 것은 좋은 착상이지만 충무공 이순신과 나대용 장군의 무대가 넓은 바다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아무래도 성에 차지 않는다.

 소충사 앞에 거북선 모형과 나란히 서 있는 '나대용 장군상'
 소충사 앞에 거북선 모형과 나란히 서 있는 '나대용 장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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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문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의 「나대용 장군 기념 사업 계획 조감도」를 보면 이곳 유적지를 조성한 이들도 그런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조감도는 2015년까지 '방죽골'에 거북선을 띄우겠노라는 구상을 그림으로 밝혀두었다.

나대용 장군상 전면 일원에 큰 연못을 조성하여 방죽골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연못에 거북선을 띄우겠다는 계획이다. 나대용이 거북선 제작 구상을 완료한 곳이 사당 왼쪽, 생가가 있는 오륜리 일대 방죽골이므로 마땅한 명명으로 여겨진다.

조감도는 또 2010년에 '한옥 관광 마을'을 조성하고 2015년에 과학관을 짓겠노라는 계획도 담고 있다. 하지만 '사당 소충사', '나대용 장군상' 및 거북선 조형물만 있는 것으로 보아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듯하다. 안타까운 일이다.

거북선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 전투 현장에서도 장군으로서 큰 활약을 펼쳤던 나대용을 기리는 '기념 사업'이 기대에 조금 못 미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기대에 못 미치는 나대용 유적, 보강 필요

나대용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최초의 승리를 이룩한 이순신이 조정에 올린 보고서 「옥포 파왜병장(玉浦破倭兵狀)」에도 '유군장 발포 가장 나대용이 적선 큰 것 두 척을 격파하였습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장수이다.

뿐만 아니라, 나대용은 거북선이 처음 출전한 사천 전투를 적은 『난중일기』 1592년 5월 29일자에도 등장한다.

 거북선이 처음 출동한 사천 해전의 현장. 사진 오른쪽 아래에 배에서 타고 내리는 계단이 물에 반쯤 잠긴 채 가설되어 있다. 이 계단을 올라 와 도로를 건넌 다음 계속 비탈을 오르면 사천왜성이 나온다.
 거북선이 처음 출동한 사천 해전의 현장. 사진 오른쪽 아래에 배에서 타고 내리는 계단이 물에 반쯤 잠긴 채 가설되어 있다. 이 계단을 올라 와 도로를 건넌 다음 계속 비탈을 오르면 사천왜성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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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들은 이미 뭍으로 올라가 산봉우리에 진을 쳤고, 배는 산봉우리 아래에 줄지어 묶어 놓았는데 대항하는 태세가 빠르고 견고했다. 나(이순신)는 장수들을 독촉하여 한꺼번에 달려들어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통을 바람과 우레같이 난사했다. 적들이 두려워하며 물러났다.

화살에 맞은 적이 몇 명인지 알 수 없지만 적병의 머리는 많이 베었다. 군관 나대용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했지만 중상은 아니었다. 활꾼과 노 젓는 군사들 중에 탄환을 맞은 사람이 많았다. 적선 13척을 태우고 물러났다.' 

나대용 장군상 둘레 작은 물길을 돌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마침 노을이 진다. 여름찰이라 낮이 긴 탓도 있겠지만 오후 7시가 되었는데도 사당 외삼문은 아직 열려 있다. 멀리서 온 참배객을 위해서는 고마운 일이다.

'어서 올라 참배를 드려야지. 내일은 오늘보다 더 많은 '국민'들이 찾아오면 좋으련만…….'

 저물 무렵의 나대용 장군상과 거북선 모형
 저물 무렵의 나대용 장군상과 거북선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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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 <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장편소설 <딸아, 울지 마라><백령도><기적의 배 12척> 등을 썼다. <집> 등 개인 사진전도 10회 이상 열었다.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다. 전교조 활동으로 5년간 해직교사 생활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