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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기사 : [대학에서 겪은 일들①] 학교식당 잠입취업 체험기<上>에서 이어집니다.

노동조합을 세우기 위해서는 몇가지 조건이 필요한데, 노동자들의 불만이 명확해야 한다. 또한 노동조합이 자신의 불만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노동자들의 신뢰가 필요하고, 평소 동료들이 신뢰하며 몸소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노동자들 중에 있어야한다 . 그리고 노동조합을 만들자고 제안하는 활동가에 대한 노동자들의 신뢰가 있어야 한다.

식수(식사하는 학생수)가 감소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근무시간이 줄거나 식사시간에 따라 유동적으로 고용을 하다보니 고용은 불안했고 한달 월급이 100만 원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현장에 필요한 적정인원보다 적은 수의 인원이 고용되어 있었다. (자료사진)
 식수(식사하는 학생수)가 감소했다는 이유로 갑자기 근무시간이 줄거나 식사시간에 따라 유동적으로 고용을 하다보니 고용은 불안했고 한달 월급이 100만 원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현장에 필요한 적정인원보다 적은 수의 인원이 고용되어 있었다. (자료사진)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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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로는 조리사분들의 불만이 무엇인지를 찬찬히 정리해보았다. 표면적으로는 매니저에 대한 불만이 제일 컸지만, 고용불안에 대한 불만이 제일 중요하다고 느꼈다. 학생식당의 경우 아침·점심·저녁 식사 때의 학생 수가 다르고, 학기 중과 방학 중의 학생 수가 크게 차이 났다. 그러다 보니 조리사들을 유동적으로 고용한다. 가령, 학기 중 점심에는 15명 정도가 근무하지만, 방학 중 저녁에는 아주 소수만 근무한다.

업체 입장에서는 학생들의 식사수에 따라 유동적 고용을 하는게 타당할 수는 있지만, 노동자입장에서는 이것이 굉장한 불안요소로 다가오게 된다. 가령 풀타임으로 일하다가도 업체에서 근무 태도 등을 이유로 갑자기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하는 경우도 있고, 전체 학생 식사 수가 줄게 되면 갑자기 전체 인원의 근무시간을 줄이고는 했다. 특히 방학으로 넘어가는 시기에는 다들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들었다.

그리고 내가 느끼기에 적절한 고용인원보다 적은 고용인원이 일하고 있었다. 가령 식기 세척 업무의 경우 최소 두 명이 배정되어야 하는데 식당 보조는 한 명만 고용되다 보니 조리사가 본 업무 외의 업무를 추가로 하고 있었다. 심지어 주방장의 경우에는 내가 식당을 그만둔 뒤 몇 개월 후 요리를 제대로 못 한다고 정규직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식당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황당한 이유로 해고당하고 말았다

고용이 이렇다 보니 오래 일한 몇 명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근무기간이 짧았고 그렇다 보니 서로 잘 모르는 경향이 있었다. 식당을 그만두고 시간이 좀 흐른뒤 학생식당에 가서 일하시는 분들의 얼굴을 찬찬히 보니 두 분 빼고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학교 식당이 외주업체로 바꾸기 이전부터 다니신 경우에는 정규직 시절을 경험해보신 분들이 계셨고, 그 분들의 경우 비정규직화되면서 생긴 문제들에 대해서 굉장히 정확히 느끼고 계셨다.

임금의 경우에는 청소·식당 일처럼 50~60대 여성노동자들이 택할 수 있는 일자리 대부분이 최저임금이기에 불만이 표면화되지는 않은 듯했다.

최규석 작가의 <송곳> 중 한 장면. 80~90년대에 위장취업자들을 위한 글 등에서 가장 강조한 것 중 하나는 일하는 곳에서의 태도였다.
 최규석 작가의 <송곳> 중 한 장면. 80~90년대에 위장취업자들을 위한 글 등에서 가장 강조한 것 중 하나는 일하는 곳에서의 태도였다.
ⓒ 최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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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로는 일하시는 분들 중에 누구와 먼저 이런 이야기를 해볼 것인가를 생각해봤다. 위에서 열거한 문제들에 공감하며 다른 동료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계신 분이 필요했다. 그런 분으로는 바로 떠오르는 한 분이 계셨다. 실제로 나이가 제일 많으신지는 모르겠지만 평소에 일하시는 분들 사이에서 맏언니 같은 역할을 하고 계시고 일도 오래 하셨으며 현재 식당의 문제에 대해서 비교적 정확히 파악하고 계신 것 같았다. 게다가 당시 청소·경비노동조합에서는 학교와의 임금교섭과 손해배상 철회 투쟁 때문에 학내에서 이런 문제들을 알리는 피켓들을 세워두고 있었는데 이 분이 이 피켓들을 관심 있게 보고 지나가는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세번째로는 계획을 생각해봤다. 당시 나는 이제 겨우 한 달을 일한 막내였고, 일하시는 분들하고도 그렇게 깊은 관계라고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두세 달 정도 후인 방학이 되기 전, 노동조합을 세워보는 것을 목표로 좀 더 성실히 일하면서 일하시는 분들하고 친하게 지내기로 했다. 그러면서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하고는 조금씩 관련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한달간 일하면서 일하시는 분들로부터 안 좋게 보였을 만한 태도 같은 게 무엇이 있었을지를 검토한 다음에 개선책들을 적어나갔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문제가 생겼다. 잔반을 버린 후 담배를 피우다가 학교 사무처 교직원들하고 마주친 것이다. 잔반처리 하는 곳 뒤편이 공식적인 흡연구역이라서 담배 피우러 오는 교직원들을 조심해야 한다고 평소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순간 방심한 것이다.

나는 2011년 49일 점거 농성 당시부터 학교 청소경비노동자들 투쟁에 빠지지 않고 함께 했기에 사무처 교직원들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나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교직원들이 식당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나를 발견해버린 것이다. 마주친 순간에는 서로 모르는 척을 했지만 표정을 봤을 때 알아본 게 분명했다.

정말 지각을 사유로 일하지 않게 하려면 강경히 일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맞을텐데 굉장히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정황상 내가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학교가 알게되면서 비교적 유연한 방식으로 해고시키려는 것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정말 지각을 사유로 일하지 않게 하려면 강경히 일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맞을텐데 굉장히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정황상 내가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학교가 알게되면서 비교적 유연한 방식으로 해고시키려는 것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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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아무일 없이 넘어갔지만 다음날에 문제는 현실이 되었다. 출근을 했는데 업체에서 좋게 타이르며 나보고 앞으로 나오지 말라고 한 것이다. 사유는 지각인데, 그동안 지각을 아예 안 하지는 않았지만 횟수가 적다 보니 그동안 지각으로 지적받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갑자기 지각을 사유로 일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정말 지각을 사유로 일하지 않게 하려면 강경히 일하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는 게 맞을텐데 굉장히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정황상 내가 식당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학교가 알게되면서 비교적 유연한 방식으로 해고시키려는 것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조금 생각해보겠다'고 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고, 하루 동안 고민해보면서 노동조합에서 활동 중인 분들에게도 문의를 하였다. 결국 선택지는 여기서 그만두느냐와 해고투쟁을 하느냐 둘로 나뉘게 되었다.

'노동조합' 건설의 계획은 끝났지만, 당시 기억을 거울삼아...

나는 결국 그만두는 쪽을 선택하였다. 그 이유는 나는 당시 제적된 상태였기에 불안요소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제적이 된 사유는 제 때 휴학을 하지 않아서인데, 다른 학생들의 유사 사례나 당시 상황을 봤을 때 좀 늦더라도 휴학을 처리해줄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때 이미 나는 학교로부터 블랙리스트에 올라있던 상황이라 그런 이유로 안 해준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제적이 되고 나서 다시 재입학을 하여 학교로 돌아가야 했기에 학내에서 나의 해고를 가지고 투쟁을 하는 것은 부담이 너무 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많이 분하지만, 다음날 일을 그만두겠다고 한 뒤 일하시는 분들에게 일일이 인사를 드리고 나오게 되었다.그곳에서 일하던 분들은 내가 한 달 정도 일한 알바생 정도로 기억하겠지만, 나는 그분들과 같은 목표를 향해 싸우는 동지가 되지 못한 게 너무나도 아쉬웠다. '노동조합 건설 스토리'와 같이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영화는 결국 허무하게 중간에 제작이 중단되고 말았다.

지금 이 순간도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여러 현장에서 여러 사람의 헌신이 있겠지만, 사측의 직간접적인 방해, 노동자들끼리 단결되지 못함 등 때문에 성공적으로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결국 시간이 흘러 그 해 2학기에 재입학을 할 수 있었고, 나로서는 노동조합 건설과 뒤바꾼 재입학이기에 최선을 다해 학생운동들을 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예전부터 하고 싶던 미술대학 학생회장까지 하게 되었다.

황경순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경남지부장이 '총파업'을 앞두고 삭발한 가운데, 민주노총 경남본부이 지난 6월 24일 오후 더불어민주당 경남도당 앞에서 연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 철폐, 노조할 권리, 약자들의 직접행동 2017 경남지역 비정규노동자 결의대회"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황경순 전국학교비정규직노동조합 경남지부장이 '총파업'을 앞두고 삭발한 가운데, 민주노총 경남본부이 지난 6월 24일 오후 더불어민주당 경남도당 앞에서 연 "최저임금 1만원, 비정규직 철폐, 노조할 권리, 약자들의 직접행동 2017 경남지역 비정규노동자 결의대회"에 참석해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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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홍대를 비롯한 여러 대학의 청소경비 노동자들이 임금을 가지고 파업과 교섭을 진행 중이며, 전국의 여러 학교 비정규직 급식노동자들도 파업을 벌이고 있다. 최저임금이 내년 대폭 인상되는 기쁜 소식이 있어도 현장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위해 지금도 싸우고 있다.

경력단절이 진행된 후 50~60대에 재취업하고자 하는 여성들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은 대부분 청소·식당·보육으로 좁혀지게 되며 이 직업들은 대부분 최저임금이다. 그만큼 최저임금 인상은 20대 알바노동자뿐만 아니라 50~60대 여성 노동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며, 청소·식당·보육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은 남여임금 격차 해소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홍대 청소경비노동자들의 투쟁에 열심히 연대해왔으며 식당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나는 비록 지금 졸업을 하면서 학생운동을 그만뒀고 현재는 군 입대를 앞두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어떤 형태로든 사회운동을 할 생각이다.앞으로 사회운동을 하지 않은 것이라면 2012년의 기억을 추억 정도로 기억하겠지만,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사회운동을 해나갈 것이기에 2012년의 기억을 거울삼아 살아가려고 한다.


태그:#파업, #급식노동자, #이언주, #미대의외침, #홍대청소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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