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택시운전사> 개봉을 앞두고, 5.18을 배경으로 한 다른 영화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편집자말]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그 벤치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인환, '세월이 가면' 중에서

지울 수 없는 건 사랑만이 아니다. 모든 강렬한 것은 남는다. 세월이 흐르면 잎은 떨어져 흙이 되지만, 사람의 일은 단순하지 않아서 아무리 지우려 애써도 과거의 그 자국만은 가슴에 남는다. 자국은 과거에 머물지 않는다. 어떤 자국은 선명히 살아서 한 사람의 현재와 미래를 지배하기도 한다. 더욱이 그 자국이 죽음의 공포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이는 평생의 상흔이 되어 남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피해자들에게 있어 '80년 광주'는 아직도 현재다. 영화 <꽃잎>과 <슈퍼맨이었던 사나이>는 1980년 광주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던 이들이 어떻게 슬픔을 안은 채 살아가는지를 그린다.

두 영화 속 인물은 광주에서 가족을 잃었다. 둘은 비슷한 상처를 공유하지만, 이를 다루는 방법에 있어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죄책감, <꽃잎>

 영화 <꽃잎>(1996)의 한 장면. 꽃을 들고 엄마의 무덤을 찾은 소녀.

영화 <꽃잎>(1996)의 한 장면. 꽃을 들고 엄마의 무덤을 찾은 소녀. ⓒ 대우시네마


"꽃잎 보면 생각하네 / 왜 그렇게 헤어졌나 / 꽃잎이 지고 또 질 때면 / 그날이 또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 영화 <꽃잎> OST, '꽃잎' 중에서

극 중 소녀(이정현 역)는 1980년 광주에서 엄마를 잃었다. 소녀의 엄마는 계엄군이 쏜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날 소녀는 죽어가는 엄마가 내미는 손을 뿌리친 채 달아났다. 살기 위해서였다.

이는 평생 소녀를 옥죄는 상처로 남는다. 소녀가 엄마를 죽게 한 것도, 소녀가 엄마 곁에 남았다고 해서 엄마가 살 수 있었던 것도 아니건만, 소녀는 그 날 엄마를 두고 도망친 기억이 강한 죄책감으로 남아 자신을 괴롭힌다.

결국, 소녀는 죄책감을 견디다 못해 실성하고 만다. 실성을 한 채 보따리 하나만 들고서 떠돌아다닌다. 실성해 방황하는 소녀에게 동네 남자아이는 돌을 던진다. 남자 어른은 소녀를 강간한다. 남성에게 짓밟히는 연약한 소녀. 고루한 플롯이지만, 이는 극보다 더한 소녀의 현실이었다.

강간을 당하고도 그녀는 미친 듯이 웃는다. 피가 나도록 칼날로 자신의 몸을 찌르고 긋기도 한다. 때로는 악몽을 꾼다. 무서운 괴물에 쫓기는 꿈, 그날 엄마를 놓고 온 기억, 총탄에 맞고 쓰리지는 사람들, 널브러진 시체를 주워 담듯 트럭에 싣는 군인들. 그날의 기억은 이렇듯 여전히 생생하다. 그 날은 깨어서는 자해가 되고, 누워서는 악몽이 되어 소녀를 옥죄는 것이다.

그런데 소녀는 방랑 중에도 줄곧 보따리를 놓지 않는다. 몸도 마음도 내던져 모든 걸 포기해버린 소녀에게, 담긴 거라고는 빨간 옷과 구두가 전부인 보따리는, 그날을 잊고자 몸부림치는 소녀가 그런데도 잊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자 그날의 죄책감일 것이다.

부채감,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영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의 한 장면. 굴삭기를 보고, 1980년 광주의 탱크의 기억이 떠오른 '슈퍼맨'이 굴삭기와 대치 중이다.

영화 <슈퍼맨이었던 사나이>(2008)의 한 장면. 굴삭기를 보고, 1980년 광주의 탱크의 기억이 떠오른 '슈퍼맨'이 굴삭기와 대치 중이다. ⓒ CJ 엔터테인먼트


"과거는 바꿀 수 없지. 하지만 미래는 아니야." -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대사 중에서

자칭 슈퍼맨인 남자(황정민 역)는 과도한 사회적 책무감을 안고 살아간다. 자신이 지구를 구하는 슈퍼맨이라 생각한 채 모든 일에 사사건건 참견하지만, 현실은 평범하다 못해 바보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병원 검사 결과, 놀랍게도 그의 머리에는 총탄이 박혀있었다. 바로, 1980년 광주에서의 탄흔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도청을 사수한 시민군이었으며, 도청에 나간 아버지를 찾기 위해 집을 나갔던 어린 남자는 자신도 그만 계엄군이 쏜 총을 맞았다.

아버지는 도청에서 죽고, 그는 머릿속에 총탄이 박히지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다. 아버지는 죽고 아들은 살았다. 그 현실이, 그의 몸속 깊이 박힌 총탄이 그날의 상처이자 아버지를 보낸 부채감이 되어 남자를 괴롭힌다.

슈퍼맨을 꿈꿨던 남자가 "과거는 바꿀 수 없지, 하지만 미래는 아니야"라는 말을 남기고 어떤 아이를 구하기 위해 불길로 뛰어드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아이는 구하지만 남자는 결국 죽는다. 남은 육신마저 기증한 그는, 마지막까지도 완벽한 슈퍼맨의 모습이었다.

그의 말대로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그의 아버지는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렸다. 현재의 그가 아버지를 만날 방법은, 자신이 아버지의 삶을 잇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슈퍼맨이 된다. 어린 그에게 아버지를 비롯한 그 날 광주의 시민들은 세상을 구한 '슈퍼맨'이었기 때문이다.

몸을 던져서라도 '슈퍼맨'이 되는 것, 그것이 그에게는 오월의 계승이자, 부채감을 더는 길이었다. 그의 머릿속 남은 총알은 옛 상처, 그 이상의 부채감이었다.

보따리와 총알

사실 둘은 가족을 잃은 유가족이기 이전에, 스스로 피해자였다. 그러나 둘은 피해자로서 자신의 상처를 온전히 보듬기도 전에, 가족을 잃은 아픔을 떠안아야 했다. 잘못도, 미안할 일도 아니지만, 그들은 가족을 떠나보낸 것에 책임을 느꼈다. 이는 죄책감이 되고 부채감이 됐다.

이처럼 사는 게 미안해야 했던 그들. 먼저 떠난 자가 남긴 죄책감과 부채감. 그 속에서 피해자들은 다시금 죽어간다. 여기서 비극은 또다시 시작된다. 이는 80년 광주뿐만이 아니다.

'광주'는 광주에만 있지 않다. '광주'는 팽목항에도 있고, 소녀상에도 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장례식과 매일 다섯 명씩 죽어가는 산재의 현장에도 있다. 성폭행을 당하고도 따가운 시선을 받는 피해 여성에게도 있다.

더 이상 살아남은 자에게 짐을 맡기지 말자. 곁에 있는 우리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 이제는 그 짐을 져야 할 때다.

영화 꽃잎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광주민주화운동 택시운전사 5.18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