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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고래'하면 동해나 울산, 장생포만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홍어로 유명한 전남 신안군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있습니다. 흑산도와 고래는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을까요? 왜 흑산도에 고래공원이 생긴 것일까요? 대체 흑산도에선 고래와 관련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이 연재는 흑산도와 고래의 연관성을 좇는 '해양문화 탐사기'입니다. - 기자 말

☞[고래의 섬 흑산도④] 흑산바다에 '크기를 알 수 없는' 고래가 살았다

 신미양요 때 미군 병사의 모습. 19세기 중엽부터 한반도 근해에는 제국주의 배들의 침탈이 잦았다. 특히 이들은 한반도 연근해에서 불법으로 고래를 무차별 포획했다.
 신미양요 때 미군 병사의 모습. 19세기 중엽부터 한반도 근해에는 제국주의 배들의 침탈이 잦았다. 특히 이들은 한반도 연근해에서 불법으로 고래를 무차별 포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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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섬은 우리나라의 그윽한 수풀"이라 했다. 다산의 비유대로 섬이 수풀이면 바다는 '그윽한 수풀'을 품고 키우는 풍요로운 대지다. 풍요로운 바다는 대한민국 육지영토의 세 배나 되는 해양영토를 제공한다. 풍요로운 바다는 또 다양하고 풍성한 해양 생태자원과 광물자원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그래서일까, 제국주의 침략은 바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바다를 통해 쳐들어왔고, 바다를 유린하면서 수탈을 시작하였다. 프랑스가 강화도로 쳐들어 온 1866년의 '병인양요'와 미국이 강화도로 쳐들어 온 1871년의 '신미양요'보다 20여 년 전인 1848년, 이미 한반도 근해는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있었다. 1848년 12월 29일(음력) 자 <헌종실록>은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해 여름·가을 이래로 이양선(異樣船)이 경상·전라·황해·강원·함경 다섯 도의 대양(大洋) 가운데에 출몰하는데, 혹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 없었다. 혹 뭍에 내려 물을 긷기도 하고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거의 그 수를 셀 수 없이 많았다."

제국주의의 배들이 한반도 근해에 진을 치고 해패(駭悖)를 부리던 19세기 중반. 그들은 조선 당국의 허가도 받지 않고 불법으로 '셀 수 없이 많은' 고래를 잡는 일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들은 단지 고래를 양식용으로만 잡았던 것일까.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반도 근해에서 불법 포경을 자행한 까닭은 고래가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1850년대 미국 포경업은 호황기를 맞았다. 급속한 산업화로 산업용 고래기름과 가로등 조명을 위한 고래기름의 수요가 급증해 가격이 대폭 상승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포경선이 잡은 큰 북극고래 한 마리에서는 약 275배럴의 기름과 3500파운드의 고래뼈를 얻을 수 있었는데 그 가치는 5000달러나 되었다. 이런 식으로 계상되어진 당시 향유고래 한 마리의 가치는 약 3000달러였고, 130배럴의 기름과 1000∼1500 파운드의 뼈를 얻을 수 있었던 참고래의 가치도 약 3000달러였다.

한반도 근해에서 불법 포경을 처음 시작한 나라가 러시아인지 미국인지는 연구자들 간의 의견이 엇갈린다. 하지만 연구자들은 19세기 중반 무렵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반도 근해에서 불법 포경을 시작했다고 대체로 의견 일치를 보고 있다.

김백영 박사는 '한말~일제하 동해의 포경업과 한반도 포경기지 변천사'라는 논문에서 "19세기 중반 경 미국과 프랑스, 독일과 러시아가 한반도 근해에서 불법 포경을 하며 긴수염고래, 귀신고래 등에 무차별적인 섬멸을 자행하였다"라고 지적했다.

한국수산업사와 관련 큰 연구업적을 남긴 박구병 교수는 "제국주의 열강 중 제일 먼저 한반도 근해에서 불법 포경을 한 나라는 러시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대략 1830년대부터 러시아가 동해에서 고래잡이를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아울러 미국 포경선이 동해에 진출한 때는 1848년 4월로 추정하고 있다.

 고종은 1883년 김옥균(사진 맨오른쪽)에게 '동남제도 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라는 직위를 주고 포경(捕鯨) 등의 일을 겸하게 하여업무를 겸하게 하였다.
 고종은 1883년 김옥균(사진 맨오른쪽)에게 '동남제도 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라는 직위를 주고 포경(捕鯨) 등의 일을 겸하게 하여업무를 겸하게 하였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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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러시아와 일본이 한반도 연근해에서 츙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 갈등의 중심에 '돈이 되는 고래'가 있었다. 이렇듯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반도 근해에서 '돈이 되는 고래잡이' 각축을 벌이자 조선 국왕 고종도 뒤늦게 고래의 가치를 알게 된다. 1883년 음력 3월 16일 고종은 김옥균에게 전교를 내린다.

"참의교섭통상사무 김옥균을 동남제도 개척사(東南諸島開拓使)로 삼아서 포경(捕鯨) 등의 일을 겸하게 하여 하직하지 말고 편리한 대로 왕래하게 하라."

고종의 전교를 기록한 <승정원일기>는 이날 날씨가 맑았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정세는 결코 맑지 않았다. 고종이 자신의 측근인 김옥균을 섬을 살피고 고래잡이 관련 업무를 관장하는 개척사로 임명했지만 쇠락해가는 조선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근대 포경 기술을 습득한 제국주의 국가와 달리 당시 조선은 고래잡이와 관련한 기술과 경험이 아예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조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포경 특허권을 다른 나라에 내주고 어업세를 거둬들이는 것뿐이었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1883년 7월 25일 조선과 일본이 조인한 '조일통상장정(在朝鮮國日本人民通商章程)'과 1889년 11월 12일 체결한 '조선일본양국통어장정(朝鮮日本兩國通漁章程)'이다.

통어장정을 주목하는 까닭은 한반도 연근해에서의 포경에 대한 특허권을 처음으로 명문화했기 때문이다. 전문 12조로 구성된 통어장정엔 "특별 허가를 받지 않고서는 양국의 해변 3리 이내에서 암수 고래(鯨鯢)를 잡을 수 없다"고 못 박고 있다.

또한 통어장정 2조에는 "어업 허가증을 수령한 자는 다음의 계산법에 따라 금액을 납부하여 어업세로 충당한다"라고 명시했다. 포경에 대한 노하우가 전혀 없는 조선 정부가 직접 포경보다는 포경 특허권을 내어주고 대신 어업세를 받음으로써 로 이득을 취하고자 했음을 엿볼 수 있다. 

  1876년 이래 조선이 각국과 맺은 조약 등을 모아 1898년 외부에서 간행한 약장합편(約章合編). 일본과 맺은 통어장정 내용도 수록돼 있다.
 1876년 이래 조선이 각국과 맺은 조약 등을 모아 1898년 외부에서 간행한 약장합편(約章合編). 일본과 맺은 통어장정 내용도 수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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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불법 포경을 하고 있던 러시아도 1899년에 한반도 연근해에서의 포경을 허가받는다. 1899년 3월 29일 <고종실록>은 "러시아인 헨리 게제린그에게 경상도 울산포, 강원도 장진포, 함경도 진포도를 고래잡이 근거지로 허락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약 1년 후인 1900년 2월, 조선 정부는 '일본원양어업회사'에게 특별포경허가를 내준다.

이로써 한반도 연근해는 러시아와 일본의 '고래 전쟁터'가 되었다. 이들의 고래 전쟁은 곧 조선 침탈 전쟁이었음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한반도 근해 포경업에 뒤늦게 진출했지만 일본의 포경 실적은 1902년부터는 러시아와 쌍벽을 이룰 만큼 무서웠다.

그리고 1904년부터 1905년까지 벌어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 근해에서 절대적인 포경 독점권을 행사한다. 일본제국주의는 조선(대한제국)을 침탈하듯 거침없이 한반도 연근해에서 고래를 학살하기 시작한다. 조선의 바다는 일본제국주의가 학살한 무수한 고래의 피로 검붉게 신음하기 시작했다.

# 다음 기사 '일제는 한반도 고래의 씨를 말렸다' 곧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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