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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주 국민의당 의원이 지난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 참석, 학교급식 노동자에 “밥하는 동네 아줌마” 발언에 대해 “기자에 전하는 과정에서 오간 사적 대화가 몰래 녹음돼 기사화 된 부분에 강한 유감을 표하지만, 경위가 어찌 됐든 부적절한 표현으로 상처 받은 분들이 계시다면 사적 통화라 하더라도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 '밥하는 동네 아줌마' 발언 사과한 이언주 이언주 국민의당 의원이 지난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 참석, 학교급식 노동자에 “밥하는 동네 아줌마” 발언에 대해 “기자에 전하는 과정에서 오간 사적 대화가 몰래 녹음돼 기사화 된 부분에 강한 유감을 표하지만, 경위가 어찌 됐든 부적절한 표현으로 상처 받은 분들이 계시다면 사적 통화라 하더라도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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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국민의당 이언주 의원의 학교 급식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막말' 발언이 알려졌다. 그러면서 나 역시 크게 분노하다 한동안 잊고 있던 일이 떠올랐다.

올해 대학을 졸업했고, 시간이 많이 지나서 이제는 공개적으로 이야기를 꺼내도 미칠 영향이 거의 없어졌기에 꺼내는 이야기이다. 공장으로 들어가서 헌신적으로 노조 활동을 하는 존경스러운 분들에 비하면 나 역시 그런 경험이 있다고 말하기에는 굉장히 쑥스럽지만, 대학 시절에 대학 학생식당으로 일종의 '잠입 취업'을 한 일이 있었다.

결국에는 취업 사실을 학교가 알게 되어 목표한 바를 달성하지 못하고 현장을 나왔지만 노동과 노동조합 운동의 엄혹함을 크게 깨달은 귀중한 경험이었다. 때는 지난 2012년 초, 나는 당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다니다 학교와의 사정으로 제적 중에 있었고 대학 생활 대부분을 미술대학 학생회 운영을 통한 학생들의 권리 운동과 홍대 청소·경비노동자들과의 연대활동으로 보냈다. 특히 2012년은 홍대 청소·경비노동자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가장 많았던 때이다.

새해 첫날 홍익대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홍익대 청소·경비·시설 노동자들이 당시 점거농성을 44일째 벌이고 있는 가운데, 지난 2011년 2월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앞에서 열린 '홍대 분회 집단 해고 철회와 1만인 선언 결의 대회'에서 해고 노동자들과 지지자들이 해고 철회와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새해 첫날 홍익대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홍익대 청소·경비·시설 노동자들이 당시 점거농성을 44일째 벌이고 있는 가운데, 지난 2011년 2월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앞에서 열린 '홍대 분회 집단 해고 철회와 1만인 선언 결의 대회'에서 해고 노동자들과 지지자들이 해고 철회와 처우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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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이전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홍대 청소·경비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보고자 2010년 12월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하지만,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요구한 임금과 관련된 요구안을 학교가 받아들이지 않다가 2011년 1월 3일 홍대 청소경비노동자들을 전원해고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통해 전국적으로 크게 이슈가 된 홍대 청소경비노동자들의 49일간의 점거 농성이 시작되게 된다.

당시 49일 점거 농성은, 학생·시민·타 노조들의 연대와 홍대 청소·경비노동자들의 타협 없는 투쟁으로, 결국 임금이 인상된 상태에서의 전원 고용 승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2011년 6월 학교가 2억8천만 원짜리 손해배상을 홍대 청소·경비노동조합에 청구해서 법정 안팎으로 싸우고 있었고, 여기에 더해 어용노조가 생기면서 노조를 운영하기 굉장히 힘든 상황이었다.

나의 상황은 2011년 49일간 점거 농성에 함께하며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당시 일상의 대부분을 홍대 청소·경비노동자들과 연대활동을 하며 2012년 2학기 때 재입학하여 학생운동을 성장시키기 위한 계획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할 일을 하다가 노조 사무실에서 잠을 자는 일도 많았다.

그러던 중 생활비 때문에 '알바몬' 구인 사이트에서 일자리를 찾다가 눈에 '딱!'하고 들어오는 게 있었다.

**(급구)홍익대학교 학생식당 주방일 보조**

식당일이 힘들다는건 익히 알고 있는 데다가 최저임금이고 출근도 아침 7시다 보니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노동현장에 들어가서 노조를 만드는 전설적인 이야기들이 순간 갑자기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 나도 심상정처럼 될 수 있는 건가!'

'첩보영화'처럼, 노동조합 만들 생각으로 취업했다

당시 내가 학생식당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학교가 알게 되면 상황이 힘들어지겠지만, 안 그래도 당시 홍대 청소경비노동조합에서는 홍대 비정규직 운동을 확산하고 홍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더 나은 노동환경을 위해서 홍대 내 다른 직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던 상황이었다. 또 홍대 청소경비노동조합이 생기는 초기 과정에서 홍대생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나 역시 해볼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홍대생인 걸 속이고서 두세 달 정도 열심히 일하고, 일하시는 분들과 문제의식을 공유할 수 있다면, 노동조합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홍대 청소·경비노동조합과 노조 활동가들에게 상황을 상의한 뒤, 알바몬에 올라간 구인공고란으로 연락해서 면접을 보게 되었다. 보통 알바 면접은 열심히 일할 것을 어필하면 되지만, 이 경우 본 목적을 속이고서 면접을 봐야 하는 것이다 보니 마치 '첩보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실제로 1985년 대우자동차 파업 전까지는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취업하는 자들을 '목적을 달리하는 취업자'라 불렀다 한다. 그런데 용역업체에서 면접을 보는 시점부터 학교식당이 얼마나 험지일지 예상되기 시작했다. 식당 자체가 학교로부터 위탁을 받는 하청업체인데, 심지어 그 식당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 업체가 용역을 맡긴 파견업체에 소속되어 있던 것이다.

파견업체를 통해 간접 고용되어 일하는 것도 서러운데 그 일하는 직장마저 하청업체인 것이다. 실질적 사용자인 학교에 임금 인상을 요구할 경우 식당을 계약한 A업체에 가서 이야기하라 할 거고, A업체에 가서 이야기하면 용역을 계약한 B업체에 가서 이야기하라 할 거고, B업체에 가서 이야기하면 학교나 A업체와 계약된 금액이 적어서 안 된다고 할게 눈에 뻔한 상황인 것이다.

면접 결과, 별 탈 없이 붙었고 식기세척과 청소·잔반 버리기·식자재 관리 업무를 맡게 되었다. 일하기 시작한 후부터 3주 동안은 다른 거 생각 안 하고 식당에서의 업무에만 성실히 집중했다.

아침 7시까지 출근을 하면 식당 청소부터 시작을 했고 그 사이 조리사분들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런 다음 식자재 창고로 가서 점심 식사에 필요한 식자재를 확인한 뒤 주방으로 옮겼다. 그러고 나면 조리사분들은 아침식사하러 오는 학생들에게 배식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나는 퇴식구 쪽으로 이동해서 학생들의 빈 식기를 받아서 남아 있는 잔반이나 수저들을 분류하고 간단히 설거지들을 한 뒤 식기들을 모아두었다. 그렇게 한차례 식사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식기들을 마치 주유소에 있는 세차장과 유사한 프로세스를 가진 식기세척기에 일일히 넣었고 식기들이 레일을 거쳐 통과하면 일일이 빼었다.

학교 비정규직 일의 열악함, 일해보니 몸소 느낄 수 있었다

급식조리실에서 학생들이 먹은 식기를 씻고 있는 조리원들.
 급식조리실에서 학생들이 먹은 식기를 씻고 있는 조리원들.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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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기세척기는 구간별로 다른 프로세스를 가진 곳들을 레일로 식기를 이동하는 방식이라 내가 식기를 넣는 일을 하면 조리사분 중 한 명이 식기를 빼었고 내가 식기를 빼는 일을 하면 조리사 분 중 한 명은 넣는 일을 하였다.

내가 맡은 업무 중에는 식기 세척이 제일 힘들었다. 빠른 시간 안에 수백 개의 식기들을 넣었다 빼야 했고, 특히 메뉴에 뚝배기가 나오는 경우에는 정말 힘들어서 뚝배기들을 깨고 싶은 마음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뚝배기보다 더 큰 시련을 안겨다 준 식기는 돌솥이었는데, 식단을 확인해서 돌솥비빔밥이 나오는 날이면 각오를 하고 출근했다. 돌솥을 생각 없이 식기세척기에서 빼내며 속으로 투쟁가 류의 민중가요를 부르곤 했다.

그렇게 식기 세척까지 마치고 가득 쌓인 잔반통들을 1층으로 옮겨서 잔반을 음식물 쓰레기 통에 버리면 비로소 하루 일정의 절반이 끝나게 되었고 하루 중 유일하게 담배를 피울 수 있는 때가 이때였다. 잔반을 버리고 오면 자신의 업무를 끝낸 분들이 하나둘씩 직접 배식을 하여 대기실에서 식사를 하였다. 식사를 하는 대기실은 식사를 하는 곳이라 보기에는 좀 부족해 보였다. 학교 청소노동자들의 대기실도 냉난방도 제대로 안 되고 쥐가 나올 정도로 열악한데, 학교 비정규직이 머무르는 곳이 열악한 건 어디 가나 똑같음을 알 수 있었다. 

식당에서 일하기 힘든 이유는 노동강도도 강했지만, 열기가 굉장히 강했기 때문이다. 식당의 높은 열기와 노동 강도 때문에 겨울임에도 얇은 티셔츠 한 장을 입고 일해야 했고 식사를 할 때쯤에야 티셔츠가 땀에 가득 젖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근무 중에는 워낙 바쁘고 서로 거리가 멀고 시끄러워서 노동자 간 대화가 거의 없지만, 식사를 할 때는 되게 소란스러웠다.

대화 중 가장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매니저에 대한 '험담'이었다. 당시 식당에서는 15명 정도가 일하고 있었다. 그 중 정규직은 매니저와 주방장 두 명이었고, 나머지인 조리사들과 식당보조는 몇 년을 일하든 동일임금의 비정규직이었다. 주방장의 경우 조리사분들과 함께 일하고 밥도 같이 먹다 보니 동료 관계가 짙었다. 하지만 매니저의 경우 밥도 따로 먹고 주방장 및 조리사들에게 업무를 지시하는 중간관리자의 역할이다 보니 조리사들과의 동료적 관계가 약했다.

특히 주방장의 경우 조리사분들과 나이가 비슷했지만 매니저의 경우 조리사분들보다 20~30년이나 어린데, 학생들이 메인메뉴를 더 달라고 해서 더 줬다는 이유로 조리사분들에게 혼내고 소리를 지르는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매니저가 조리사분들에게 좋은 평판을 듣지 못하는 건 당연한 구조였다.

청소, 경비, 식당 같은 대학 비정규직 사업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호소 되는 불만은 임금보다도 현장소장·매니저와 같은 정규직 중간관리자의 폭압인데 이곳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식당과 청소 일, 따지고 보면 '재생산 노동'이다

평소 청소경비노동자들하고 같이 활동해온지라 식당에서 일하는 고령의 여성노동자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건 큰 무리가 없었다. 하루 중 유일한 휴식시간인 늦은 점심식사가 끝나면 다시 같은 일정이 반복되는 것으로 하루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하루 일정을 마치면 다른 일정을 수행하기 힘들 정도로 녹초가 되었는데, 업무 강도가 이보다 더 강한 조리 업무를 50~60대 고령의 노동자들이 해낸다는 게 경이로웠다. 일은 정말 힘들었지만 업무 이상의 목표가 있다 보니 버틸 수 있었다.

육체적인 힘듦 외에 정신적인 힘듦이 있었는데, 나의 경우에는 근무 중에 아는 학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청소경비노동자들의 경우 자신의 가족에게조차 자신이 어떤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한국에서 청소·경비 일이 저임금인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내가 직접 식당일을 하게 되니 같은 현상이 나에게도 나타난 것이다.

물론 나의 경우 전략적인 이유 때문에 주변에 일한다는 사실을 일부러 알리지 않은 것이지만 유니폼을 입은 상태로 아는 학생들을 보게 되면 느낌이 정말 이상했다. 당시 나는 제적생 신분이라 학교 수업을 듣고 싶어도 못 듣는 상황이었고, 엄밀히 따지면 대학생이 아니었다. 그런데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끼리 식사를 하는 학생들을 보면 저곳에 앉아서 식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졸업장을 버리고서 노동현장에 들어간 선배들도 이런 고민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일과 청소 일을 사회과학적으로 분류하자면 재생산 노동이다. 재생산 노동은 사람들의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하는 활동들을 지칭한다. 육아·청소·주방노동과 같은 가사노동을 재생산노동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재생산 노동의 특징은 그 노동을 안하면 티가 많이 나는 데 비해, 그 노동을 해도 티가 잘 나지 안 난다는 것이고 그런 이유 때문에 생산노동에 비해서 재생산 노동은 저평가받아오고 있다.

여성이 주로 재생산노동을 담당해오다 보니 여성노동의 가치가 남성노동에 비해 저평가받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다 보기 힘들다. 그런데 이런 경향은 임금노동 영역으로 넘어와서도 마찬가지인데 재생산 노동의 특징들이 나타나는 직종들은 대부분 최저임금이며 주로 고령의 여성들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이렇게 한 달을 일하니 조리사분들하고도 어느 정도 친해졌고 업무에도 적응하게 되었다. 이제 슬슬 노동조합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다음 기사 : [대학에서 겪은 일들②] 학교식당 잠입취업 체험기<下>로 이어집니다.


태그:#급식노동자, #식당노동자, #이언주, #막말, #재생산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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