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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리성은 류큐왕조의 정궁으로 어느 관광책자도 빼놓지 않는 오키나와 제일의 여행지다. 맥이 끊긴 왕조의 왕궁과 성곽이 대단한 의미로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으나 타임머신 없이 시간여행을 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는 곳이 아닐까 한다.


*슈리성(首里城)


천신만고 끝에 슈리성에 도착했더니 반갑게도 주차장(B2)이 떡하니 보인다. 정문인 슈레이문쪽 주차장(B1)에서 오른쪽 위로 올라가는 간카이문 쪽이다. 기쁜 마음으로 주차장 입구로 핸들을 꺾는데 직원이 막아선다. 밑도 끝도 없다. 입구를 막아서고 차를 빼라는 신호를 보낸다.

 

왜 그러느냐고 제스처로 물어보았지만 묵묵부답 돌아가라고만 한다. 차를 뺐다가 다시 와 봤지만 마찬가지다. 차에서 내려 번역기를 돌렸다면 가타부타 답이라도 얻었을 텐데 그때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거의 한 시간 남짓의 운전지옥에 있다가 주차장을 보고 나니 빨리 차 열쇠를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10초 고민하다가 길 건너 사설 주차장에 500엔을 주고 차를 맡겼다.


슈리성은 2차 대전 때 윤군 제32군의 사령부였고 덕분에 미군 포탄에 깔끔하게 평탄화 작업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것은 복원한 거라고 한다. 어찌나 제대로 복원을 했던지 소노향 우타키 석문의 경우 복원을 했음에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성곽이나 문, 정전 등 사전 정보 없이 둘러보면 쉽게 복원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만큼 예스럽고 고궁의 품격이 배어 있다. 일본인들의 공이 들어가서일 테고 참혹한 역사의 아우라를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이리라.


간카이문, 즈이센문, 로우코쿠문을 통과해 고우후쿠문 앞 광장에서 공연 잠깐 보고 표 사서 정전으로 들어갔다. 이곳만 유일하게 돈을 받는다. 모노레일 정기권이 있으면 할인을 받는다고 한다. 대인 820엔.


시간에 쫓겨 몰랐는데 정전에 들어서느라 신발을 벗자 피로가 종아리를 타고 훅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어서 빨리 이왕이면 홀로 엉덩이를 깔고 앉아 쉬고 싶었다. 정전 내부 구경은 뒷전이 됐다. 우리의 고궁에서는 보기 어려운 색다른 방식의 문양, 배치, 색감 다 좋은데 내가 찾는 건 그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치이지 않고 혼자 사색을 할 수 있을 만한 좁은 공간 그거면 된다.


다행히 내부 정원 근처에서 툇마루를 발견했다. 독립 공간은 아니더라도 한쪽으로 비켜 마루에 걸터앉아 기둥에 몸을 기댔다. 눈 앞에는 궁정 정원을 무대로 박새를 닮을 일본의 새가 먹이를 찾아 종종거렸고 살랑살랑 바람이 바람벽을 타 넘었다.

 

눈이 감긴다. 아침부터 계획이 틀어지지 않게 종종거렸고 그러는 사이 제대로 편히 밥 한 끼 못 먹었다. 먹은 거라곤 탑승 전 먹은 김밥과 비행기 안에서 나눠준 삼각김밥이 전부다. 한참 전부터 배가 고파서 식당으로 직진했어야 했는데 팽팽한 긴장이 허기마저 가로막아섰던 거다. 꼬르륵 그제야 배가 출렁이고 위산이 뿜어져 나온다.


'아, 배고프다.'


사실 난 그때까지 아까 슈리성 주차장에서 거부당한 게 마음에 얹혀 있었다. 왜?라는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외국인이라고 무시당했나? 정보가 부족했나? 현지인 전용인가?'


쓸모 없는 생각이다. 그거 알아서 뭐에 쓰려고? 그렇게 시간 낭비하지 말고 한 번이라도 더 둘러보는 게 100번 옳다.


'뭐 만차였나부지. 그 직원도 외국인 상대하기 귀찮았던 거고.'


뒤늦게 찾아온 배고픔이 나를 일깨웠다. 우리가 지금 당장 서둘러 해야 할 일은 오로지 식당직진 뿐이다.


대고리, 하고리, 옥쇄 구경하고 우에키문으로 나와 경치 구경 좀 하다 소노향 우타키 석문도 보는 둥 마는 둥 지났다. 주린 배가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가더라도 이 이야기는 하고 가자. 감사의 표시다.


슈리성을 돌다보면 연세 지긋한 직원분들이 종종 보인다. 이 분들이 참 친절하시다. 어느 정도냐면 스탬프 10개를 찍어오면 기념품을 받을 수 있다는데 그걸 슈리성 떠나려는 즈음에 알았다. 6개밖에 안 찍혀 있는 스탬프 종이를 들고 안타까워하고 있자니 제복을 입은 고령의 안내원이 오셔서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제스처로 나머지를 받아다주겠노라고 하신다.

 

우리가 어찌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 사이 그분은 우리 스탬프 종이를 들고 벌써 뛰고 계셨다. 석문에서 간카이문 안으로 사라지셨다가 도장을 찍어 다시 뛰어서 나타나신다. 정말이지 이 광경에는 감동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탬프가 뭐라고 그걸 해 주시고 그것도 날도 더운데 뛰다니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레벨의 친절함이라 마냥 아리가토를 말할 밖에. 그런 게 바로 자긍심이자 본인 직업에 대한 투철함이 아닐까 싶다.


*키시쿠(喜作)


일본의 직업정신과 스탬프 기념품을 받아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를 몰아 국제거리로 직진. 미리 조사해두었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식당으로 걸어갔다. 구글맵으로 보고 헤매지 않고 주택가 골목길을 걸어 키시쿠에 도착했다.

 

일본드라마에서 보던 풍경, 류큐전통식을 즐겼다

 


사전정보는 이랬다.


'다이토스시를 전문으로 하는 곳으로 색다른 초밥과 오키나와 특식을 먹을 수 있으며 예약이 필요할 만큼 현지인의 발걸음으로 붐빈다.'


이곳의 색다름이 마음에 들었다. 스시의 재료는 미나미 다이토 섬에서 공수받는데 이곳은 오키나와에서 400Km 떨어져 있단다. 언제 그런 섬에서 나는 생선을 먹어보겠나. 그리고 스시를 만드는 방식 또한 일본 본토에서조차 사라진 옛방식이라고 한다. 이런 스시는 내 인생에 단 한 번 뿐이지 싶었다.


식당에 들어서니 일본 드라마에서 익히 봐왔던 풍경이다. 낮은 칸막이를 두고 요리사와 손님이 마주 앉아 음식과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고 나머지 공간에는 다다미가 깔린 테이블 석이다.


테이블석에 앉았다(테이블 사용비용이 별도로 있다). 사실 메뉴는 여러 번 조사를 했었다. 우리나라 블로그에서는 잘 잡히지 않아 <타베로그>라는 일본 맛집사이트까지 뒤져서 번역기로 메뉴를 분석하고 왔다.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망설였다. 코스요리를 주문할까 말까. 한 번에 여러 맛을 볼 수 있어 좋겠지만 아무래도 1인당 3500엔은 부담스러웠다. 그걸 장모님이 한 번에 정리해주셨다.


"어차피 여행은 돈 쓰러 오는 거야."


현명하십니다.


코스요리는 2가지. 바닷가재 코스와 류큐전통식 코스. 우리는 류큐전통식을 시켰다. 음식이 나올 때마다 직원이 간단한 설명을 해 준다. 직원은 짧은 영어로 말하고 나는 짧은 일어로 대답한다. 그렇게 땅콩두부, 초밥, 회, 찬푸르, 우미부도, 섬락교, 아구조림까지 천천히 맛을 즐겼다.

 


내 입에 가장 맛있었던 건 계란말이 초밥. 부드러우면서 감칠맛이 감도는 말랑말랑함이 내 취향이었다. 우미부도는 전혀 새로운 식감이라 입안에 넣고 톡톡 터트리는 재미가 좋았다. 섬락교도 일식의 밋밋함에 긴장을 주는 연한 매운맛이 입을 즐겁게 했다. 섬락교만 있다면 김치 없이도 얼마든지 밥을 먹을 수 있을 듯하다.


오키나와에서 유명하다는 찬푸르는 신기하기는 했는데 고급스러운 나머지 요리와 결이 맞지 않았다. 따로 밥과 같이 먹었다면 어울렸겠지만 초밥과는 어긋나는 부조화가 아쉬웠다. 찬푸르보다는 다른 야채로 코스를 바꿔보면 어떨까 싶은 바람이 있다.

 


그리고 회는 색다르기는 하지만 내 입맛에는 맞지 않았다. 너무 무르다. 생선살의 탱탱함이라고는 전혀 없이 흐물흐물한 식감이 별로다. 물론 이게 또 오키나와 특미이겠으나 일부러 적응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또 하나 아쉬운 건 운전을 해야 해서 오리온 맥주를 앞에 두고 한 모금 넘겨보지 못했다는 거다. 두고두고 아쉽지만 어쩌겠나, 안전제일.


그렇게 한 시간 가량 느긋하게 먹고나니 배가 불러 꼼짝도 하기 싫고 마냥 주워서 잠들었으면 싶었지만 우리에게는 아직도 할 게 있었고 나하의 밤거리 국제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겁게 몸을 일으켜 남은 음식은 포장하고 아직도 자고 있는 아이를 들쳐업고 식당을 나섰다.


식당문을 나서면서 나는 또 일본의 친절함에 놀랐다. 좇아 나와 인사를 하는 건 으레 그러려니 했는데 직원의 손에 비닐 봉투가 들려있다. 잠든 아이의 신발을 못 신긴 걸 보고는 신발 담으라고 챙겨주는 거다. 아, 정말이지 일본이란 나라 왜 이렇게 친절한 거냐. 상인의 한 사람으로서 많이 배운다.


*나하의 밤거리


유명관광지의 번화가가 보여주는 밤 풍경치고 나하의 밤은 한산했다. 시각은 9시가 넘어가고 있었는데 웃통을 벗어젖힌 무리들이 침을 뱉으며 배회한다거나 폭주족 오토바이가 불꽃을 튀기며 골목길을 질주하는 일 따위는 없었다. 평온했다. 메인 거리를 벗어나면 '단보'라는 라멘집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것 말고는 행인마저 드물었다.


메인거리로 들어서자 사정은 좀 달랐다. 더 밝고 더 북적였다. 특히 일종의 면세점인 돈키호테 주변은 사람들을 빨아들이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이번 여행 최대의 정신없는 1시간을 보냈으나 자세한 이야기는 넘어가자. 다만, 이곳을 이용하겠거든 2가지만 기억해두시라. 일정 금액 이상 구매했을 때만 면세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모닝 자동차에 10명쯤 들어가서 움직이는 정도의 비좁음으로 사람 혼을 빼 놓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꽤나 고생하게 될 것이다.


돈키혼테에 시간을 뺏기고 부랴부랴 주차장에 거금 1만 원을 내고 차를 빼서 호텔로 돌아왔다.

 


정작 호텔에 도착해서 번거로운 일들이 몇 가지 있었다. 데스크 직원과 영어로 대화를 했는데 내 짧은 영어로도 충분히 의사소통은 가능했다. 하룻밤 자는 데 무슨 대단한 단어가 필요하겠는가. 사실 숫자만 알아듣고 오케이 몇 번 하면 끝이 나는 일이다. 문제는 주차였다.


1. 선불을 받는다. 1000엔이다. 처음에 호텔 직원이 캐쉬 불라불라 하기에 보증금을 받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몇 번 더 물어보니 주차비였다. 알고는 왔으나 닥치고 보니 또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내가 내 집에다 차를 주차하는데 주차비를 내야 하는 상황이다. 내가 왜? 아무리 땅값이 비싸기로 이건 너무 하는 거 아냐? 싶었지만 순순히 돈을 냈다.


2. 주차를 하려고 건물 뒤편으로 차를 몰았다. 직원이 나와 있었다. 그의 도움을 받아 주차를 하는데 아후 이건 바늘귀에 동아줄 넣기다. 들어가는 입구도 협소할 뿐 아니라 주차장 앞에 렌터카 업체 차들이 주차되어 있어 차를 움직일 공간이 빠듯했다. 아직 차량의 길이에 대한 감을 잡지 못한 상태인지라 긁지 않고 주차하는 데 10번쯤 전진과 후진을 반복해야 했다. 한 뼘만 더 여유를 두면 좋겠으나 그건 내 바람일 뿐. 이래서 차는 무조건 작은 차가 답이다.


이래저래 땀을 한 말을 쏟고 났더니 샤워가 간절했다. 자꾸만 아무데서나 주저 앉으려는 몸을 질질 끌어 숙소 샤워장에 던져 넣고 뜨거운 물을 쏟아부었다. 한참을 물을 맞고 머리를 감고 나니 정신이 돌아왔고 허기도 돌아왔다.


야식 전화번호부는 보이지 않았다. 배달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탓이고 편의점에서 한 상 차릴 만큼의 음식들이 있는 까닭일 것이다. 머큐어 호텔 앞에도 제법 넓은 편의점이 있어서 총총 뛰어가 소박하게 털고 왔다. 생각보다 색다른 편의점 음식이 없어 오니기리와 라면, 주스로 만족했다. 아, 시원한 맥주를 빠트리지는 않았다. 벌컥벌컥 들이킨 오리온 맥주에 지친 몸이 새롭게 태어난 듯했으나 시각이 늦어 아쉬운 잠을 청해야 했다.


참고로 내가 주차하려던 슈리성 주차장은 B2인데 거기는 버스 정류장이라고 한다. 일반차량은 정문 쪽 주차장을 이용하는 게 좋겠다. 상황에 따라 융통성은 있는 모양인데 외국여행에서 융통성을 믿고 움직이기는 위험부담이 크다. 


다음 여행지는 츄라우미 수족관이다.

덧붙이는 글 | 아날로그캠핑에도 게재했습니다. 


태그:#오키나와 , #슈리성, #키시쿠, #머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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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기업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려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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